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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Apr 16. 2021

빈터할터가 그린 사람들...(26)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대공,멕시코의 막시밀리아노황제 (1832-1867)

멕시코의 막시밀리아노 황제, 1864, 프란츠 자베이르 빈터할터 작품


후에 멕시코에서 막시밀리아노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는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대공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과 그의 아내인 바이에른의 조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1세였으며 백부는 황제 페르디난트 1세였습니다. 비록 그의 아버지는 장남이 아니었지만, 페르디난트 1세에게는 후손이 없었으며 반면 프란츠 카를 대공은 아들만 넷이 있었기에 황실에서는 황위가 이미 프란츠 카를 대공과 그의 아들에게 이어질것이라고 알았다고 합니다.

막시밀리안 대공의 어머니인 조피 대공비는 매우 강인한 여성으로 오스트리아 황실을 이끌어나가는 인물이었다고도 알려져있습니다. 조피 대공비는 1848년 혁명이 일어나고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했을때 남편을 설득해서 남편에게 황위를 포기하도록 했으며 장남인 프란츠 요제프가 황위를 잇도록 만들었다고도 알려져있습니다.


막시밀리안 대공은 어머니 조피 대공비가 가장 좋아한 아들이었으며, 매우 지적이었으며 사람들과 잘 지내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규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인물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성격은 형수인 시씨 황후와 잘 맞았을 것이며, 궁정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던 시씨 황후는 이 시동생과는 잘 지냈었다고 합니다.


프란츠 카를 대공과 조피 대공비 그리고 둘의 네아들과 두 며느리, 맨 왼쪽이 프란츠 요제프 황제이고 그 옆이 막시밀리안입니다. 1860년


1857년 막시밀리안 대공은 벨기에의 공주였던 샤를로트와 결혼합니다. 이 결혼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결혼이었는데 특히 샤를로트의 재산은 막시밀리안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벨기에의 샤를로트, 1848년, 헤르만 빈터할터(프란츠 빈터할터의 동생입니다.)


막시밀리안 대공은 해군으로 복무했으며 형에 의해서 베니스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견해는 형과 달랐으며 이것은 황제의 분노를 사는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막시밀리안 대공은 총독 지위를 물러나야했었습니다.


막시밀리안 대공, 빈터할터 작품


총독지위에서 물러난뒤 막시밀리안은 나폴레옹 3세에게서 멕시코 황제 지위를 제안받습니다. 멕시코는 에스파냐의 식민지였으며, 에스파냐는 한때 합스부르크가가 통치했었기에 이런 연결고리로 막시밀리안에게 황제 자리를 제안한것이었죠. 막시밀리안의 형인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이에 대해서 부정적 반응을 보였었지만 막시밀리안의 아내인 샤를로트는 지지했었으며 결국 막시밀리안은 이 제안을 수락했고 1864년 둘은 멕시코의 막시밀리아노 황제와 카를로타 황후가 됩니다.


막시밀리아노 황제와 카를로타 황후,


하지만 막시밀리아노 황제가 멕시코로 간 직후, 프랑스군은 멕시코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이것은 막시밀리아노 황제의 입지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아노 황제에게 멕시코를 떠나야한다고 했지만, 막시밀리아노는 자신을 지지해준 사람들을 떠날수 없었으며 결국 멕시코에 남았습니다. 대신 그의 아내인 카를로타 황후가 유럽으로 가서 다른 유럽 국가에 도움을 청하게 되죠.


멕시코의 막시밀리아노 황제,1865년경, 프란츠 자비에르 빈터할터


결국 막시밀리아노는 1867년 멕시코에서 공화파에 의해서 사로잡혔으며 총살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후에 그의 시신은 오스트리아로 돌아왔었습니다.


처형 직전의 막시밀리안,1882년, 장-폴 로랑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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