* 이번 주 추천작은 올해 영화 베스트 10으로, 다음 주 추천작은 올해 OTT 베스트 10으로 대체합니다 :)
올해도 어김없이 그 시기가 돌아왔다.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는, 그야말로 '연말 분위기'가 제대로 나지 않는 이 시기에 올해의 영화나 올해의 OTT 추천작들을 뽑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해야 할 것은 해야 하므로, 늘 지켜오던 루틴은 지켜야 하므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요즈음의 세계를 뒤로하고 올해도 국내 개봉작 중 인상 깊었던 작품들을 이곳에 옮겨본다.
작년에 비해서 제법 다양한 영화들이 개봉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호러 영화 장르의 약진 때문일 것이다. 2024년 극장가에는 망작(...)을 제외하고 4~5편 정도의 굵직한 공포 영화들이 개봉했고, 대체로 순위에 들 만큼 좋았다. 그중 가장 큰 이변은 아래 리스트에도 속해있는 <파묘>가 될 것 같다. 영화 리스트를 짜놓고 순위를 가리다 보니 큰 한 방보다는 고만고만하게 다 보듬고 싶은 좋은 영화들이 많아 리스트를 생각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언제나처럼, 아래 리스트의 작품들은 2024년 1월부터 2024년 12월까지의 국내 개봉작들을 대상으로 했다. 영화제에서 공개된 작품들이나 재개봉작은 제외되었다.
10. <악마와의 토크쇼>
<악마와의 토크쇼>는 아날로그 호러 장르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는 것 자체로도 올해의 영화로 회자될 만하다. 파워풀하게 중심 서사를 밀어붙이는 전반부의 설정은 여러 번 곱씹어 볼 만한 장면들의 연속이기도 하다. 낯선 대상과 익숙한 장면들이 유려하게 잘 겹쳐진, 이를테면 '무섭지 않은' 공포 영화이자 미디어에 미쳐있는 사람들을 두루 비판하는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강하게 가미된 즐거운 영화다. 평소 호러 장르를 잘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가볍게 다가가기에 딱 좋은, '도움닫기 호러'라고 해도 좋겠다.
9. <퓨리오사:매드맥스 사가>
<퓨리오사:매드맥스 사가>는 2024년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기대했던 작품이었다.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매드맥스' 세계관을 정통으로 훑는 작품이었다면, 이 작품은 예고된 대로 직전 시리즈의 프리퀄로, 젊은 시절의 '퓨리오사'를 다룬다. 너무나 완성도 높은 전작이 있으므로, 그와 비교할 수밖에 없는 탓에 압도적인 비주얼과 이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해낸 세계관과 장면 등에 대한 만족도는 조금 낮은 편이다. 그러나 퓨리오사를 위한, 퓨리오사에 의해 흘러가는 이 영화는 전작의 분위기를 그대로 답습하며 조금 더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영화였다. 세계관을 설명하는 비주얼적인 장면과, 그 장면 장면을 꿰어 장르를 만들어내는 중심 서사 자체는 전작에 비해, 그리고 '매드맥스 시리즈' 안에서 놓고 보면 탄탄한 편이다. 전작과 다른 속도로 진행되지만, '매드맥스' 시리즈 자체를 더욱 풍성하게 기름칠해 준, 고개 끄덕여지는 프리퀄이라고 할 수 있겠다.
