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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Oct 15. 2020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한 걸음 멀어지기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멜라니 조이 지음, 모멘토, 2011

주말에 치킨을 시켜두고 와인을 마시면서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볼 게 없었다. 엄마는 '네가 좋아하는  세계여행 프로그램이나 보자'라고 했고, 나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 대신 <세계견문록 아틀라스>를 선택했다.  먹는 거 보고 싶은데 뭐 있을까 고르다 보니 '국가비'가 '페루 맛 기행'을 했단다. 사실 이거 예전에 한 번 본 건데, 그래도 이거  보자 엄마, 하고는 페루 맛 기행을 틀어두었다. 국가비는 셰프이고 요리를 좋아하고 먹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페루의 전통  음식점에 들러 페루 사람들이 권하는 음식을 먹는다. 총 3부작이었는데 엄마와 내가 처음으로 본 건 3부였고, 거기에서는 아주  통통한 애벌레를 먹는 장면이 나왔다. 꿈틀꿈틀 살아있는 애벌레를 기름을 두른 팬에 튀기는 거였다. 


이 장면의 모든 게 끔찍했다. 커다란 애벌레도 싫고,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도 싫고, 그걸 뜨거운 기름에 넣고 튀기다니, 애벌레한테 대체 왜 이러는가 싶었다. 엄마랑 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끔찍하다고 했다.


으앗, 끔찍해, 저런 것까지 먹으면서 살아야 해?라고 투덜거리는 내 앞에는 치킨이 놓여있었다.


그  회차를 마치고 선택한 2부였는지 1부였는지에서는, 하아, 기니피그를 구워 먹는 게 나왔다. 기니피그를 통째로 구워서 기니피그  형태가 그대로 있었다. 마치 생쥐 같기도 하고 토끼 같기도 한 기니피그를, 페루 사람들은 길렀다가 먹는다고 했다. 먹기 위해 기르는  거였다. 아니, 자기가 길러놓고 어떻게 그걸 구워 먹을 수가 있어. 통째로 구워진 기니피그를 앞에 두고 국가비는 좀 망설였지만,  이내 고기 냄새도 나지 않고 먹을만하다고 했다.


엄마, 저렇게 통째로 그 모양이 그대로 보이는 걸 대체 어떻게 먹어. 그렇지만 또 먹다 보면 고기 맛있다 할지도 모르지..


라고  말하는 내 앞에는 치킨이 놓여있었다. 닭을 튀긴 거였다. 닭을 죽이고 털을 뽑아 뜨거운 기름에 넣고 튀긴 치킨. 나는 닭을 죽여  만든 치킨을 먹으면서 저기 저 나라의 기니피그를, 애벌레를 먹는 게 끔찍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술안주로 치킨을 먹고 있었던  거다. 


페루의 시장에서는 소의 혀를, 불알을, 심장을 팔고 있었다. 이야, 인간들 진짜 별 걸 다 먹는다, 하면서, 나는 치킨을 먹고 있었다.


나는 뭐야?

나는 도대체 뭐야?

내가 어떻게 감히, 애벌레를 먹는 게 끔찍하다고 말할 수 있어? 기니피그를 먹는 게 끔찍하다고 말하는 게 나한테 가당키나 해? 닭튀김을 먹고 있으면서?

나는 뭐야?


'멜라니 조이'는 닭튀김을 먹으면서 기니피그 먹는 걸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인식'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가 쇠고기와 개고기에 대해 이처럼 완연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바로 '인식(perception)'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종류의 고기에 대해  상이한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그것들 간에 실질적인 차이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달리 인식하기 때문이다. (p.13)


이  책을 사둔 지 오래였는데 읽기를 주저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책도 역시 사둔 지 오래인데 저 멀리 밀쳐두다가 중고로 내놨다.  육식의 성정치를 읽고 싶은 마음 그만큼 읽기 싫은 마음이 있어서 아직 사지도 않았다. 그렇다. 나는 이것들의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다.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제대로'알기 싫었다. 아는 것은 고통이고, 알게 된 후에 그 고통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알아, 아는데,  알아서 알기 싫어'라는 마음이 있었던 거다.


