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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May 10. 2024

들어가면서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첫번째

어느 지역 어느 나라건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여성이 군주가 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경우입니다. 특히 유럽 대륙, 제국의 영향을 받던 지역은 대부분 여성의 영지와 그에 따른 지위 상속을 금지시켰습니다. 이런 여성의 영지 상속 금지법을 일반적으로 “살리카법”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프랑크 족의 법전인 살릭 법전에서 여성의 영지 상속 금지를 이야기했고 이후 주로 여성의 상속 금지를 이야기할 때 이 법률을 근거로 들었기에 아예 여성의 영지 상속을 금지하는 법을 살리카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마 여성의 영지 상속 금지를 행한 가장 큰 이유는 여성이 다른 가문으로 시집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영지를 뺏길 가능성이 커서였을 것입니다.      


사실 오래도록 영지 상속에 대한 법률은 딱히 정해진 법률에 통제를 받는 것이아니었습니다. 유럽의 경우 영지는 결국 각각 세력의 통치 단위였고 이런 영지 상속에 대한 문제는 자연스럽게 정치적 목적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여성 상속인을 인정하거나,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해서 여성의 남성후손들에게 넘기기도 했으며 여성 상속인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럽 대륙의 상당부분은 여성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특히 제국에서는 모든 영주가 황제의 봉신으로 황제가 여성 상속을 인정하지 않고 봉토를 뺏는 것은 법적으로 정당한 일이었기에 황제가 봉신들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서 살리카법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황제 역시 자신의 편에 대해서는 여성 상속에 대해서 너그럽거나 심지어 황제 자신이 딸밖에 없을 경우 사위를 얻어서 권리를 이어받도록 하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이때 딸이 영지를 상속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위가 이어받는 것은 결국 딸에게 물려주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합스부르크의 알브레히트 2세, 로만왕, 황제 지기스문트의 사위


하지만 황제의 통치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사정이 좀 달랐습니다. 특히 메로빙거 가문이나 카롤링거 가문이 유럽 전역을 통치했을때도 독립적이었던 지역인 브리튼 섬이나 이베리아 반도 지역 그리고 북유럽 지역 같은 곳은 전혀 다른 전통이 세워집니다. 물론 이들나라에서도 여성이 지위를 이어받는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성이 계승해야될 때 이들은 이를 인정하게 되는데, 이들 지역에서는 정치적 문제로 여성의 권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전통으로 남아서 결국 여성의 상속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여성의 왕위 상속을 인정하게 된 것은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모드) 황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헨리 1세는 적자 아들이 죽은뒤 유일한 적자 딸이었던 마틸다를 상속자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헨리 1세가 죽은뒤 잉글랜드에서는 마틸다가 아닌 헨리 1세의 누나의 아들이었던 스티븐을 국왕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인정하지 못한 마틸다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잉글랜드 왕위를 얻기 위해서 스티븐과 전쟁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마 이 상황은 이후 잉글랜드에서 여성 왕위계승자를 좀 더 쉽게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마틸다는 잉글랜드의 여왕이 되지 못했으며 결국 아들인 헨리 2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헨리 2세는 물론 스티븐 역시 어머니를 통해서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했었으며, 잉글랜드에서 이를 인정했기에 이후 여성의 왕위계승권리를 더욱더 자연스럽게 주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틸다 황후, 헨리 1세의 딸, 헨리 2세의 어머니


하지만 사실 잉글랜드에서 여성의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하는데 익숙해진 것은 바로 장미전쟁 이후였습니다. 요크 가문은 랭카스터 가문의 계승 권리보다 자신들의 계승 권리가 더 높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자 랭카스터 공작의 형이었던 클라렌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동딸인 필리파의 후손임을 강조했고 이것은 잉글랜드 내에서 더욱더 여성의 왕위계승권리를 더욱더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헨리 7세의 어머니인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역시 랭카스터 가문 직계와 보퍼트 가문 남성 직계가 단절된뒤 자신이 랭카스터 가문의 가장 높은 왕위계승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스스로 “레지나(여왕)”이 될 자격이 있고 이 때문에 아들인 헨리 7세가 왕위에 오른 것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것은 아마 요크 가문의 주장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할 듯합니다.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헨리 7세의 어머니


결국 튜더 가문에 이르러서 잉글랜드의 첫 여왕이 탄생합니다. 바로 헨리 8세의 딸이었던 메리 여왕이었습니다. 당대에는 메리가 여왕이 되는 것을 매우 자연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헨리 8세는 죽으면서 왕위계승 순위를 정해놨고, 아들인 에드워드 6세 다음으로 딸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왕위계승을 하도록 정해놨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는 아들없이 사망했으며 결국 헨리 8세의 유언에 따라 딸인 메리가 여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메리 역시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그 뒤를 엘리자베스가 잇게 됩니다. 


헨리 8세와 자녀들인 에드워드 6세, 블러디 메리와 남편 펠리페 2세,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


이렇게 두명의 여왕이 생겨난 뒤 잉글랜드에서는 이제 여왕을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없었으며 여성의 왕위계승권은 더욱더 확고해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엘리자베스 1세가 후게자 없이 사망하자, 그 다음 국왕으로는 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튜더의 후손인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6세를 국왕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스코틀랜드의 왕가였던 스튜어트 가문은 제임스 6세 시절 잉글랜드의 국왕도 겸하게 됩니다. 스튜어트 가문의 통치기이후 잉글랜드에서는 여왕을 더욱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데, 특히 정치적 문제로 스튜어트 가문의 국왕들과 잉글랜드 신하들이 갈등을 빚었고 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7세&2세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그를 거부하고 딸인 메리를 여왕으로 맞아들이기까지 했습니다. 아마 이후 잉글랜드에서는 여왕이 즉위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졌으며 심지어 살리카 법을 따르는 하노버 가문이 잉글랜드를 통치했어도 잉글랜드에서 이런 성향은 변하지 않고 여성인 빅토리아가 숙부들을 제치고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반면 에스파냐의 경우 여성 왕위 권리를 오래도록 인정했었지만, 살리카 법을 따르는 부르봉 가문이 왕위를 얻은뒤 여성 계승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법률을 통과시켰으며 이 때문에 19세기에는 결국 내전이 일어나기까지 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그래서 이번에는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계승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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