8. <파묘>
압도적인 인기와 지지를 받으며 2024년 올해의 영화 타이틀을 여기저기서 거머쥔 장재현 감독의 <파묘>. 국내에서 '오컬트 장르'를 제대로 알고 있는 유일한 감독이라는 수식이 붙은 <파묘>는, 장재현 월드의 정점을 찍는 동시에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다. 영화 내에서 시도되는 장르 전환의 시도나, 초중반에 대중을 완벽하게 휘어잡는 압도적인 연출력과 탄탄한 서사의 흐름은, 돌이켜봐도 '최고'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나의 신드롬을 형성해낸 '대살굿' 장면을 포함해, <파묘> 내의 수많은 장면은 일종의 실험이나 다름없었는데, 이 실험들이 모두 성공적으로 맞물려 오컬트의 분위기, 호러 그 자체의 분위기를 무한히 살려준다. <파묘>의 초반부, 캐릭터들의 등장과 더불어 파묘가 이루어지고야 마는 이 세계를 보여주는 장면들의 연속은, 국내 호러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라 평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7. <듄: 파트 2>
'현재의 극장이 줄 수 있는 최상의 경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듄: 파트 2>로 정의 내릴 수 있겠다. 이 영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듄' 시리즈의 중간에 해당하지만, 이미 전편에서 보여준 장점을 빋르업해 더 커지고 거대하며 압도적인 비주얼로 관객들을 제압한다. 커진 스케일만큼 디테일은 더 깊어지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자체가 이미 황홀경이 아닐 수 없다. SF 장르의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가슴이 벅차오르는 장면들의 연속이다. 특히나 <듄: 파트 2>를 이야기하면서 메인 빌런인 로타 하코넨, 즉 '오스틴 버틀러'의 연기를 빼놓을 수 없을 텐데, 이 작품이 오스틴 버틀러의 역작은 아니지만(그의 역작은 <엘비스>다), 그가 새로운 방점을 찍고 더 멀리 나가는 배우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 영화는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6. <서브스턴스>
'올해의 영화' 리스트 중 가장 최근에 본 영화이자, 가장 최근 개봉작이기도 한 <서브스턴스>. 관람 직후 단번에 순위권에 오른 이유는 이 영화가 가진 형식 때문이다. <서브스턴스>는 광기와 집착, 그리고 절망 등 타인을 통해 형성되는 일종의 자기혐오에 대한 이야기인데, 호러와 고어의 탈을 입고 이를 좀 더 디테일하고 파격적인 이미지로 풀어내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그것도 그냥 몇 가지 면모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끝까지 가는' 영화인데, 장르적 진입 장벽이 엄청나게 높은 이 영화를 개봉 2주 차에 10만 관객 이상이 봤다는 사실이 사실 내겐 더 '서브스턴스적인 놀라움'이다. 기괴한 방식으로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내는 영화. 정말 좋다.
5. <룩 백>
2024년 개봉작을 꼽는데 역시나 <룩 백>을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체인소맨'으로 스타덤에 오른 후지모토 타츠키의 동명 만화이자 단편인 '룩 백'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몹시 짧지만 아주 강렬하게 감정의 모든 부분을 자극한다. 미치도록 슬프기도 하고 미치도록 아름답고 두근거리는 순간이 교차하는 이 작품을 뭐라 달리 말할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해 본다. 가까이서 보면 커다란 산 같이 막막했던 시간들이 그 시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지점에서 다시 바라볼 때 한낱 가벼운 것이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가 걸어온 시간들임을 인정하고 '나를' 보듬어 안아야 할 때가 있지 않은가. <룩 백>은 이와 같은 감정의 굴곡을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작품이었다. 영화에 대한 단평으로 이런 감상적 리뷰는 적절하지 않지만, 달리 어떤 수식으로 이 영화를 표현할 길이 없다.
4. <오멘: 저주의 시작>
<오멘: 저주의 시작>은 과소평가되었다. 이 영화는 '오멘 신드롬'을 낳은 1976년작 <오멘>의 프리퀄을 완벽하게 구현해냈고, 그를 토대로 수십 년째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고 있는 '오멘 시리즈'의 징크스를 말끔히 떨쳐내버렸기 때문이다. 인기 있는 프랜차이즈 호러 영화의 참패 속에서 완벽히 다른 방식으로, 원작에 대한 최대한의 오마주를 잊지 않은 채 그 자체로 빛나는 후속의 영화는 드물다. 공포영화 장르 내에서뿐만 아니라 수많은 블록버스터 시리즈들을 봐도 그렇다. <악마의 씨>나 <엑소시스트> 같은 전통적인 고전 호러 영화의 범주에서 엇나지 않으며 온전히 새로운 장르와 이야기를 창조해냈다. 남성 중심적으로 전개되었던 이 시리즈의 고전적인 오컬트를 완벽하게 다른 시각으로 리부트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아주 오래도록 기억되고 회자되어야 한다. 특히 공포영화팬들이라면, 모두가 이 영화를 2024년의 베스트로 꼽아 마지않았을 것이다.
3.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보여줄 것은 이제 다 보여주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눈앞에 이 영화가 도착했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을 빌리자면, '소름 끼칠 정도의 단순함'. 그게 바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들어있다. 전작인 <드라이브 마이 카>를 빼닮은 듯한 무대의 설정, 지독하게 정적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한 공간들을 지나면, 대립이 시작된다. 눈에 보이는 표면적 대립은 이를테면 이렇다. 시골마을에 정착하고 사는 사람들과, 그 시골마을을 개발의 명목과 지역 경제 활성화의 명목으로 이용하고 싶은 사람들. 그 사이에 오가는 여러 가지 폭력적이고 유머러스하기도 한, 지극히 아이러니한 이 지점들을 카메라가 훑다가 돌연 폭주한다. 흔히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마지막을 위한 영화라고 하지만, 그 폭주를 위한 빌드업, 그러니까 불안과 불길에 대한 복선을 깔고 그것이 폭발되기까지 '덫'을 놓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탁월함, 그것이 너무나도 반짝이는 수작이다.