이 책의 저자는 놀랍게도 이런 나의 마음까지도  간파했다. 짐작하지만 알기 싫지, 그러니 고기를 먹어도 되는 이유들에 대해 합리화하고만 싶지, 하고 자꾸 나를 쿡쿡 찌른다. 이  책에서만큼은 그렇게 찌를 때마다 어김없이 아팠고, 여기저기 찔리고 말았다. 기니피그를 어떻게 먹냐고 야유하면서 나는 닭을 뜯고  있었다. 그뿐인가, 며칠 전에는 양꼬치도 먹었는걸. 양도 먹고 닭도 먹고 돼지와 소 먹기를 사랑하면서, 그런데 왜 기니피그는  안된다고 하는가. 기니피그를 먹는다면 '덜 도덕적'인가. 나는 기니피그랑 애벌레를 먹지 않으니 그들보다 뭔가 더 나은 것인가?


그럴 리 없잖아?



그러나  어느 수준에서는 우리도 진실을 알고 있다. 식육 생산이 깔끔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사업이라는 것을 안다. 다만,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싶지 않다. 고기가 동물에게서 나오는 줄은 알지만 동물이 고기가 되기까지의 단계들에 대해서는 짚어 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물을 먹으면서 그 행위가 선택의 결과라는 사실조차 생각하려 들지 않는 수가 많다. 이처럼 우리가 어느 수준에서는  불편한 진실을 의식하지만 동시에 다른 수준에서는 의식을 못하는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불가피하도록 조직되어 있는 게 바로 폭력적  이데올로기다. '알지 못하면서 아는' 이 같은 현상은 모든 폭력적 이데올로기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육식주의의  요체다.

나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다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무언의 계약이 이런 폭력적 이데올로기들에 내재한다. 물론  축산업계도 자기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만, 그 일이 쉬워지도록 우리 스스로가 돕고 있다는 얘기다. 그들이 보지  말라고 하면 우리는 고개를 돌린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수십억 마리의 동물이 야외의 평화로운 농장에서 산다고 그들은 말하는데,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임에도 우리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처럼 행동하는 까닭은 우리 대부분이 의식의 어느  차원에서는 정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p.95)



그렇다.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더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 진실을 애써 보려 하지 않았다. 들여다보면 내가 불편할까 봐  그랬다. 그래서 애써 고기를 먹는 나를 합리화했다. 침묵은 억압하는 쪽의 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랬다. 폭력에 눈감았다. 계속  고기를 먹고 있는 나인채로, 불편함을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느 부분에서 분명한 약자이다.  여자라는 입장에서 그렇고 그래서 평등해야 한다며 페미니즘을 주장한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니, 평등주의자가 아니라니, 그렇다면 너는  성차별주의자야?라고 반문할 수 있다면, 나에게도 역시 그런 질문이 되돌아올 수 있었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니, 그렇다면 너는  육식주의자야?


성차별주의자냐는 물음에 대부분이 아니라고 펄쩍 뛰는 것처럼, 나 역시 '육식주의자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펄쩍 뛰겠지만, 그러나, 육식주의자가 아니라면, 나는 대체 뭐란 말인가. 침묵하면서,  사정을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알려하지 않으면서 동물에 대한 폭력에 눈 감고 있는, 뒤돌아 서 있는 나는, 그렇다면 대체 뭐란  말인가. 이런 내가 육식주의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나? 아니, 나는 고기를 먹기는 하지만 육식주의자는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나? 이건 마치 나는 성평등을 주장하진 않지만 성차별주의자는 아니야, 하는 것과 다름없잖아? 내가 그들과 다를 게  뭐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면 성차별주의자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면 육식주의자다, 라는 것에도 역시 동의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기  먹는 일을 비윤리적이라고 믿는 사람을 채식주의자라고 한다면, 고기를 먹는 일이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채식주의자가 고기를 먹지 않기로 한 사람이라면, 고기를 먹는 쪽을 선택한 사람은 무엇이냐는 얘기다.

현재  우리는 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을 이를 때 '고기 먹는 사람(meat eater, 한자로는 '육식자[肉食者]'라 할 수  있겠다.-옮긴이)'이라는 말을 쓴다. 한데 이 용어는 과연 정확한가?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채식주의자는 단순히 '식물(植物)을  먹는 사람(plant eater)'이 아니다. 식물만을 먹는 것은 신념체계에 바탕을 둔 '행동양식'이다. '채식주의자'라는 용어는  핵심적 신념체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주의자'라는 접미사는 일정한 주의, 즉 일련의 원칙을 주장하고  지지하며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기 먹는 사람'이라는 말은 육류 소비 행위와 그 행위자를 분리한다. 고기 먹는 일이 당사자의 신념이나 가치관과는  무관한 듯이 말이다. 다시 말해, 고기를 먹는 사람은 신념 체계의 '바깥에서' 그것과 무관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암시한다. 하지만  고기를 먹는 일이 진정 신념체계와는 별개의 행위일까? 돼지는 먹고 개는 먹지 않는 게 우리에게 동물을 먹는 일에 관한 신념체계가  없기 때문인가?

