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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Dec 04. 2020

왜 사랑을 시험하나요?

《사랑이 한 일》


                                                                                                                                                           

《사랑이 한 일》, 이승우 지음, 문학동네, 2020

신과  아버지는 넘어서고 뛰어넘었지만, 그래서 그렇게 했지만, 그래서 그렇게 하고도 현재를 살고 인간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 일을  당한, 아마도 아버지처럼 넘어서고 뛰어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을 형과 형의 어머니인 하갈은 어땠을까? 그들 안의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 파괴되고 훼손되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 <허기와 탐식>, p.149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사람도, 창세기의 유명한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신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 일. 아브라함은 신의 말을 충실히 따르며 그의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자 한다. 아직  어린 소년인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끄는 대로 졸졸 따라가서는 하나님에게 바쳐질 제물이 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칼을 든 그때, 신은 다급하게 아브라함에게 멈추라 말한다. 네 마음을 알았으니 지금 하는 행동을 그만두고, 저기 내가 놓아둔  숫양을 제물로 바치라는 거다. 이에 이삭은 제물로 바쳐지지 않을 수 있었다.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교회를 아주 오랜 시간 다녔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래서 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어떻게 제대로  되는지도 역시 모른다. 그러나 신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 일, 아브라함이 정말로 그렇게 하려고 했던 일에  대해서는 안다. 교회를 다닌 시간이 길다면 길었지만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가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신은 왜 그랬는가. 신은 왜  아브라함의 믿음 혹은 사랑을 시험하려 들었는가. 신이란 절대적 존재가 아니던가. 굳이 인간의 사랑을 혹은 믿음을 시험해야만  했는가. 그거 너무 부족함이 드러나는 일 아닌가. 게다가 그 시험을 어째서, 아들을 바치는 걸로 하라는 건가. 결국 신의 뜻대로  아들을 바치려고 한 아브라함은 신에게 그 사랑을 인정받고 복된 인생을 사는 건가? 이게, 기독교인들에게는, 믿음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신은 내게 네 사랑을 보여다오, 했고 아브라함은 네 그러겠습니다, 했는데, 왜 죽을 위험에 처하는 건 이삭인가. 신과  아브라함이 서로의 사랑을 이제 확인했기 때문에 이삭은 오, 베리 굿, 할 수 있게 되었는가? 이승우는, 이 상황에서의 이삭의  입장이 되어본다. 이삭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경험하고 생각하고 말한다. 그는 수차례 묻는다. 신이 그만두라 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했을 것인가. 정말 내 배를 갈랐을까? 이게 어린 이삭에게 트라우마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신에게 믿음을 증명하게 위해  나를 죽이려고 한 나의 아버지를, 이삭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아버지를 아버지로, 신에게 충심 한 아버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삭은 신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신에 대한 사랑을  이해한다. 안다. 그래, 그것이 사랑이 한 일이구나, 깨닫고 또 깨닫는다. 그러나 그 이해는 너무나 처절하다. 이해가 돼서 하는  이해가 아니라, 자신이 살려면 그것을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에 이해하는 어린 이삭이, 그리고 성인이 된 이삭이 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해와 사랑은 정말이지 처절한 데가 있다. 그가 아무리 사랑해서 그래, 신은 아버지를 사랑했어, 아버지도 신을 사랑했지,  계속 되뇌고 되뇌어도, 거기에는 자연스러운 이해나 용납이 아닌 처절함이 있는 거다. 내 아버지인데 그것을 사랑이라고 이해하지  않으면, 그러면 나는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하는 처절함.



그렇게 제물로  바쳐질 뻔한 데에서 살아나고 나서야, 그는 그제야 자신의 어린 시절 집에서 내쫓겼던 하갈과 그의 이복 형인 이스마엘을 떠올린다.  아,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 아버지로부터 내쫓겼다고 했지, 버려졌지. 내가 제물로 바쳐지기 전에 이미 내쫓긴 그들이 있었지,  그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그는 그제야 비로소 그동안 없는 듯 생각해왔던 존재를, 보이지 않았던 존재를 소환해낸다. 그들은 어땠을까,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걸까?