2. <추락의 해부>
외딴 시골, 남편의 갑작스런 추락사로 갑작스럽게 용의자로 지목된 유명 작가인 산드라(산드라 휠러). <추락의 해부>는 목격자가 그들의 아들과 안내견이 전부인 이 상황에서, 남자의 사망이 의도된 살인인지 우발적인 자살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순한 사고였는지를 밝혀나가는 꽤 단순한 플롯의 영화다. '사망 사건'을 조사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대부분의 시간을 법정 공방 시간에 할애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플래시백이 거쳐가고 관객들이 알 수 있는, 혹은 유추할 수 있는 어떤 정보들이 조합되며, 이 사건은 말 그대로 아주 낱낱이 '해부'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해부가 일어남에 따라, 산드라를 구성하고 있는 가족의 면면이 아주 디테일하게 펼쳐진다. 개인의 사건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가족의 전반을 아우르는 동시에 그 어떤 판단도 섣불리 하지 못하도록 할 때, 이 영화의 중심이 드러난다. 진실을 알려주는 대신 진술을 구성하는 다양한 파편들을 전달해 주는 방식. 그 방식으로 인해 수만 가지 갈래로 찢기는 생각들. 밝혀질 수 없고 밝히지 않는 게 '중요'한 서사인 이 영화를 보고 나와, 단번에 이건 올해의 영화 중 하나임을 직감했다. 치밀하게 설정되고 직조된 이야기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 것일 수도 있음을 새삼 실감하며.
1. <존 오브 인터레스트>
1, 2위 순위를 놓고 꽤 많은(언제나 그렇듯이...) 고민을 했지만, 역시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올해의 영화로 꼽지 않을 수 없겠다. 홀로코스트를 현재로 끌어오는 영화는 다양했지만, 이 영화는 그 이야기를 전면으로 보여주거나 충격적으로 묘사하는 방법 대신, 보여주지 않고 보려고 하지 않음으로 그 공포와 끔찍함을 극대화한다. 때문에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음향이 이 영화를 가장 돋보이게 만드는 동시에 가장 탁월하게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보여주지 않기' 방식에서 배제되는 것이 바로 음향으로, 소리를 통해 이 모든 상황을 판단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묘사하고 싶은 공포심은 더 극대화된다. '악의 평범성'을 정면으로 관객에게 들이대는 영화인 동시에, 위화감으로 가득한 화면들의 연속 사이에서 간접적인 묘사만으로 고통을 극대화한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중 역사상 최고의 것이라는 다수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는 정말로 이 영화를 빼놓고 지나갈 수 없다.
그밖에 순위에 들지 못한 영화들 중, 기억나는 건 <가여운 것들>이 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신작으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인데, 란티모스 영화를 대체로 좋아하는 편이라 이번 작품도 꽤 많은 기대를 했다. 결과적으로 아주 만족하진 못했지만, 란티모스도 드니 빌뇌브처럼 어떤 지점의 경지에 오른 감독이라 생각하는, 다시 말해 그런 지점들에 대해 존경한다는 것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좀 모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란티모스 만이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가여운 것들>에서는 그게 아주 극대화되었다. 사실 엠마 스톤 차력쇼(...) 보러 간 것이라 여러 지점들이 즐거웠는데, 그 외에 생각할 거리가 있는가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영화를 구성하는 면면들이 대단히 매력적이었으므로, 영화를 보는 내내 정말 재밌었다.
올해의 영화적 체험을 하나 꼽자면 단연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다카포>의 돌비시네마 개봉이다. 돌비로 보기 위해 2022년에 잠시 CGV에서 개봉했을 때 보지 않고 버텼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이 언제쯤 올까, 도대체 언제쯤..? 이라며 손가락 빨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게 돌연 2024년에 이뤄졌고 눈물을 흘리며 극장 앞으로 달려갔다. 이미 아마존프라임에 공개되었을 직후 봤기 때문에 모든 서사를 인지한 상태로 관람했지만, 돌비시네마에서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작품을! 이라는 설정이 킬링 포인트다. 돌비의 쨍한 색감과 박력 넘치는 사운드로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을 보면서 진심으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