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두번째
잉글랜드 왕국은 현재 영국을 구성하는 네 개의 지역중 하나로, 그레이트 브리튼 섬(일반적으로는 브리튼 섬이라고 부름)의 남쪽 지역에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실 잉글랜드는 오래도록 유럽과 세계에서 강력한 지역중 하나였으며 이 때문에 우리가 쓰는 한자어 이름인 “영국”의 영 역시 잉글랜드를 가리키는 한자어 영길리英吉利에서 나온 말이기도 합니다.
잉글랜드를 성립하는 사람들은 앵글로-색슨인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5세기 무렵부터 브리튼 섬에 정착한 사람들로 사실 로마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유럽 대력으로 이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브리튼 섬에 현재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후기 구석기 시대라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리고 철기 시대 무렵 브리튼 섬에는 켈트 인들이 정착했었습니다. 이후 로마가 성장하고 갈리아 지방을 점령하면서 바다너머에 있는 브리튼 섬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을 점령한뒤 이어서 브리튼 섬을 침공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그의 뒤를 이은 로마의 지도자들에게 계속 이어졌으며 결국 1세기 클라디우스황제 시기 브리튼 섬 대부분을 장악하고, 브리튼 섬은 브리타니아 속주가 됩니다.
하지만 로마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4세기말 로마군은 브리튼섬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앵글로-색슨인이라고 알려지게 되는 게르만 인들이 5세기부터 유럽 대륙에서 브리튼섬으로 이주를 시작합니다. 이들은 대륙과 가까운 브리튼섬 동부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세력을 확대합니다. 이 앵글로-색슨인들이 작은 부족단위에서 점차 커져서 작은 소국을 형성하던 5세기부터 잉글랜드가 성립되던 9세기 무렵까지를 일명 “칠왕국시대”라고 부르는데 앵글로-색슨 인들이 통치하던 브리튼 섬 지역을 각각 이트스 앵글리아, 머시아, 노섬브리아,웨식스를 비롯한 켄트,에식스,서식스등의 다양한 나라들이 세력을 겨루던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 칠왕국 시대가 끝나게 되는 것은 바로 북쪽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노르드인 즉 바이킹의 잉글랜드 침입 때문이었습니다. 8세기말이 되면서 바이킹들이 전 유럽을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잉글랜드 역시 여기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브리튼 섬은 오래도록 외적이 없었기에 풍요로웠으며 당연히 밖으로 세력을 넓히던 바이킹의 중요한 목표중 하나가 됩니다. 특히 9세기의 바이킹의 대대적 공세(이교도 대군세)는 앵글로 색슨 왕국들을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물론 바이킹들은 주로 “약탈자”였기에 바이킹의 점령은 대부분 약탈로 끝났었습니다. 하지만 이교도 대군세가 브리튼 섬으로 진출한 이후 이들은 브리튼 섬에 정착하려하고 있었고 당연히 브리튼 섬에 있던 기존 세력이었던 앵글로-색슨인들은 이들을 막으려했습니다. 하지만 초기 상황은 앵글로-색슨인들에게 매우 나쁘게 돌아갔었습니다만, 웨식스의 국왕 앨프러드가 바이킹과의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자신의 나라를 지켜냈으며 심지어 정착한 바이킹들을 개종시켜서 자신의 세력안으로 포용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앨프러드는 “대왕”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는데 앨프러드는 앵글로-색슨인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하나의 나라로 통합해서 바이킹에 대항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물론 앨프러드는 앵글로-색슨 인들의 모든 나라를 통합하지는 못했지만, 잉글랜드의 첫 국왕을 앨프러드 대왕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잉글랜드 왕국이 정식으로 성립 된 것은 바로 앨프러드의 손자였던 애설스탄때였습니다. 애설스탄은 앵글로-색슨 인들이 통치하던 왕국들에 대한 전체 통제권리를 손에 넣었으며 결국 927년 “앵글로 인들의 나라”인 잉글랜드의 첫 국왕이 되었습니다. 이후 잉글랜드 왕국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됩니다.
