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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Oct 18. 2020

《문명과 혐오》

태초에 혐오가 있었다.

《문명과 혐오》, 데릭 젠슨 지음, 아고라, 2020


내년 초면 내게는 또 한 명의 조카가 생긴다. 여태 이모의 삶을 살다 이제 고모의 삶도 살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조카가 태어날 거란 소식을 들었을 때, 아 내가 무슨 복을 타고나서 이모도 될 수 있고 고모도 될 수 있나, 감동했다. 새 조카를 맞이할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이 작은 아가가 태어나서 목을 가누지 못할 때부터 나는 지켜보겠지. 다른 조카들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성장과정 하나하나 눈이 부시게 바라볼 것이다. 목을 가누지 못하던 아이를 품에 재우면 폭 안겨들고 내게 기대겠지. 아, 그때는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그리고 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랄 것이고, 뒤집을 것이고, 길 것이고, 걸을 것이고, 언젠가는 고모, 하고 부르게 될 것이다. 매 순간 나는 얼마나 사랑이 커져갈까. 아가의 손과 발을 보는 것은 기쁨일 것이고, 매일 커지는 사랑 때문에 하루하루가 축복에 가깝다 느껴질 것이다.


그러다가도 불쑥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조카에 대해 미안해진다. 나는 이만큼의 인생을 살아왔고, 그리고 지금 이 세상을 만났다. 그러나 이 아가는 태어나자마자 코로나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엄마, 우리 조카 어떡해, 태어나자마자 코로나 세상이야, 어떡해. 그 생각만 하면 너무 슬프고 아프다. 갓 태어난 아가는 마스크를 착용할 수 없을 것이고, 마스크를 착용할 수 없으니 밖에 나가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가 언제 끝날까. 아가가 자라면서 바깥에 자유롭게 나가게 되었을 때, 그때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되어있을까?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조카에게, 어른들이 잘못했어, 어른들이 미안해,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태어나자마자 이런 세상이라서 정말 미안해,라고 자꾸 말한다. 지금 초등학생인 조카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도 너무 가슴이 아픈데, 태어나자마자 코로나 세상일 조카를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서 어쩌지를 못하겠다. 미안해 아가야, 잘못했어 조카야. 어른들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자연을 너무 많이 파괴했어. 어른들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깊숙이 들어갔어. 그러면 안되는 거였는데 너무 많은 것들을 건드려놔서, 그래서 이런 세상이 되었어. 나는 보이지 않는 곳의 혐오에 익숙해져 있었고, 보이지 않는다고 외면하면서 세상이 이렇게 되는 것을 방치했다. 내가 직접 숲으로 들어가 자연을 파괴하자고 도끼 들고 나무를 벌목하는 행위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런 행위를 대대적으로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침묵으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감으로써, 동조했다. 나는 혐오자였다. 이 책에서 데릭 젠슨이 일컬은 것처럼, 에코 사이드의 조력자였다. 조카가 태어날 세상을 코로나 세상으로 만든 건 나였다. 내가 회사를 다니고 돈을 벌고 먹고 싶은 걸 사 먹고 입고 싶은 옷을 사 입는 그 모든 행위,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 모든 행위는, 환경을 파괴하고 있었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었다. 혐오로 도배된 문명 속에 나는 구성원이었다. 조카에게 어른들이 미안하다고 할 때는 나 자신을 포함해야 했다. 저기 저 먼데에서 다른 어른들이 그랬다고 말할 수 없었다.



조카는 자라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었다. 부모를 비롯한 가족과 친척들, 어린이집과 유치원과 학교를 거쳐가며 친구와 선생님들을 만날 것이었다. 직장에 가면 동료들을 만날 것이고. 그 시간들 속에 언제나 텔레비전도 있을 것이고, 설사 조카가 직접적으로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환경을 만든다 해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조카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대중매체를 소비하는 대중일 테니까.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혐오를 만날 것이다. 외모를 비하하는 광경을 수도 없이 맞닥뜨릴 것이고, 강요된 미모에 억압받을 것이다. 여성차별에 대해서도 인지하게 될 것이고 세상에 인종차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먹는 것이 동물을 죽이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설사 조카가 그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고 하면,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은 잘못되었다고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성차별은 안되는 거야, 인종차별은 안 되는 거야를 나는 조카에게 말해줄 것이다. 봐라, 네가 보고 있는 저 뉴스들은 성차별 혹은 인종차별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세상은 그런 혐오들이 존재한단다, 우리는 혐오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해, 인간은 평등하단다, 피부색이 무엇이든 성별이 무엇이든 태어날 때의 모습으로 차별해서는 안되는 거야, 를 나는 조카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데릭 젠슨이 말한 것처럼, 고개를 돌리면 외면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까지 내가 알려줄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노예제와 수많은 인종학살이 벌어진 전쟁들에 대해서, 그 안에서 무수히 죽어나간 사람들의 숫자를, 그 기록을, 데릭 젠슨은 보기 싫으면 그저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외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숫자들을 봐가면서, 태초부터 이 문명은 혐오로 세워졌어, 하는 것을 내가 조카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아니, 조카에게 알려주는 게 다 무어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그 숫자를 찾아볼 생각도 않았는데. 인종차별도 저기 다른 나라의 일이라고 생각했는걸. 눈 앞의 혐오만 알려주기도 벅찬데 보이지 않는 혐오까지 내가 알려줄 수 있을까. 거리가 멀어서 보이지 않는 혐오들을, 그러니까 내가 입고 있는 옷들이 어디서 왔는지, 음식들이 어디서 왔는지까지, 그 구체적인 모습들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양심의 가책 없이 입고 쓰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인지하고 알려주는 일을 내가 할 수 있을까. 또한, 조카에게 알려주는 게 아니라도, 그건 네가 자라면서 알아서 보고, 보는 만큼 알아서 공부하고 행동하렴, 하더라도, 나는? 지금 이 자본주의와 민주화(정말?) 시대를 살고 있는 나는, 이제 이것들을 그간 내가 모르고 살았다고 해서 이제부터 알면서 무언가 행동하게 될 것인가. 나는 그러기에 돈 버는 것을, 돈을, 다른 사람들의 노동력을 마구 사용하는데 익숙해져 있지 않나.