산업화한  세계의 대부분에서 육식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 선택이다. 생존은 물론이고 건강에도 고기는 필수적이 아니다. 수백만명의 건강하고  장수한 채식주의자들이 이를 증명했다. 우리가 동물을 먹는 것은 단지 늘 그래 왔기 때문이며, 그 맛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동물이란 먹도록 되어 있는 게 아니냐, 즉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 생각하면서 먹는다.

우리는  고기 먹는 일과 채식주의를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본다. 채식주의에 대해서는, 동물과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일련의 가정들을  기초로 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육식에 대해서는 당연한 것, '자연스러운' 행위, 언제나 그래 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으로 본다. 그래서 아무런 자의식 없이, 왜 그러는지 이유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고기를 먹는다. 그 행위의 근저에 있는 신념체계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이 신념체계를 나는 '육식주의(carnism)'라고 부른다(carnism은 저자가  만들어낸 용어다-옮긴이).

육식주의는  특정 동물들을 먹는 일이 윤리적이며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신념체계다. 육식주의자(carnist), 즉 고기를 먹는 사람은  육식동물(carnivore)과 다르다. 육식동물은 생존하기 위해 육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육식주의자는 또  잡식동물(omnivore)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인간을 포함한 잡식동물은 식물과 육류를 모두 섭취할 수 있는 생리적 능력을 지닌  동물이다. 그러나 '육식동물'과 마찬가지로 '잡식동물'이라는 용어도 개체의 생물학적 특징만을 기술하지 철학적 선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육식주의자는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택에 따라 고기를 먹는데, 선택은 항상 신념에서 비롯된다. (p.35-37)



나는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육식주의자였다. 그리고 육식주의자다. 이것은 내 인식에 따른 것이었고 또한 내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어떤 동물을 먹는 것은 끔찍하지만, 그러나 어떤 동물은 '자연스럽게' 먹어도 된다고 생각해서 먹는 것. 선택에 따라 어떤 고기를  먹는 나는 육식주의자였다. 


나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나마 주변에 반려견, 반려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많아 '싫어한다'라고 말하는 것에서는 나아졌지만, 나는 어떤 동물이든 나와 함께  사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내가 앞으로 누군가와 함께 산다면, 그것이 연인이든 친구든, 공동체를 이루든 동거든, 그  사람 역시 어떤 동물과도 함께 살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동물들이 내 집안에서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털을  떨어뜨리고 나에게 그 몸뚱이를 비비는 것은 정말이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 고양이랑 함께 사는 친구네 집에 가면 고양이가 나에게  올까 봐 더럭 겁이 나는 사람이 나란 사람이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해 나도 이제는 길고양이에게 소시지를 챙겼다 주는  사람이 되었지만(이마저도 그것이 길고양이에게 좋은 게 아니라고 해서 안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동물의 고통을 짐작조차 못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걸 알기 때문에 더 같이 살기를 꺼려하는 지점도 분명히 있다.  낚싯바늘이 붕어의 입에 꽂히는 걸 어릴 때부터 자주 봐왔는데(아빠가 낚시를 너무 좋아하셨다), 그때마다 저 붕어의 입은 저  바늘이 뚫고 가 얼마나 아팠을까를 생각했다. 키우던 병아리가 닭이 되는 시점에 죽었을 때 아빠가 뜨거운 물에 넣었다 털을 뽑는 걸  보고는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가 먹는 닭은 이런 과정을 거쳐 내게 오는 것인가, 아무리 죽었다 한들 뜨거운 물에  담가지는 것인가. 동물 학대 영상은 차마 보지 못하고, 얘기로만 들어도 너무 끔찍하다. 인간이 어떻게 다른 생명에게 그토록  가혹하고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이수정 교수님은 일전에 [동백꽃 필 무렵]에 대해 얘기하시면서, 어릴 적에 동물을 잔인하게  학대하는 아이가 있다면 반드시 병원에 데리고 가 상담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그 아이가 앞으로 범죄자가 되는 걸 막을 수 있다고  했다. 동물학대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 그렇다면, 내가 그렇게 동물학대를 끔찍하게 여기면서, 내가 고기를 먹는 것은 과연  '괜찮은' 것이 되는가. 