잉글랜드의 첫 왕가는 웨식스 왕가였습니다. 이들은 바이킹과의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서 성장해나갔으며, 바이킹들의 점령 지역이었던 “데인로”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대해나가고 있었습니다. 바이킹들 역시 잉글랜드와의 투쟁을 지속해나갔는데, 특히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 지역이 점차 통합되고 왕국으로 성장하고 힘을 축적하면서, 이제 잉글랜드를 약탈의 대상으로 봤던 노르드인들이 점차 잉글랜드를 점령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1013년 이미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장악한 스베인 하랄드스손 튜구스케그는 잉글랜드 왕국을 침공합니다. 그는 이전에 돈을 받거나 약탈을 하고 물러났던 이들과 달리 잉글랜드를 장악하려했으며 결국 잉글랜드 군대를 물리치고 잉글랜드를 점령합니다. 하지만 그가 잉글랜드 국왕이 된 직후인 1014년 사망했습니다.
스베인이 죽은뒤 이전의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웨식스 왕가 출신의 애설레드 언레디가 다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그의 아들인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가 왕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스베인의 아들로 잉글랜드를 침공했던 바이킹들의 지지를 얻었던 크누트가 다시 잉글랜드를 침공했고 결국 크누트가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를 무찌르고 잉글랜드 왕위를 오르게 됩니다.
크누트는 잉글랜드 뿐만 아니라 덴마크와 노르웨이 왕위까지 얻어서 “크누트 대왕”이라고도 알려지게 되는 인물이었습니다만, 그가 죽은뒤 후계자 문제가 애매해지면서 결국 그의 두 아들들은 모두 후계자 없이 사망했으며, 잉글랜드의 왕위는 애설레드 언레디의 아들이었던 “참회왕”에드워드가 이어받게 됩니다. 하지만 에드워드에게는 후계자가 없었으며 잉글랜드에서 왕위계승문제가 발생합니다.
1066년 에드워드가 죽은뒤 잉글랜드 내에서는 당대 권력자였던 해롤드 고드윈선이 국왕으로 선출됩니다. 하지만 잉글랜드 왕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던 두 사람인 노르웨이의 국왕 하랄드 하르드라디와 노르망디 공작 기욤이 잉글랜드를 침공하게 됩니다. 해롤드 고드윈선은 노르웨이 국왕은 막나냈지만 노르망디 공작은 막아내지 못했으며 결국 기욤은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이후 “정복왕 the Conqueror” 또는 정복왕 윌리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정복왕 윌리엄 이후, 잉글랜드에서는 “정복왕 전통”이 정착합니다. 이미 스베인이나 크누트는 모두 이전의 잉글랜드 국왕과 혈연관계 없이 이전 국왕을 물리치고 왕위에 올랐었습니다. 그리고 정복왕 윌리엄도 이전 왕가와 혈연관계없이 무력을 통해서 잉글랜드를 장악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이후 잉글랜드 왕위계승문제가 발생했을 때 무력을 통해서 해결하려하거나 무력을 통해서 상대를 꺽은 이를 국왕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런 잉글랜드에서 처음으로 여성 왕위계승자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정복왕의 손녀이자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였습니다. 마틸다는 아버지의 정책에 따라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5세와 결혼했었습니다만, 자녀없이 남편을 잃었고 이후 앙주 백작과 재혼했었습니다. 그런데 마틸다의 남동생이자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자 아들이었던 윌리엄 아델린이 사고로 사망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헨리 1세는 후계자로 누이의 아들들을 고려했었으며 또 유일하게 남은 딸도 고려했었습니다. 결국 헨리 1세는 딸인 마틸다를 후계자로 선택했었습니다만, 헨리 1세가 죽은뒤 잉글랜드 왕위는 헨리 1세의 조카였던 블루아의 스티븐 (에티엔)에게 돌아갑니다. 마틸다는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군대를 일으켰으며 결국 잉글랜드는 마틸다 황후와 스티븐으로 나뉘어져서 오랜 내전 상황이 펼쳐집니다. 하지만 결국 마틸다는 왕위를 얻지 못했습니다만, 마틸다의 아들인 앙주 백작 앙리가 스티븐의 후계자로 왕위를 얻어서 잉글랜드의 헨리 2세가 됩니다.
