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 대충 때려 맞춰 짐작하시게!
흔히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타인의 글을 읽거나 말을 들으면 그가 주장하려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하게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글로 옮겨 쓰거나, 대화로 타인에게 알려줄 수 있는 이는 극히 소수이다.
예를 들어보자. 만약 어떤 집단에서 누군가 "아, 그 미네랄 시궁창이가 싫어."라고 글을 올린다면 글만 가지고는 도대체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집단내에서 이미 글쓴이와 교감하고 있던 이들은 "맞아! 그 미네랄 칼슘은 영 아니야."라고 맞장구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저런 단발마적인 글에서 도저히 정보를 추려낼 수가 없다. 왜냐면 사전 교감이라는 단서가 빠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사적인 대화에 간섭할 필요는 없지만, 범주를 넓혀봐도 수많은 공적인 대화와 글 속에서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친박단체의 연설가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이해가 안 되는 발언 투성이다. 그럼에도 그 말을 듣고 "맞아, 맞아."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런 의견에 이미 사전 교감을 충분히 이뤘다고 봐도 무방하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의 개인 필터링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모 유명 웹툰 작가가 트윗에 <독거 여성의 방을 엿보는 여러 남성들의 눈>을 형상화한 만평을 올린 일이 있다. 이 글에 누군가 댓글로 "가운데 저것, 님 아니에요? ㅎㅎ"하니까 웹툰 작가는 "뜨끔~" 하는 식으로 맞장구를 쳤다. 당시 필자도 그 필담(?)이 재밌어서 "흠, 가운데가 아니라 맨 오른쪽 눈 아닌가요?"라고 댓글을 달았다. 만평이란 매우 짧은 지면으로 많은 것을 함축한다. 작가가 트윗에 그러한 만평을 올린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들에 대한 위협요소의 한 가지>를 꼬집어내서 풍자한 것이리라. 처음 댓글을 단 이는 <그러한 여성 위협에 대한 우리나라 남성들의 선입견>을 돌려치기로 "작가님도 남성인데, 저런 내면적 의식을 완전히 버리셨습니까?"라고 농담 겸 공감을 표한 것 같다. 사실 두 분 모두 알던 사이였기에 사전 정보를 바탕으로 이런 추측을 강하게 했다. 필자 역시 <남성들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여성들이 느껴온 불편 요소>에 공감하면서 이러한 풍토가 점점 확산되어 남혐-여혐 논란이 잦아들길 바란다는 생각으로 댓글을 달았다. 공감 코드가 맞으니까 서로 거부감 없이 농담이 오간 것이다.
하지만 반응은 뜨거웠다. 역시 메이저 언론방송의 타이틀을 장식했던 유명 작가답게 팔로워가 엄청 많다. 그들 중에서 이런 대화가 <여성을 매우 불편하게 하는 몰상식한 것>이라 단정하고 많은 분들이 악플성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 해당 작가는 <메갈리아 논쟁> 당시에 다른 매체에서 남혐 여성을 비하하는 부류를 향해 비수를 날려서 메갈 작가로 찍혀있었다. 덕분에 "기회는 찬스다!"를 외치는 남성우월주의 전사들에게도 동시에 공격받았다. 공인의 트윗 타임라인은 필자와 같은 듣보잡의 타임라인과는 역시 다르더라.
그 작가는 결국 사과의 트윗을 올리고, 해당 트윗은 삭제했다.
모든 글은 하나의 멘션에 대해서 앞뒤 전후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많다. 간략한 이 글만 읽고도 필자가 왜 부러워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많다. 하지만 아예 이해 못하는 이들도 역시 많을 것이다. 글 쓰는 이들은 그러한 모든 불확정 독자를 대상으로 고려해서 자세한 부연설명을 곁들일 의무는 없다. 오로지 읽는 이들이 알아서 할 문제다. 그럼에도 어떻게 수많은 글에서 오역 없이 정확한 의미를 알아낼 수 있을까? 그것은 행간에 감춰진 단서들을 각자의 경험과 독해력으로 연결해서 유추하는 방법뿐이다. 때론 많은 훈련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이미 고등교육을 마친 정상적인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필자의 못된 버릇이 한번 발휘가 된 일도 있다. 모 커뮤니티의 너무 단순하게 글을 읽는 풍토를 비꼬기 위해 <칭찬, 아닌 칭찬> 글을 길게 써서 올렸다. 올리는 순간, 곧 누군가가 공격적으로 반응할 테고, 비추 폭탄에 유배를 가겠지... 싶었다. 하지만 웬걸? 잠시 뒤에 게시판 내에서 뜨거운 반응과 함께 베스트글에 올라갔다.
이게 비판인지, 칭찬 인지도 구분 못하나? 글을 너무 못쓴다는 자괴감에 괴로워했다.
그나마 말미에 보다 못한 어떤 분이 "이런 고약한 장난치시다니, 실망입니다."라고 비난하시더라. 그분께 정말 감사드린다. 안 그랬으면 시리즈로 나갈 뻔했었다. 잠시 잘못을 뉘우치며 한 가지는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글의 행간에 감춰진 공백,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면 매우 인상 깊고 오래가는 글이 될 수도 있다. 반면에 부적절하게 활용하면 '최근의 직설적 대화법에 익숙해진' 많은 분께는 양날의 검처럼 작용할 수도 있다.
어떤 분들의 글을 읽어보면 스펙트럼이 매우 넓어서 누가 읽어도 머릿속에 속속 들어오는 글이 있다. 흔히 쉬운 주제, 간단한 주장은 그냥 감성만 자극하거나 단순한 용어만 나열하면 대충 "아~ 저 사람은 이런 말을 하고 싶은가 보다."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반면, 주제가 약간만 복잡해져도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글을 잘 쓰는 이들은 그런 복잡한 내용도 쉽게 이야기하며, 심지어 초보에서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공감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런 명필은 정말 극소수이며, 심지어 그런 명필들 조차도 괜찮은 글을 항상 내놓는 것은 아니다. 좋은 글과, 부족한 글은 공존한다.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간혹 부족한 글이라도 '필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항상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좋은 글은 그에 어울리는 좋은 독자를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