내가 하는 일, 먹고사는 일에 대해 나도 종종 생각했다.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해 통장에 노동에 대한 대가가 들어오는 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고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내가 돈을 벌지 않으면 내가 먹고사는 것이 불가능해지니까.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어딘가에 소속되어 돈을 버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나에게는 꿈꾸는 소박한 미래가 있고, 그 미래에는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대단치 않은 일인데, 거주할 집이 필요하고 먹을 음식이 필요하고 읽을 책이 필요한데, 그것에는 돈이 든다. 돈을 쓰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니 나는 돈 버는 일을 멈출 수 없을 것인데, 그런 한편 내가 하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나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언젠가 친구에게도 말한 것처럼, 내가 하는 일은 사회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아, 나를 위한 일도 아닌 것 같아, 한 거다. 이 일을 함으로써 내가 사회에 혹은 지구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이 일이 과연 필요한 일인가에 대해서도 수시로 의문을 갖는다. 내게는 돈이 필요하니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찾아 세계를 한 바퀴 돌겠다, 같은 것을 나는 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이 조직에 몸담고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일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나.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은 어떤가? 그 일들은 필요한 일인가? 필요하다면 어디에 필요한 일인가? 필요하다는 것의 그 필요는 누구에게 그렇단 말인가? 데릭 젠슨은 이 책에서 '우리가 하는 일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실제적으로 쓸모 있는 일인가(p.512)' 의문을 갖는데, 그렇다면,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이런 것에 대해 고민하고 산다는 것인가. 이럴 때 구체성에 눈을 돌려야 하나. 건너고 건너면 나 역시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일로부터 돈을 벌고 있는 게 아닌가.


데릭 젠슨은 백인 남자이며 교육받은 중산층이다. 그런 그는 제노사이드와 에코사이드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한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고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입장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환경과 노예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인상 깊지만, 그가 포르노를 보고 그의 달라진 인식에 대해 고백하는 부분도 놀라웠다. 포르노를 보기 전에 그는 여자들을 볼 때 어떻게 말을 걸까를 생각했다면, 포르노를 보고 난 후의 그는 여자들을 보면 그 여자의 신체 일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어서 빨리 자신이 대화를 원하던 그 상태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그는 포르노에서 여자들이 조각조각 신체로 보이는 것, 그러니까 한 명의 여자 사람으로 인식되기보다, 성적 대상화되는 추상화라는 것을 인지한다. 저 멀리에서 벌어지는 일들, 직접적으로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일들, 과거에 일어났던 인종들의 대학살, 땅을 빼앗는 것, 추방하는 것, 그리고 지금도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해서, 그러나 우리가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는 것은 그것의 구체성, 그 사람들의 구체성을 보기보다는 그 모든 '사람'들을, '자연'들을 추상화시키기 때문이라고.


결론은 당연히 우리가 추상성을 벗어나 구체성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흑인이 아니라, 포르노 속의 여체가 아니라, 소모할 자원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하나하나 생명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인지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지금과 같은 혐오를, 멸시를, 파괴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는 거다. 이 얼마나 구체적인 해결방법인가. 구체성을 자각하자는 것은, 구체적 해결방법인 것이다.



현상과 숫자에 대한 부분을 읽다가 '아니, 왜 그래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라치면, 어김없이 내가 가진 의문도 같이 표현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지구 절반에 있는 408개 도시를 태워버릴 수 있는 잠수함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 읽다가, 아니, 도대체 408개 도시를 태울만한 잠수함이 왜 필요한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바로 다음에 "감히 그런 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왜 그런 것을 가지려고 할까요?" (p.506)가 나오는 식이다. 질문과 답이 모두 들어있는 책인데, 그것이 결코 불친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세상을, 지구를 망치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러나 구하려고 하는 것도 인간이라고 생각해왔다. 인간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그저 관료주의에 충실해 자기 몫의 일을 하면서 혐오와 파괴에 한몫하고 있다면, 그것이 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지르고 있는 일이라고 일깨워주는 사람도 이렇게 어딘가에 있다. 읽고 알고 보는 것이 바로 어떤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는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 것이다.


부디 조카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이 조금이라도 혐오로부터 멀어져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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