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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Oct 17. 2020

《포르노에 도전한다》

only words

《포르노에 도전한다》, 캐서린 A. 맥키넌 지음, 개마고원, 1997


며칠 전에 친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일상적 대화에서는 혐오표현임에 분명한 대화들이  섹스 중에 오고 간다면, 그것은 그저 연인들 사이의 더티 토크가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일상에서의 혐오표현이 침대에서는 혐오가  아닌 것이 되는 걸까. 혹은 혐오임에는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 내밀한 관계에서 서로에게 그것을 말하기를 허락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혐오인데 참고 있는 것일까, 분위기 깨기 싫어서?


나는 섹스 중에 사실 그다지 어떤 험한  대화를 해본 경험이 없다. 그래서 혐오 표현이라고 하면 섹스 중에 어떤 게 오고 갈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것이 혐오인가 아닌가,  혐오이나 허용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바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내게서 나오는 답이 진리일 수도 참일 수도 없겠지만, 친구가  묻는 말에 선뜻 답할 수 없었다는 거다. 그러나, 행위에 대해서라면 내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



행위에  대해서라면 나는 요즘 매우 생각이 많았다. 요즘 포르노에 대해, 음란 영상물에 대해 무척 많이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이건 계속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는데, 시작은 DSO 계정의 음란물 신고 트윗 덕분이었다. 다른 SNS를 잘하지 않아서 모르지만,  트윗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음란물들이 아주 많이 올라온다. 아예 성을 매매하는 계정에서부터 오프라인에서 만나 섹스를 하자는  계정까지 수두룩하고, 지인들의 사진으로 음란사진에 합성해주겠다는 것, 그리고 성관계 영상까지. 신고를 하면서 알게 됐는데, 거기에  올라오는 성관계 영상은 소위 내가 알아온, 내가 경험해온 성관계 영상이 아니었다. 가학적인 건 물론이고 불쾌함을 넘어 폭력적이고  수치스러웠으며 혐오스러웠다.



나는 살면서 포르노 영화를 본 적이 거의 없다.  이는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감정 없는 육체관계에 대해 통 흥미를 느낄 수 없는 게 아닌가, 해서도 그렇고 포르노를 어디서  어떻게 봐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십 대 초반에 [터보레이터]를 본 게 전부라 할 수 있는데, 터보레이터의 영상 속 내용도 매우  충격적이었다. 터미네이터를 본떠 만들었으나, 내용은 확 뒤집어져서, 미래에서 여자를 강간하기 위해 온 거다. 그런데 영상 속  여자들이 매우 특이했던 게, 처음엔 강간하러 온 남자들을 보고 놀라지만, 이내 강간을 즐기고 헤어지면서는 다시 오기를 바란다는  거다. 이것이 강간 판타지라는 것인가.



강간은 다른 사람의 몸에 성적으로 침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강간은 내가 허락하지 않았으나 내 몸에 억지로 밀고 들어옴을 의미한다. 나는 이것에 대해서라면 사람이 몇 살이든,  성별이 무엇이든, 본능적으로 싫어할 것이며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게 '어떤 여자들은 강간 판타지가 있다'는 말은  매우 갸웃한 것이었다. 그래, 다른 사람의 판타지에 대해서 내가 뭐라 할 순 없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왜, 어째서 강간  판타지를? 그리고 내게 '나는 강간 판타지가 있어'라고 말한 여자는 한 명도 없었던 반면, '강간 판타지 있는 여자들이 있다'라고  말하는 건 왜 모두 남자였을까. 여자들은 스스로 강간 판타지가 있다는 것을 남자가 아니면 말하기 두려워서였을까.


나는  최근 DSO 계정에서 같이 신고해달라고 음란 계정들을 올리면 그것을 부지런히 신고하고 있다. SNS 특성상 성인 인증 없이도  가입이 가능하고 거기엔 초등학생도 그리고 고등학생도 모두 가입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영상들을 맞닥뜨릴 수  있다. 내가 본 영상들은 무척 충격적이었고 그걸 보면 성인의 영혼도 온전치 못할 것 같았다. 멘탈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걸  보고 있을 순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무엇보다 미성년자들이 이런 식으로 성인 남녀의 나체를 보는 것도, 그리고 성관계를 알게 되는  것도 끔찍하게 싫어서(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성인 남자의 고추를 보게 됐고, 그것을 폭력으로 이해하고 있다), 부지런히 신고를  하고 있다. 신고를 해도 박멸할 순 없고 계속 생겨나지만 그래도 끝까지 따라가 신고해주겠다는 마음으로 신고하고 있다.


