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담
루이제 울리케는 부모의 보호아래 성장하게 됩니다. 당대 여성 왕족이라면 성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결혼을 생각해야했었습니다.루이제 울리케는 프로이센 국왕의 딸이었으며 또한 영국 국왕의 외손녀이기도 했었습니다. 당연히 신분이 높았던 것은 물론 외교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에 중요한 신붓감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딸들은 모두 아름답다고 알려져있었는데, 특히 루이제 울리케는 더 아름답다는 평가였습니다. 훗날 큰오빠인 프리드리히 2세는 조카중 한명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엘리자베트의 미모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루이제 울리케를 닮았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사실 루이제 울리케의 어머니는 여전히 자신의 영국쪽 조카들과 자신의 자녀들을 결혼시키길 강력하게 원했었으며, 루이제 울리케의 외삼촌인 영국의 조지 2세 역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루이제 울리케의 남편감으로 자연스럽게 영국의 왕자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1736년 웨일스 공은 작센-고타의 아우구스테와 결혼을 했기에 루이제 울리케의 남편감으로는 더이상 여겨지지 않았지만 조지 2세에게는 또다른 아들이있었지만 여전히 루이제 울리케의 아버지는 영국과의 혼담을 원하지 않았으며 결국 영국쪽 혼담은 그렇게 없던 일이 됩니다.
루이제 울리케는 영국 뿐만 아니라 다른 왕자들 역시 그녀를 신붓감으로 고려합니다. 여기에는 나폴리와 시칠리의 국왕이었던 카를로 7세 & 5세 (후에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3세)나 헤센-다름슈타트의 루드비히 9세나 팔츠-츠바이브뤽켄의 크리스티안 6세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팔츠-츠바이브뤽켄의 크리스티안 6세와의 혼담은 프랑스 측에서 주선했었으며 이루어질 가능성도 컸었습니다. 하지만 1740년 루이제 울리케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사망했으며 루이제 울리케의 오빠인 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했는데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은 루이제 울리케의 혼담을 중단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프리드리히 2세는 기존의 아버지의 외교 정책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루이제 울리케의 기존 혼담이 프리드리히 2세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으며 곧 루이제 울리케의 혼담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프리드리히 2세는 바로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 뛰어들게 되었으며 이것은 루이제 울리케의 혼담에 대해서 더욱더 신경쓸수 없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루이제 울리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여동생인 안나 아말리와 함께 어머니의 궁정에서 지내게 됩니다. 루이제 울리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 이미 20살이었으며 이것은 당대 왕족들에게는 적지 않은 나이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루이제 울리케는 결혼할 가능성이 점차 줄어들게 됩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루이제 울리케가 결혼할 가능성이 별로 없아고 여겼으며 여동생의 앞날을 생각해야했습니다. 그리고결국 1743년 루이제 울리케에게 퀘들린부르크Quedlinburg의 수녀원장직을 부여하게 됩니다. 퀘들린부르크의 수녀원장은 퀘들린부르크와 그 인근 지역을 통치하는 통치군주로 수익이 많은 매우 부유한 지위였습니다. 이곳은 원래 가톨릭 수녀원이었지만 종교개혁이후 개신교 수도원으로 바꼈으며 이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가 여동생인 루이제 울리케에게 이 지위를 부여할수 있었습니다. 울리케 루이제의 언니인 필리피네 샤를로테는 오빠인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동생이 이 지위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동생이 자랑스러워하고 만족스러워할것이라는 편지를 보냈었습니다.
이렇게 루이제 울리케는 퀘들린부르크의 통치 수녀원장이 됩니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루이제 울리케에게 혼담이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스웨덴에서였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더하기 이야기
중세시대에는 여성들의 재산권 행사가 제한 되어있었습니다. 여성들이 상속받은 재산은 여성들의 남성보호자(아버지,남편,형제,아들,그외 남성친척이나 후견인)가 재산권을 대리했었고 여성 스스로는 재산권을 행사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렇기에 중세시대 여성들이 독립적으로 살아갈수 있는 방법이 매우 적었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이 남성보호자 없이 경제적 생활을 누릴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 바로 수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수녀가 되면 기본적으로 수도원에 들어가서 속세와 인연이 끊어지게 되지만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세상과 왕래를 했었습니다.
중세 시대 왕가에서 자주 딸이나 아들을 성직자로 만들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일단은 부모가 독실한 신자인 경우가 컸습니다. 하지만 딸들이 너무 많아서 지참금 주기가 애매하거나 아니면 결혼할만한 적당한 상대가 없을 경우 수녀원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또 영지를 분할해서 상속해줄수 없는 경우 아들들중 몇명은 성직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실 가문에 이익으로 성직자가 되는 것 자체가 중세에서는 또하나의 권력을 손에 넣을 기회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고위 성직자가 되는 경우는 본인 스스로와 가문 모두에게 이익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수도원장이나 주교 이상의 지위를 갖는 경우에는 수도원의 영지이나 주교령,대주교령등을 통치할 기회를 얻는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지위는 대부분은 남성들의 지위이지만, 몇몇 수도원은 수녀들을 위한 수도원이었고 이런 수도원은 당연히 여성이 수도원장이 되기때 여성 역시 대영주로 안정적 삶을 누릴수 있었습니다.
루이제 울리케가 수도원장이 된 퀘들린부르크 수도원은 10세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오토 1세의 어머니이자 성인으로 시성받은 링겔하임의 성 마틸다가 남편이자 동프랑크의 국왕이었던 하인리히 데어 포글러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수도원이었습니다. 이런 연결고리는 퀘들린부르크 수도원이 독립적 영지를 가진 수녀원으로 성장할수 있었으며 특히 퀘들린부르크 수도원의 원장수녀는 교황의 직속으로 주교의 간섭마저 받지 않을수 있었습니다. 또 황제의 어머니이자 왕비가 세운 수도원이었기에 재산 역시 매우 많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수도원의 원장 지위는 매우 중요했었습니다. 종교개혁이후 이 수도원은 개신교 수도원이 되었고 프로이센의 영향력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2세가 이 수도원 원장지위를 여동생들과 조카들에게 부여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가 되면서 결국 퀘들린부르크 수도원 지역은 세속화를 거쳐서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