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충신동은 4~50년 전 당시의 모습을 아직도 서울 한복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달동네 중 하나다. 아직도 옛 봉제공장들이 꽤 남아 있는 이곳이 셋째 언니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다. 원남동에 살던 우리 가족이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쫓긴 후 월세를 찾아 정착한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헐려 없어진 우리집은 충신동 굴다리에서 충신시장 쪽으로 내려오는 비탈길 끝에 있었다. 번듯한 양옥집이 즐비한 이화동과 하꼬방이라 불리는 판잣집이 가득한 충신동을 가르는 골목 길가에 위치한 우리집은 슬레이트 지붕에 나무로 된 빈지문 4개가 대문을 대신했다. 엄마는 빈지문과 방 사이의 공간에 작은 구멍가게를 꾸렸고, 구멍가게 안에 작은 탁자와 의자를 놓고 막걸리와 녹두부침, 라면 같은 것도 끓여 팔았다. 우리집 빈지문에는 늘 시내에 있는 삼류 동시상영관의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새로 포스터가 교체될 때마다 빈지문 안쪽으로 초대권이 몇 장씩 쑥 들어와 있곤 했다. 그 초대권들은 당연히 큰언니와 오빠의 손으로 들어갔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아픈 사람이었고 늘 술을 마시는 사람이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할 때면 아버지는 무릎 위에 나를 앉혀 놓고, 아직 초등(당시에는 국민)학교도 입학하지 못한 나에게 “우리 막내 중학교 가는 건 봐야 할 텐데!”라고 말하며 울곤 했다. 술을 너무 좋아하고, 술친구 때문에 집까지 팔아버린 아버지를 엄마는 늘 바보, 멍청이라고 타박했지만, 병이 들어 입맛이 까다로워진 아버지가 해달라는 음식은 무엇이든 만들었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탈 기운마저 없어지기 전까지, 셋째 언니와 막내인 나는 가끔 아버지의 자전거 바구니에 실려 경동시장까지 드라이브 가는 호사를 누렸다. 아버지는 대나무로 짜인 직사각형의 바구니를 두 칸으로 나누어, 조금 큰 칸에 언니를 태우고 나머지 한쪽에 나를 앉혔다. 장보기를 마치면 사각 바구니의 모서리 네 귀퉁이에는 엄마의 막걸리 장사에 쓸 댓 병 짜리 참기름 2병과 들기름 2병이 동여매지고, 언니와 나는 가슴에 커다란 배추와 부추를 한 다발씩 안고서 목까지 차오르는 각종 채소와 당면, 미역, 간 고기 같은 부식더미에 파묻혀 돌아왔다.
아버지와 함께 사 온 부식거리는 엄마의 막걸리 장사에 주로 쓰였지만, 우리 형제들에게도 맛있는 간식이 생길 거라는 믿음은 빗나간 적이 없었다. 오빠와 언니들은 부추와 당면이 바구니에서 쏟아지는 것을 보고는 “야채호떡이다!”라고 외쳤고, 장을 봐온 다음날이나 그다음 날쯤이면 우리는 어김없이 야채호떡을 먹었다. 엄마는 이북식 만두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여름이면 만두소를 호떡 피에 넣고 돼지기름에 바삭하게 구워주곤 했다.
맛있는 야채호떡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애가 닳는 일이었다. 엄마가 반죽한 밀가루 덩어리가 따뜻한 아랫목에 들어간 날 밤에는 다음 날 야채호떡을 먹을 생각에 잠까지 설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반죽이 다 부풀어도 엄마는 호떡을 구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엄마가 호떡을 굽기 시작하는 시간은 바로 오빠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기호에 맞추어 만들게 된 야채호떡이지만, 엄마의 야채호떡을 제일 먼저 맛보는 사람은 아버지에서 슬그머니 오빠로 바뀌었다. 온종일 엄마 옷자락을 붙들고 칭얼대보았자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호떡을 빚는 날이면 나는 매번 엄마에게 빨리 굽지 않는다고 툴툴거렸고, 엄마는 그때마다 매몰차게 “기다려!”라고 말했다.
오빠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엄마가 준비해 놓은 밀가루 반죽 덩어리와 호떡 속에 들어갈 소가 담긴 냄비 뚜껑을 수시로 열어보다가 밥주걱으로 손등을 얻어맞기 일쑤였다. 잘게 썰린 부추와 당면 사이로 꼭 짜인 두부 속에 파묻힌 선홍색 고기 알갱이들이 흥건한 돼지기름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일고, 호떡을 먹기 전까지 일체 밥은 물론 다른 어떤 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말도 안 듣는 오빠만 챙기는 엄마가 야속하다는 생각이 거듭될수록 내 입은 점점 더 앞으로 삐져나왔지만 아무리 투정을 부리고 입을 댓 발 내밀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고, 첫 번째로 구워지는 야채호떡은 어김없이 오빠의 손에 쥐어졌다.
아버지가 자리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엄마는 더 이상 아이들을 위한 호떡 같은 건 만들지 않았고, 그때쯤에는 야채호떡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만큼 나도 자랐다. 초등학교에서의 마지막 겨울방학을 한 달 앞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늘 입버릇처럼 예감하시던 나의 중학교 입학은 결국 못 보고 돌아가신 셈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평소에 아버지가 좋아하던 음식을 더 많이 더 자주 못 해준 걸 후회했고, 어차피 낫지 않을 병인데 좋아하는 술이라도 맘껏 마시게 하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야채호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자식들이 좋아하는 호떡을 만들어 주라 엄마에게 채근하고, 당신의 기운이 빠지기 전까지 직접 장을 봐왔다는 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야 알게 되었다.
지금은 그때 먹던 야채 호떡이 어떤 맛이 었는지 기억 조차 희미해져가지만, 자식들을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그 먼 거리를 오갔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나이가 들 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