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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Mar 26. 2021

빈터할터가 그린 사람들...(24)

파리 백작 필리프 도를레앙

필리프 도를레앙, 파리 백작, Prince Philippe of Orléans, Count of Paris ,1842년경,빈터할터

후에 파리 백작이라는 칭호로 알려지게 되는 필리프 도를레앙은 프랑스의 국왕 루이 필리프의 손자로 루이 필리프의 장남으로 후계자였던 오를레앙 공작 페르디낭 도를레앙과 그의 아내인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헬레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태어날때 국왕의 장손으로 아마도 훗날 국왕이 될것이라 여겨졌을 듯합니다.


하지만 인기있었던 아버지 페르디낭이 마차사고로 사망한뒤 왕가의 인기는 떨어지게 되었으며 결국 그의 할아버지인 루이 필리프는 국왕 지위에서 물러난뒤 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올라야했습니다. 필리프 도를레앙은 루이 필리프의 후계자였지만 그 역시 할아버지가 망명한뒤 함께 프랑스를 떠나야했었죠.


오를레앙 공작 페르디낭과 아내인 엘렌 그리고 두 아들 필리프와 로베르


할아버지인 루이 필리프가 1850년 망명중 사망하면서, 필리프 도를레앙은 오를레앙 가문의 수장이 됩니다만 그는 이때 미성년이었으며 아마 바로 왕위계승요구자로써의 일을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문의 수장으로 "파리 백작"칭호를 쓰게 되죠. (파리 백작령은 프랑스 국왕이 가지는 영지중 하나로 파리 백작이라는 칭호를 쓰는 것은 프랑스 왕위요구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죽은뒤 필리프 도를레앙과 동생인 로베르 도를레앙은 할머니가 있는 영국에 정착했었습니다. 그는 그리고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가 되죠. 하지만 그는 왕위계승요구자로써 군사적 경험을 쌓아야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동생과 미국의 남북전쟁에 북군으로 참전했었으며 공적을 쌓아서 장군이 되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파리 백작 필리프와 동생인 샤르트르 공작 로베르, 미국 북부군의 군복을 입은 모습.


그는 프랑스로 돌아온뒤 사촌인 마리 이자벨 도를레앙과 결혼합니다. 그녀는 필리프의 숙부였던 몽팡시에 공작 앙투안과 그의 아내인 에스파냐의 인판타 루이사 페르난다의 장녀였었죠. 둘 사이에서는 여덞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파리 백작과 아내인 마리 이사벨 도를레앙, 그러고보니 마리 이사벨 도를레앙의  여동생이 에스파냐의 왕비가 되는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네요.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한뒤 프랑스는 잠시 입헌군주제로 돌아가서 부르봉 왕가의 국왕을 다시 맞을 것을 고려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부르봉 정통 후계자인 샹보르 백작 앙리(샤를 10세의 손자)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커지게 됩니다. 그런데 샹보르 백작에게는 후계자가 없었고 프랑스 왕위계승권리를 포기한 에스파냐 왕가쪽을 제외하고는 부르봉 직계 역시 단절되었기에 결국 샹보르 백작의 후게자로 파리 백작이 될것이라고 여겨졌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샹보르 백작은 조건을 거부하고 결국 프랑스는 공화국으로 남았게 되죠. 그리고 파리 백작은 샹보르 백작이 죽은뒤 왕당파에 의해서 국왕 "필리프 7세"라고 인정받게 됩니다.


프랑스 왕위계승요구자는 프랑스에 살수 없었기에 파리 백작은 가족들과 함께 영국에서 살았으며 필리프는 영국에서 사망합니다.


파리 백작, 필리프 도를레앙


필리프 도를에앙의 장녀인 마리 아말리는 포르투갈의 왕비가 되었으며 엘렌은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였던 앨버트 빅터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종교적 문제로 결혼하지 못했던것으로 유명했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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