그랬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전, 자신이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을 어린 아들과 함께 내쫓았다. 아브라함 부부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아 아브라함의 아내는 자신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하갈에게 네가 대신 아이를 낳아다오, 하고는 바라고 명령하였는데,  막상 아이를 낳고 나자 그녀를 내친다. 그렇게 자신이 임신해서 이삭까지 낳고 나자 더 이상 하갈을 두고 볼 수 없어 아브라함에게 계속  저들은 내쫓으라 말한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하갈은 어린 아들과 함께 내쫓긴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걷고 또 걷다가 무너지기 직전,  신이시여 저를 데려가시되 제 아들은 살려주세요, 기도하다가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그녀는 우물을 발견해 아이와 함께 터를  이루고 살 수 있었는데, 그렇다면 하갈은 신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자신을 내쫓은 아브라함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자신의 아들과 무사히 살 수 있게 되었으므로 신의 보살핌을 감사히 여길 수 있게 되었을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살아가는 내내 숱하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까. 저 어린아이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원망하는 일이 없었을까?



재차  언급하자면 나는 성경을 읽어본 일이 없기 때문에, 이승우가 여기에서 풀어낸 이야기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성경의 내용인 줄은  모른다. 어느 만큼 을 이승우가 살을 붙여 이야기를 만들어낸 건지도 역시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승우가 이 책에서 서영채의 해설대로,  제물로 바쳐질 뻔한 이삭과 내쫓긴 하갈에게 목소리를 주었다는 것은 알겠다. 신과 아브라함의 사랑 때문에 그들이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는 것을 알겠다. 이삭의 아버지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처절한 지도 알겠다. 그런 틈틈이 나는 계속해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을 겪어도 어째서 이런 일은 반복되는가? 이삭은 자신의 쌍둥이 아들을 차별한다. 자신의 맏아들이 사냥해온 음식을 맛있게  먹고 축복하고자 한다. 그에게 둘째 아들은 딱히 사랑의 대상이 아닌데, 이에 이삭의 아내는 둘째 아들에게 더 큰 애정을 쏟는다.  사람은 이렇게나 불완전하고 사랑은 이렇게나 균형을 잡지 못한다. 그런데 이게 어디 인간만의 일이던가.


신은?  신은 어떤데? 신은 공평한 사랑을 사랑답게 했는가? 애당초 신이 시험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어째서 시험하는가, 왜? 너무 못나지 않았나, 사랑을 시험하는 일은. 아브라함이니까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갔지, 나였으면 안 갔을  것이다. 신이든 인간이든 내 사랑을 시험하려 했다면, 게다가 그 시험이 '날 사랑한다면 만원만 줘'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다면, 아이고야, 당신 사랑 안 하고 말지 그걸 시험이라고 하고 있다니, 맙소사, 내가 도대체 어떤  존재를 사랑한 거야? 하고 그 사랑을 내던질 것이다. 아마, 그래서 내가 지금은 더 이상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작가들마다의  글쓰기 성향이겠지만, 어떤 작가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자신이 경험한 일중에서 자신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에 대해 천착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니, 무릇 인간이란 다 그렇겠지. 그런 면에서 이승우가 창세기에서, 그것도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가져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은 지나치게 당연해 보인다. 이승우의 책을 읽다 보면 이승우는 끊임없이 온전하지도 다정하지도  못했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니까. 감히 짐작건대, 종교학을 공부했던 이승우가 결국 소설가가 되어서 이런 소설을  써내는 것은, 작가 자신이 천착하는 일이 내면에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는 일은 처음에  내면의 약함으로 시작했을 것 같다. 그것이 자기를 잡고 놓아주지 않아 들여다봐야 되는데, 계속 들여다보게 되니까 그것을 풀어내야  했고, 그렇게 그것이 글로 표현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글로 계속 표현하다 보니 결국은 그 내면이 단단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렇게 풀어준 창세기 이야기가 좋고 고맙다.



창세기의 이야기들로  풀어낸 다섯 편의 단편이 이 책 안에 있고, 각 단편을 시작하기에 앞서 창세기의 성경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이승우가 인용한 성경은  <현대인의 성경>이라고 되어 있던데, 이승우 책을 읽으면 언제나 그렇듯이 이 책을 읽으면서도 성경을 읽고 싶어 졌다.  그렇다면 이번엔 한 번 읽어볼까, 하고 현대인의 성경을 검색해 장바구니에 넣는다. 적어도 창세기 부분만큼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이승우의 소설을 읽은 후에 성경을 읽는 것이 성경을 읽는 바른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승우가 출애굽기도 레위기도 시편까지도 다 써줬으면 좋겠다. 책장에 차곡차곡 이승우가 써낸 성경 모티브  책들을 꽂아두고 싶다. 창세기를 출애굽기를 시편을, 신약성서 까지도, 이승우의 글로 만나고 싶다. 간절히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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