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센-에슈베게의 율리아나의 스캔들과 헤드빅 엘레오노라 왕비
칼 10세 구스타프는 아들인 칼 11세가 어릴 때 사망했으며 이 때문에 칼 11세의 어머니였던 헤드빅 엘레오노라 왕비가 섭정이 되었으며 궁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녀는 어린 아들의 양육에 신경 썼으며 이 때문에 칼 11세는 어머니를 늘 궁정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여성으로 생각했었습니다.
홀슈타인-고토로프 가문 출신이었던 헤드빅 엘레오노라는 덴마크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덴마크에서 독립하길 원했던 인물이었고 반 덴마크 성향을 가지고 있었죠. 이런 상황은 헤드빅 엘레오노라도 그대로 물려받았었습니다. 게다가 덴마크는 스웨덴의 오랜 적이기도 했었습니다.
헤드빅 엘레오노라는 시누이 엘레오노라 카타리나의 딸이었던 헤센-에슈베게의 율리아나를 궁정으로 불러왔습니다. 헤드빅 엘레오노라는 언니의 마리아 엘리자베트가 일찍 죽자 그녀의 딸이었던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아 시빌라를 데려다 키우기도 했었는데 아마도 그녀는 이런 조카들 사이에서 며느리감을 구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율리아나나 마리아 시빌라는 모두 칼 11세보다 세 살이 더 많았었습니다만 궁정에서는 아름다운 율리아나가 언젠가 칼 11세와 결혼할 것이라고 여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율리아나의 결혼은 성사되지 못합니다. 1672년 율리아나는 대형 사고를 쳤기 때문입니다.
1672년 율리아나는 외숙모였던 헤드빅 엘레오노라 왕비와 함께 마차를 타고 드라이브에 나섰었습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이때 산통으로 마차에서 주저앉았었다고 합니다. 율리아나는 아들을 낳았습니다만 아이의 아버지는 약혼자로 여겨지던 국왕이 아니었습니다. 율리아나 아이의 아버지는 유부남이었던 궁정 조신인 구스타프 릴리 백작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백작은 궁정에서 추방당하고 유배를 떠나야 했으며 율리아나는 궁정을 떠나 시골로 보내지게 됩니다.
하지만 헤드빅 엘레오노라 왕비는 아직까지 율리아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듯한데 이 때문에 율리아나를 궁정에서 조용한 시골로 보냈었던듯합니다.
1675년 칼 11세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덴마크의 공주인 울리카 엘레오노라와 약혼하게 됩니다. 스웨덴 입장에서는 적을 하나라도 줄이겠다는 목적이었죠. 덴마크 쪽에서는 공주의 오빠이자 국왕이었던 크리스티안 5세는 이 결혼을 탐탁지 않아했지만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모후였던 소피아 아말리아 왕비가 딸이 왕비가 되는 것이었기에 이 혼담을 밀어붙였다고 합니다.
칼 11세의 모후였던 헤드빅 엘레오노라는 덴마크 공주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헤드빅 엘레오노라의 바람이 이뤄지는 듯했었죠. 칼 11세가 약혼한 그해에 스웨덴과 덴마크는 다시 전쟁관계에 돌입합니다. 이렇게 되자 덴마크 쪽에서 약혼을 깨라고 공주를 압박했었죠. 아마도 헤드빅 엘레오노라는 시골에 가있던 헤센-에슈베개의 율리아나를 다시 한번 떠올렸을 것입니다만 율리아나는 다시 한 번 모두를 경악하게 만듭니다. 1679년 율리아나는 또 다른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번 아이의 아버지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미혼의 남자였죠. 율리아나는 이제 사촌인 국왕 칼 11세에게 아이 아버지와의 결혼을 승낙하여달라고 요청합니다. 칼 11세는 율리아나의 결혼을 승낙하였으며 남편에게 "릴리엔보리 남작"지위를 부여했다고 합니다. 율리아나는 1680년 연인과 결혼했으며 이후 스웨덴을 떠나 네덜란드에서 거주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스웨덴과 덴마크가 평화협정을 체결했으며 이 협정을 통해 덴마크의 공주였던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칼 11세와 결혼하기로 결정되고 1680년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스웨덴의 왕비가 됩니다. 하지만 헤드빅 엘레오노라 왕비는 며느리에게 호의적으로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