헨리 2세는 당대 최대의 세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앙주백작령등을 물려받았으며 어머니로부터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물려받았습니다. 게다가 아내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를 통해서 아키텐 공작령등의 통치권도 인정받았기에 그의 통치기를 “앙주 제국”이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지 대부분은 프랑스에 있었으며 당연히 상위군주였던 프랑스 국왕과 마찰을 피할수 없었습니다. 이런 마찰은 헨리 2세는 물론 헨리 2세의 후손인 플랜태저넛 가문의 국왕들에게로 계속해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에드워드 3세 시기가 되면서 프랑스내 영지를 두고 프랑스 국왕과의 갈등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결국 에드워드 3세는 차라리 자신이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으며 이것은 백년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물론 백년 전쟁은 결국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으며 잉글랜드는 프랑스내 영지 거의 모두를 뺏기게 됩니다.
잉글랜드에서는 플랜태저넛 직계 마지막 국왕이었던 리처드 2세가 사촌이자 랭카스터 공작의 아들이었던 볼링블룩의 헨리에게 폐위당했으며, 헨리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가 됩니다. 이런 상황은 당연히 정당한 왕위계승자인 리처드 2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헨리 4세에게 불만을 품었던 사람들이 반란을 자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리처드 2세가 죽은뒤, 헨리 4세에 대한 명분이 더욱더 커져가면, 헨리 4세의 반대 세력들은 랭카스터 공작의 형이었던 클라렌스 공작의 후손들이 명분이 더 있다고 주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클라렌스 공작에게는 외동딸인 필리파밖에 없었으며 결국 이것은 여성 왕위계승자를 인정하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장미전쟁 당시 클라렌스 공작의 후손이었던 요크 공작과 그의 지지자들이 요크 공작의 계승권리가 당시 국왕이었던 랭카스터 가문의 헨리 6세보다 더 높다고 주장하면서 아마 이런 관념은 더욱더 강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장미전쟁의 끝무렵에는 이런 생각이 더욱더 강해졌을 것입니다. 장미전쟁의 끝을 맺은 헨리 7세는 랭카스터 가문의 분가였던 보퍼트 가문으로, 랭카스터 가문과 보퍼트 가문의 남성직계가 모두 단절된 상황에서, 그의 어머니였던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는 랭카스터 가문의 권리를 주장할수 있는 가장 높은 계승 서열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레이디 마거릿은 자신의 계승권리를 통해서 아들이 국왕에 올랐다는 정당성을 강조하려했다고도 합니다. 게다가 헨리 7세의 아내였던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남동생들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요크 가문의 계승권리를 주장할수 있는 위치였으며 결국 랭카스터 가문을 대표하는 헨리 7세가 요크 가문을 대표하는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면서 장미전쟁을 끝낸 것은 물론, 둘의 자녀를 통해서 두 가문의 계승권리가 하나로 묶여서 잉글랜드의 군주에게로 이어진다는 개념이 생겼습니다. 이런 개념은 결국 여성들이었던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나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왕위계승권리를 강조하는 것이었으며 잉글랜드 내에서 여성 왕위계승자를 더욱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수 있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개념을 바탕으로 잉글랜드에서는 16세기가 되면서 첫 여왕이 등장합니다. 바로 헨리 8세의 딸이었던 메리 1세(블러디 메리)였습니다. 이전에 마틸다 황후가 후계자로 신하들이 모두 충성을 맹세했음에도, 결국 사촌인 스티븐을 국왕으로 받아들였던것과 달리, 메리 1세가 즉위할 당시 대부분의 잉글랜드 사람들은 메리 1세가 왕위를 얻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었습니다. 