신고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몇 개의 영상쯤은 보게 된다. 동물들과 관계하는 변태적인 성행위도 거기에 있었지만, 나는 거기서 여자를 피멍 들게  때리는 영상들을 보았고, 여자 얼굴에 정액을 쏟아붓는 것도 보았다. 아주 많은 영상들은 여자들이 남자들의 고추를 물고 있었다(더러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침을 뱉거나 오줌을 싸거나 하는 것들도 있었고, 입 안에 정액을 쏟아붓는 것도 있었다. 더 쓰는 건 이  페이퍼 자체를 음란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그만하겠지만, 나는 그걸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영상 속에서 여자들이 설사 즐기는 것  같은 표정과 신음소리를 보인다 해도, 내게 그것은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그 모든 행위들에 있어서 나는 너무 소름 끼치고 수치스러워서  '여자들아 그런 거 하지 마' 하고 간절한 마음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끔찍하게 여기는 나는, 그 영상들의 모든  행동들에 있어서 백 프로 자유로운가?



아니었다. 나도 그 안에 어떤 행위들이 내  것이었던 적들이 분명히 있었다. 어떤 것들은 상대가 좋아하기 때문에 억지로 참기도 했고, 어떤 것들은 그렇게 참을 필요 없이  가능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좋아하기도 했다. 나는 분명 저 영상들을 보며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외부에서 봤을 때  그것은 분명한 폭력이었다. 애당초 그들의 자세 자체가 달랐으니까. 그렇다면 외부에서 보기에 폭력이지만, 그것이 당사자가 되었을  때는 폭력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외부에서 보면 폭력인 것이 내 것이 되는 순간 괜찮아지는 것이 되는 것일까? 외부에서 봤을 때  폭력이지만 우리 둘 사랑하는 사이, 연인 사이에서는 허용되는 것이야, 너 좋고 나 좋고 우리 둘 다 좋으니 이것은 섹스야, 가 되는  것일까? 나는 내가 어느 순간 그것들 중 일부를 즐겼다는 사실을 놓고 보았을 때, 내 허용치는 그만큼이지만 저들 혹은 다른 이들은  나보다 허용치가 더 넓다고 판단하면 그뿐인 걸까.



우선 나는 그 영상들을 보고  매우 끔찍하다고 생각했고 아프다고 생각했다. 이런 걸 찍고 그리고 즐겨 보는 사람들의 영혼이 건강할 리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  영상이, 남자와 여자가 어떤 식으로든 성관계를 맺고 있는 영상이, 내게는 분명 끔찍하게 느껴졌다. 정말 싫다, 는 감정을 갖게  했다. 이런 영상 싫다, 이런 행위가 싫다, 는 생각을 갖게 한 거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는 다른 성에게는 이것이 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안다. 그 지점에서 나는 심한 괴리감을 느꼈다. 같은 영상을 보고 어느 한쪽은 아 싫어, 괴로워,  고통스러워를 느끼는데 어느 한쪽은 네 얼굴로 내 정액을 받아줬으면 해, 같은 욕망을 느낀다는 게, 따라 하고 싶어 한다는 게  정말이지 처절하리만큼 괴로웠다. 이걸, 이 다름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왜 그럴까. 이게 어째서 가능할까, 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여자들은 이 영상이 끔찍하고 남자들은 영상 속의 남자처럼 하고 싶은 건 왜 그럴까.

그건  아마도 굴복하고, 무릎 꿇고, 더러운 걸 몸에 받는 쪽이 여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남자들은 힘을 쓰고, 핥는 걸 느끼고, 배설하는  쪽이고. 남자들이 영상 속에서 고통스러워할 이유는 없었다. 고통스러운 말과 행동이 남자들에게는 없었다. 고통스럽지 않으면서 쾌락과  배설이 따라온다면, 게다가 자신의 힘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들에게 이 영상은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왜 여자인  나는 고통스럽고 왜 남자인 너는 흥분하는가.



당신이 받은 폭력은 그 남자에게 흥분이고, 당신이 받은 고문은 그 남자에게는 쾌감이다. 당신을 보는 것은 이제 그 남자에게는 마스터베이션 거리가 된다. (p.24)



다시 강간 판타지 얘기로 돌아가면,

나는 강간 판타지를 가진 어떤 여자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처음부터 본인의 판타지였을까?

