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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Apr 23. 2021

빈터할터가 그린 사람들...(28)

오스트리아의 마리 헨리에테(1832-1902)

오스트리아의 마리 헨리에테, 벨기에의 마리 앙리에트 왕비, 1865년경, 프란츠 자비에르 빈터할터 작품

오스트리아의 마리 헨리에테 여대공은 오스트리아의 대공이자 헝가리 팔라틴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분가를 성립한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대공과 그의 세번째 아내인 뷔르템베르크의 마리아 도로테아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마리 헨리에테의 아버지인 요제프 대공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손자이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아들이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동생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대공, 헝가리의 팔라틴,마리 헨리에테의 아버지


마리 헨리에테의 어머니인 뷔르템베르크의 마리아 도로테아는 뷔르템베르크 가문 출신으로 마리아 도로테아의 아버지인 뷔르템베르크의 루드비히는  뷔르템베르크의 국왕 프리드리히 1세의 동생이자 러시아의 파벨 1세의 아내가 되는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의 오빠이기도 했었습니다.


뷔르템베르크의 마리아 도로테아, 마리 헨리에테의 어머니


마리 헨리에테는 17살이었던 1853년에 벨기에 왕위계승자인 브라반트 공작 레오폴(후에 레오폴 2세)와 결혼을 합니다. 이 결혼은 정략결혼이었는데 브라반트 공작의 아버지인 레오폴 1세는 신교도였기에 주로 가톨릭을 믿는 벨기에에서 왕가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가톨릭 며느리를 원했었으며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 같이 오래되고 강력한 왕가와 통혼하는 것을 원했었다고 합니다.


마리 헨리에테와 레오폴은 성격이 너무나 달랐다고 합니다. 마리 헨리에테는 지적이며 교육을 잘 받았으며 활달한 성격에 승마에 열정을 쏟는 사람이었으며 반면 레오폴은 군사적인 것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내성적 성격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둘은 처음부터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마리 헨리에테는 어머니에 의해서 결혼을 강요받았고, 레오폴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했다고 합니다.


레오폴 2세와 마리 앙리에트 왕비


부부 사이는 점차 더 멀어져가는데 마리 헨리에테는 가정적으로 불행했기에 오직 자신의 말들에게만 신경을 썼으며, 레오폴은 아내외 다른 여성들과 연애관게에 집중합니다. 마리 헨리에테는 자녀들 특히 딸들에게 그다지 애정을 쏟지 않았는데 당대에는 그녀가 자신의 말보다도 자녀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이야기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불행한 결혼생활 때문에 자녀들에게도 관심이 없었던듯합니다.


마리 헨리에테의 둘째이자 유일한 아들이었던 브라반트 공작 레오폴은 9살때 사망하게 됩니다. 이에 레오폴 2세는 아들을 잘 돌보지 못했다고 아내를 비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은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 다시 함께 했었지만 막내딸인 클레망틴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막내가 태어난뒤 부부는 거의 남남처럼 지내게 됩니다.


아들 브라반트 공작 레오폴과 함께 있는 마리 앙리에트


마리 헨리에테는 남편과 거의 남남처럼 지냈지만 벨기에의 왕비로써 의무를 수행했으며 그녀는 사랑받는 왕비로 여러가지 일들을 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1895년 궁정에서 은퇴해서 개인적 삶을 살았습니다. 아마 마리 헨리에테는 궁정은 막내딸인 클레망틴이 안주인 역할을 해야했다고 합니다.


세 딸들과 함께 있는 마리 앙리에트 왕비


마리 헨리에테는 이후 브뤼셀 인근의 스파 지역에서 죽을때까지 개인적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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