'멜라니 조이'는 우리가 진실에 눈을 감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동물의 고통을 짐작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고통스러워질 테니까. 그러니 자기 합리화로 애써 눈을 돌리며 어떤 동물들을 먹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동물들이 고기가 되는 과정을 읽다 보니, 그 과정이, 이미 짐작했다 하더라도,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알겠다. 나는 그 폭력과  학대에 가담한 사람이었다. 동물을 때리고 가두고 고통을 주는 모든 순간들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허락하고 있었다. 그  개별적 존재들에 대한 고통에 더해, 어미와 자식을 떨어뜨리는 고통까지 더했다. 우유를 먹을 때 우리는 기꺼이 어미와 자식을  떼어놓는 고통을 그들에게 주고 있었다.



소들은  본디 길게는 1년까지 새끼에게 젖을 먹이면서 대단히 친밀하게 지낸다. 그러나 낙농 공장에서는 보통 송아지를 생후 몇 시간 만에  어미에게서 떼어 놓는다. 젖을 인간의 몫으로 돌리기 위해서다. 송아지가 어미 소 눈앞에서 끌려갈 경우, 어미는 흥분하여 큰소리로  울어댄다. 그래서 어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다른 장소로 데리고 가 젖을 짜고, 그 사이에 송아지를 끌어가기도 한다. (p.82)


동물들이 학대되는 과정, 죽어가는 과정을 맞닥뜨리면서 이제 나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채식주의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즐겁게 먹고 마시고 싶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런 나와 어떻게 타협해야 할까. 당장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만 머릿속에 떠올려도 죄다 고기들이었다. 하다못해 쌀국수를 먹으려고 해도 그 안에 고기가 들어 있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먹는 일에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채식주의자들로부터 채식주의를 해야 한다는 압박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육식주의를 멈춰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런 내가 뭘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



나는  좀 줄여나가는 걸로 일단 선택하기로 했다. 오늘 점심은 무얼 먹을까, 고민하고 떠오른 게 고기가 들어간 음식이었다면, 한 번 더  생각해보자고. 그러면 내가 일곱 번 고기 먹는 걸 네 번으로 그리고 세 번으로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혼자 먹는 밥이라면  그런 선택을 하기는 좀 더 쉬울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먹는 자리라면 메뉴 선택에 조금 더 스트레스받을 수도 있겠지만, 혼자  먹는 자리라면 아마 좀 더 쉽겠지. 혼자 먹을 때는 가급적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 메뉴로 선택하자. 선뜻 그런 메뉴를 떠올릴 수  없어서 오늘 아침 출근길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는데 차돌 된장찌개도 탈락, 김치찌개에도 돼지고기에서 탈락, 순댓국도 탈락, 뼈해장국  탈락, 쌀국수 탈락... 죄다 탈락이네. 쌀국수 먹을 때는 아마 주문 전에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기 빼고 주세요,라고. 물론  육수는 고기 육수겠지만.. 그러다 떠오른 게 콩나물국밥이었다. 그래, 콩나물국밥이 있다. 하루는 콩나물국밥으로 된다, 그러나  다음은? 생각하다 보면 하나씩 떠오르겠지. 줄여가 보자. 줄여나가 보도록 하자. 그리고 줄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학대받고 폭력에  노출된 동물들의 개체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멜라니 조이는 말하고 있다. 나는 힘을 얻는다.




동물성  식품을 일절 먹지 않는 게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먹는 양을 줄이기만 해도 동물과 자신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달에 한두 차례 고기를 먹는 사람은 매일 먹는 사람보다 훨씬 적은 수의 동물을 소비한다. 이것은 확실히 동물들에게  도움이 된다. 동시에 당신 자신에게도 유익하다. 가치관과 행동이 전보다 훨씬 조화를 이루는 걸 느낄 테니까. (p.202)



나는  폭력이 싫다. 폭력적인 것과 먼 삶을 살겠다는 내 가치관과 행동이 조화를 이루려면 육식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 나는 동물들의  고통을 짐작한다. 그러므로 육식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 나는 단지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태어나고 살아가는 동물들의 삶이  부조리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육식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 나는 동물들의 존재 의미가 자신들의 존재 그 자체에  있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육식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 아직 '채식주의자가 되겠다'라고 말할 수 없는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면서 살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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