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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Apr 09. 2021

빈터할터가 그린 사람들..(27)

벨기에의 레오폴 2세(1835-1909)

벨기에의 레오폴 2세, 브라반트 공작 시절, 1844, 프란츠 자비에르 빈터할터 작품

벨기에의 레오폴 2세는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 1세와 그의 아내인 루이즈 도를레앙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벨기에 국왕의 후계자로 브라반트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았었죠. 레오폴 2세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과 사촌관계이기도 했었습니다.


어머니 루이즈 왕비와 함께 있는 레오폴 2세, 1838년, 프란츠 자비에르 빈터할터


레오폴 2세는 1853년 오스트리아의 마리 헨리에테 (마리 앙리에트)여대공과 결혼합니다. 마리 헨리에테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레오폴트 2세의 손녀로, 그녀의 아버지는 헝가리의 팔라틴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쪽 분가를 세운 요제프 대공이었죠. 레오폴 2세와 마리 헨리에테는 전혀 맞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부부는 불화가 심했는데 특히 레오폴 2세가 수많은 다른 여성들과 바람을 피웠기에 둘의 사이는 더 냉담해졌으며, 특히 후게자인 아들 레오폴이 어린 나이로 병사하면서 부부사이는 극악으로 치닿게 됩니다. 레오폴 2세는 아내가 아들을 잘 돌보지 않아서 죽었다고 원망했었으며 특히 막내딸인 클레망틴이 태어난 뒤로는 완전히 별거상태로 살았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 헨리에테, 벨기에의 마리 앙리에트 왕비, 1860년대, 프란츠 자비에르 빈터할터


레오폴 2세는 벨기에 국내 정치에서는 꽤나 성공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생은 물론 죽은후에까지도 악명을 남기게 됩니다. 바로 콩코를 착취한 일때문이었죠. 레오폴 2세는 개인적으로 탐험가에게 지원을 했으며 콩고를 자신의 개인 영지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무나무를 심어서 채취했는데 이때 콩고 사람들에게 매우 무자비했었습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손발을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죠. 그렇게 콩고를 착취해서 레오폴 2세는 엄청난 부를 쌓았는데 그 부를 몽땅 정부였던 카롤린 드라크루아에게 쏟아붓습니다.국왕보다 50살이나 어렸던 카롤린 드라크루아는 엄청난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으며 이 돈은 바로 레오폴 2세가 콩고에서 착취한 돈으로 썼던 것입니다.


레오폴 2세는 아내가 낳은 딸들에게는 무정했었던 반면, 정부인 카롤린 드라크루아가 낳은 아들들에게는 매우 잘 대해줬었으며, 나이가 점점 들어서면서 더욱더 괴팍해지는 국왕을 진정시킬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인 카롤린이 더욱더 힘을 얻게 되기도 합니다.


두 아들과 함께 있는 카롤린 드라크루아


레오폴 2세는 아내인 마리 앙리에트가 사망한뒤 정부인 카롤린 라크루아와 재혼합니다. 하지만 이 결혼이 정식으로 인정되는 지에 대해서는 좀 애매한 면이 있다고 합니다만, 어쨌든 레오폴 2세는 카롤린이 낳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물려주고 싶어했기에 카롤린과 결혼하려했을 듯합니다만 둘의 결혼은 정식으로 인정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잘먹고 잘살던 레오폴 2세는 콩고에서의 만행이 알려진후 여론이 악화되자 1908년 콩고에 대한 소유권리를 포기하고 벨기에 정부로 넘겨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09년 사망합니다.


레오폴 2세


레오폴 2세는 카롤린과 두 아들들에게 엄청난 재산을 남겨주었는데 이미 살아생전에 명의를 카롤린 앞으로 해놓은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재산 문제는 카롤린과 레오폴 2세의 딸들 간의 재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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