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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Nov 04. 2016

님펜부르크 미인갤러리의 인물들(25)

조피 프레데리케 폰 바이에른(1805–1872)

조피 프레데리케 폰 바이에른, 1841, 요제프 카를 슈틸러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어머니로 "조피 대공비"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조피 프레데리케 폰 바이에른 Sophie Friederike von Bayern(1805–1872) 는 바이에른의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와 그의 두번째 아내인 바덴의 카롤리네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때문에 조피는 루드비히 1세의 이복 여동생이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와 바덴의 카롤리네 사이에서는 여섯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중 네명이 각각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엘리자베트와 아말리, 마리와 조피 이렇게 일란성 쌍둥이들이었는데 이 네명의 딸들은 각각 프로이센의 왕비, 작센의 왕비들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제의 어머니가 됩니다. 물론 조피의 여동생인 루도비카는 후에 시씨황후의 어머니가 됩니다.


자매들인 마리(작센의 왕비)와 루도비카(시씨황후의 어머니)와 함께 있는 조피


미남미녀가 많기로 유명한 바이에른 왕가였기에 조피 역시 아름다운 여성이었으며 아마도 루드비히 1세는 황후가 될지 모르는 아름다운 여동생의 초상화를 미인갤러리에 걸어놓고 싶어했었던듯합니다.


조피는 1824년 오스트리아의 대공이었던 프란츠 카를 대공과 결혼합니다. 프란츠 카를 대공은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1세의 아들로 조피의 둘째언니였던 카롤리네는 프란츠 1세의 세번째 아내로 프란츠 카를 대공의 새어머니이기도 했었습니다. 이 결혼은 전형적인 정략결혼으로 프란츠 카를 대공에게는 형이 있었지만 그 형은 제위를 잇기에는 신체적,정신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기에 결국 프란츠 카를 대공이 형의 뒤를 이어 황위를 잇거나 그의 후손들이 황위를 이을것이라 여겨졌었습니다. 그렇기에 프란츠 카를 대공과의 결혼은 오스트리아의 황위계승자와 결혼하는 것과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


조피 대공비는 결혼후 오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결혼 6년만인 1830년 장남인 프란츠 요제프를 낳습니다. 그리고 황위 계승자가 될 여러 아이들을 낳았죠. 이런 상황은 그녀의 시아버지인 프란츠 1세가 조피를 궁정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여성으로 만들게 했습니다. 조피 대공비는 언니이자 시어머니였으며 궁정에서 최고의 지위였던 황후보다도 더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아주버니가 퇴위했을때 남편을 설득해서 황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게 했다고도 합니다. 이것은 그녀가 남편보다는 아들이 즉위하는 것이 오스트리아 황실을 유지하는데 더 도움이 될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인 프란츠 요제프와 홤께 있는 조피 대공비


아들인 황제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조피 대공비였습니다만, 아들의 결혼문제에서는 결국 아들에게 져서 황후감으로는 탐탁치 않았지만 너무나 아름다웠던 조카 엘리자베트(시씨)를 며느리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조피 대공비의 생각대로 시씨황후는 황후로써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힘들어했으며 조피 대공비는 이런 며느리를 닥달하는 시어머니 역할을 충실히 했습니다.


조피의 조카이자 며느리였던 바이에른 공작영애 엘리자베트, 시씨황후, 전설적인 미모로 유명했다지만 그녀를 만난 빅토리아 여왕은 "울 며느리가 더 예뻐"라고 이야기하셨다고 합니다.


1841년의 조피는 황실에 아들들을 낳아줘서 황위게승권을 걱정없게 만든 여성으로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매우 대접받는 여성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슈틸러의 초상화에도 매우 당당한 모습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1805–1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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