비록 메리 1세가 가톨릭을 독실하게 믿었고 당시 종교개혁을 되돌리기 위해서 엄청나게 혼란을 야기시켰으며 심지어 잉글랜드에 남은 마지막 대륙의 영지였던 칼레마저 잃었었지만, 그래도 여왕을 몰아내려거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블러디 메리가 죽은뒤 왕위는 블러디 메리의 동생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에게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잉글랜드에서 엘리자베스 1세의 후계자로 헨리 8세의 누나였던 마거릿 튜더의 후손이었던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6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1603년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국왕 제임스 1세로 즉위 한뒤 스튜어트 왕가가 잉글랜드를 통치하게 됩니다. 하지만 스튜어트 왕가의 잉글랜드 통치기는 매우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잉글랜드내의 갈등은 점차 심해지고 있었으며 결국 제임스 1세의 아들이었던 찰스 1세 시기에 내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내전은 잉글랜드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내전으로 찰스 1세는 목이 잘렸으며, 왕정은 폐지되고 한동안 공화국이 되기까지 했었습니다. 물론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1660년 국왕으로 복위했고 이후 잉글랜드는 다시 왕국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전의 갈등 상황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었으며 이것은 결국 찰스 2세의 동생인 제임스 7세&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다시 불거지게 됩니다.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2세를 쫓아냈을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인 “올드프리텐더” 역시 왕위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잉글랜드에서 국왕으로 내세운 인물은 바로 제임스 2세의 딸이었던 메리였습니다. 메리는 남편인 오라녜공과 함께 왕위에 오르고 싶어했고 결국 메리와 남편인 윌리엄은 공동군주로 즉위했습니다. 메리와 윌리엄은 후손이 없었으며 왕위는 메리의 여동생이자 올드 프리텐더의 이복 누나였던 앤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잉글랜드에서는 정치적인 문제로 여성 왕위계승자를 인정했었으며 심지어 “아들”이 있었음에도 딸에게 계승권리를 주었기에 이후 여성의 왕위계승은 더욱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앤 여왕은 여러 아이를 낳았지만 살아남은 자녀가 없었으며 결국 후계자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연히 제 1순위는 앤 여왕의 남동생인 올드프리텐더였지만, 잉글랜드 내에서 올드프리텐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결국 1701년 가톨릭 교도의 잉글랜드 왕위계승 금지를 발표하면서 올드프리텐더의 왕위계승은 물거품이 됩니다. 그리고 그의 다음 순위의 수많은 후보자들 모두 왕위계승을 할수 없게 되었고 왕위 계승 권리는 제임스 1세의 외손녀이자 하노버의 선제후비였던 팔츠의 조피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아주 가까운 왕위계승자가 있었음에도 결국 이런 법률은 머나먼 친척이며 외국인이었던 조피를 왕위계승자로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법률은 또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하나의 나라로 묶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전까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같은 국왕의 통치를 받긴했지만 나라는 다른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이때 잉글랜드에서 팔츠의 조피와 그녀의 후손을 왕위계승자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스코틀랜드에서 이를 따를 것은 의문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스튜어트 가문의 발상지였으며 당연히 스튜어트 가문의 후계자인 올드프리텐더가 있는 상황에서 다른 외국인을 국왕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렇기에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하나의 국가인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을 형성했으며 이것이 바로 현재 영국의 바탕이 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1714년 6월 팔츠의 조피가 사망했고, 계승권리는 아들인 하노버의 선제후 게오르그 루드비히에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두달쯤 후인 1714년 8월 앤 여왕이 사망합니다. 아마 앤 여왕이 조피보다 일찍 사망했다면 조피가 여왕이 되었을 것입니다만, 왕위는 조피의 아들인 하노버의 선제후에게 돌아갔으며 그는 영국의 조지 1세가 됩니다.