그러니까  만약 세상에 포르노가 없었다면, 강간하는 영상들이 없었다면, 그걸 찍고 보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  없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저 스스로 '내 몸이 침범당하길 원해'라고 생각하게 됐을까?

섹스도 마찬가지다. 내가 했던 섹스들도, 내가 '내 의지'라고 생각했던 것들, 혹은 '나는 이건 별로지만 네가 좋아하니까' 참았던 것들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이 아닌' 것이 될까.

나는  우리에게 포르노가 준 수치가, 포르노가 공급한 폭력이 내재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이러는 게 섹스에서는  응당 당연하다는 것이, 이것이 은밀한 관계가 가진 '특권'이라는 것이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차곡차곡 쌓여버린 거란 생각을  하게 된 거다. 만약 내가 그런 영상들에 노출되지 않았다면, 그런 영상을 찍고 보는 남자들이 없었다면, 그렇다면 내 섹스들을 돌이켜  보았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었을 것들은 과연 몇 개나 될까. 게다가 상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사실 나는 어떤  부분에서는 수치스럽지 않았나. 수치스러움을 참지 않았나. 어떤 요구들에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하는 마음에 '싫어, 그건  하지 마'라고 요구할 순 있었지만, 그러나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이 정도까지는 그래도 할 수 있지'로 폭력을 내재화하지  않았나. 포르노를 보고 남자들은 폭력을 자신의 것처럼 만들고, 여자들 역시 그것을 자기 안에 쌓아버린 것 같다. 나는 포르노를  보지 않는 사람이고 아마 대부분의 여자들이 포르노 보기를 꺼려할 것이다. 물론, 보는 여자들도 있을 것이고. 그러나 포르노를 보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이라도 '남자들은 이런 걸 좋아하지' 정도를 어느 틈에 알고 있잖아. '남자들은 이런 걸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는 채로 시작하는 섹스가, 과연 평등한 관계에서 오는 섹스일까?

섹스에서, 네가 날 사랑하고 나도 널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평등한가? 평등했나?

단순히 어떤 자세를 취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시작과 끝의 순간들에, 나는 폭력을 내재화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보면 '그러지 마' 하게 되는 것들을 나는 하고 있었나. '내가' 하면 괜찮은 게 되는 건가.

나는 수치스럽지 않았나.


당신은 살아남기 위해 수치심을 배우며 이 수치심을 성적 허세로 가리는 법을 익힌다. (p.28)


이  책 《포르노에 도전한다》의 원제는 《only words》이다. '단지 말'이라는 제목인 건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이 얼마나  적절한 가져옴인지, 그러니까 국내에서 '포르노에 도전한다'는 제목을 이끌어올 이 책이 왜 '단지 말'이란 제목을 갖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어휴, 따먹고 싶게 생겼네'라는 말을 내가 들었을 때, 그는  나를 '아직' '따먹지'는 않았으나, 그런 욕망을 가짐을 표현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불쾌하며, 언제든지 저  남자가 그 말을 실행하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저 표현'인 건가? 그저 말만 한 건데 뭐 어때, 하며 웃을 수  있는가? 저 '말' 자체에 성적 희롱이 담겨있다. 그것이 그저 말뿐인가.

맥키넌은 이 책 only words를 통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바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백인  전용'이라는 간판은 '유대인 사절'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차별행위로 간주된다. 인종 격리는 "나가!" "당신은 여기 못  들어오게 되어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일어날 수가 없다. 상대를 높이는 것이나 깎아내리는 것이나 모두 의미 있는 기호나  의사 전달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바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다. (p.36)



인종적으로도  성적으로도 평등하지 못한 세상에서, '평등'은 '단지 말'에 불과하고, 그러나 차별적 '표현'은 그저 말뿐인 게 아니다. 그것은  행위에 다름 아니다. 폭력적 말은 폭력적 행위다. 포르노에서 강간이 벌어지고 정액을 쏟아낼 때, 그 안에는 강간을 당하고 정액을  받고 있는 행위가 있다. 포르노를 '표현의 자유'로 변명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포르노 안의 행위들은 게다가 실생활에서도  행위로 이어진다. 그게 맥키넌이 '반포르노'를 주장하는 이유이고, 내가 그녀의 책을 읽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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