조지 1세 이후 잉글랜드-영국은 하노버 가문이 통치합니다. 조지 1세는 영국내 정치 상황 때문에 자신이 왕위에 오른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영국의 정치 상황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는 외국인이었으며 영국인들이 올드프리텐더를 원치 않았기에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노버의 선제후로 하노버에서는 절대 군주였지만, 영국에서는 입헌군주로 의회의 정책을 대부분 따랐으며, 외교정책을 제외한 영국 내부정책에는 관여하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성향은 조지 1세의 후손들인 하노버 왕가의 국왕들에게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조지 3세는 아내에 충실한 남편이었으며 아내와의 사이에서 열다섯명의 자녀를 얻었습니다. 그중 아들만 아홉명이었고 성인으로 성장한 아들이 일곱명이었기에 영국의 왕위계승자에 대해서는 걱정이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조지 3세의 아들들은 신분에 맞는 여성과 결혼해서 후계자를 얻어야하는 의무를 하나같이 무시했으며 그 결과 손자 손녀들은 겨우 10명(그중 두명은 계승권리를 인정받지 못함)밖에 없었습니다. 1820년 조지 3세가 죽었을 때, 왕위계승 서열은 아들들과 그 후손들만 봤을때 웨일스공 조지-요크공작 프레드릭-클라렌스 공작 윌리엄-켄트의 빅토리아(켄트 공작 에드워드의 딸)-컴벌랜드 공작 어니스트 아우구스투스- 컴벌랜드의 조지-서식스 공작 아우구스투스-캠브리지 공작 아돌푸스-캠브리지 조지 였습니다. 그리고 1830년 조지 4세가 죽었을 때 왕위계승 서열은 클라렌스 공작 윌리엄-켄트의 빅토리아- 컴벌랜드 공작 어니스트 아우구스트-컴벌랜드의 조지-서식스 공작 아우구스투스-캠브리지 공작 아돌푸스-캠브리지의 조지- 캠브리지의 아우구스타-캠브리지의 메리 아델라이드 였습니다.
1837년 윌리엄 4세가 사망했을 때 제 1왕위계승자는 윌리엄 4세의 동생 켄트 공작 에드워드의 외동딸이었던 빅토리아 였습니다. 세명의 숙부와 사촌 오빠와 사촌 남동생이 있었지만 빅토리아가 영국의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하노버 왕국의 경우는 살리카법을 따르기에 빅토리아가 아닌 숙부였던 컴벌랜드 공작 어니스트 아우구스투스를 국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사촌이었던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와 결혼했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었습니다. 여왕의 결혼 생활과 가정 생활은 당대 모범이었으며 일명 “빅토리아 시대”의 표본적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은 유럽의 여러 왕가 사람들과 결혼했고 이 때문에 20세기초가 되었을 때 여왕의 수많은 후손들이 유럽 왕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세계 제 1차 대전에서 수많은 영국 왕가의 친척들이 서로를 향해 싸우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였던 조지 5세와 아내인 메리 왕비는 아들들이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어야하는 상황을 무시하는 것에 화가났었습니다. 특히 장남인 웨일스 공인 “데이비드”는 결혼하지 않고 정부들과 다른 여성들과 즐거운 삶을 살았으며, 왕위계승자로 후계자를 얻어야하는 의무를 무시하는것에 화가 났을 것입니다. 아마 착실히 부모 말을 듣고 결혼을 했던 딸 메리와 둘째 아들인 요크의 공작 앨버트를 좋아했었으며, 특히 앨버트의 딸이자 첫 번째 친손녀였던 엘리자베트(릴리벳)을 매우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마음에 안드는 장남이 결혼하지 않고 자녀도 없이 살아서 사랑하는 릴리벳이 왕위에 오르길 바란다고 말할정도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지 5세의 말은 실현이 됩니다. 조지 5세가 죽은뒤 장남인 에드워드는 에드워드 8세로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 번 이혼한 여성인 심슨부인과의 결혼을 원했었습니다. 이 상황은 당시에는 받아들일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당시에는 이혼녀는 궁정에 출입할수도 없었으며 특히 영국의 국왕은 국교회 수장이었는데, 국교회 수장이 이혼한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용납할수 없었습니다. 당대 대부분의 영국 내각 관료들과 국민들은 이를 받아들일수 없었는데, 에드워드 8세는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을 위해서 왕위를 포기했으며 결국 왕위는 동생인 요크 공작 앨버트에게 갔으며, 앨버트는 영국의 조지 6세로 즉위했습니다. 그리고 조지 6세의 장녀였던 엘리자베스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뒤를 이을 왕위계승자로 성장했으며 1952년 아버지 조지 6세가 죽은뒤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 즉위했으며 이후 여왕은 70년간 영국의 국왕이었습니다.
이렇게 잉글랜드-영국 왕국에서 여성들이 왕위계승자로 군주가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사진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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