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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자인간 Oct 26. 2024

힐러리 한과 함께 떠나는 환각 여행

힐러리 한의 이자이 바이올린 소나타


올해의 그라모폰상 수상작들에 대한 에서 '올해의 음반'으로 소개한 <힐러리 한의 이자이 바이올린 소나타>이다. 그라모폰상을 비롯, 각종 클래식 음반상을 싹쓸이하다시피 한 매우 유명한 음반이다.


이 음반의 유일한 연주자인 힐러리 한 Hilary Hahn은 1979년 생 미국 바이올리니스트다. 당연히 한국의 한 씨는 아니고 독일 한 씨다. 미국 대통령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 Hillary Clinton과는 이름의 한글 표기는 같지만 영문 표기가 다르다. 대부분의 뛰어난 연주가와 마찬가지로, 힐러리 한은 만 네 살도 되기 전에 바이올린을 시작하여 10살에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한 신동이었다. 그는 바흐부터 동시대 작곡가에 이르는 편중되지 않은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으며, 클래식은 물론이고 대중음악, 영화음악, 심지어 AI를 활용한 음악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연주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힐러리 한은 우리나라에서 '얼음공주'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굳게 앙다문 입, 피마저도 하얄 것 같은 흰 피부, 얼어붙게 만드는 레이저가 나올 것 같은 파란 눈동자, 서늘한 느낌의 파란색 배경 등, 초기 음반 커버의 냉랭한 분위기가 아마도 '얼음공주'라는 별명에 한몫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힐러리 한의 초기 음반을 들어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최근 몇몇 음반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냉정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칼 같은 연주 스타일도 얼음공주 - 지금은 얼음여왕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만 - 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일조했을 것이고.

얼음공주 힐러리 한. 프레스토 뮤직

하지만 이자이 바이올린 소나타 음반 커버를 보자. 이제 더 이상 힐러리 한은 20대 때의 얼음공주 이미지가 아니다. 오뚝한 콧날이 살아있는 미모는 여전하지만, 두 딸을 둔 중년의 엄마로서 마치 딸들에게 연주하고 있는 듯 푸근하고 살가운 느낌이 들지 않는가? 심지어 배경도 따뜻한 담요 느낌이다. 사실 그가 '얼음공주'라는 이미지와는 상반되게 얼마나 너그러운 사람인지는 지난 5월 내한 연주 때의 에피소드로 잘 알 수 있다.


힐러리 한은 5월 11~12일에 있었던 브람스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전곡 연주를 위해 5월 8일 한국에 들어왔다. 그의 연주와는 전혀 상관없이,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함께 5월 9~10일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손열음이 갑자기 극심한 고열을 동반한 인후염이 걸려 협연이 불가능한 비상 상황이 터졌다. 이때 나는 우연히 클래식 동호회 눈팅 중이었는데, 손열음 협연 불발로 많은 공연 예매자가 실망하고 예매를 취소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잠시 후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했을지도 안다. 협연자가 손열음에서 힐러리 한으로 교체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캐스팅이 전도연에서 스칼렛 요한슨으로 바뀐 것이랄까? (비유가 적절하지 못했다면 죄송. 전도연이나 손열음 모두 매우 훌륭한 배우며 연주자다. 단지, 전도연이나 손열음은 세계적인 인지도 측면에서 스칼렛 요한슨이나 힐러리 한에게는 살짝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힐러리 한은 손열음 대타로 오른 무대에서 무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그는 사실 11~12일 연주를 위해 드레스를 한 벌만 준비했는데, 그 옷으로 9~10일 연주까지 소화해서 결과적으로 4일간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연주했다는 후문이다. 힐러리 한에게는 대타로 뛰었을 때의 경제적 이득이 컸을 것이고, 뉴욕필하모닉 시절의 츠베덴과의 인맥도 주요하게 작용했겠지만, 4일 연속으로, 그것도 그 중 2일을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즉석에서 연주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실력, 자신감, 그리고 너그러움으로만 설명 가능하다. 4일간 똑같은 드레스를 입은 것에서 의외의 털털함을 엿볼 수도 있고.


다시 음반 얘기로 돌아오자. 외젠 이자이 Eugène Ysaÿe는 벨기에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힐러리 한의 스승의 스승이다. 이른바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라고 하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사실은 이자이를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이자이의 바이올린 연주의 적통을 이어받은 힐러리 한으로서는 이자이의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이며 모든 바이올리니스트가 넘어야 할 거대한 산 중 하나인 바이올린 소나타 Op.27 음반 작업이 아마도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2023년에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이자이 바이올린 소나타가 작곡된 지 100년 된 해가 바로 2023년이었던 것이다. 힐러리 한은 2022년 핼러윈 무렵에 수달 의상을 입고 딸들과 장난 아니면 간식(trick or treat)을 하면서 동시에 이 곡을 녹음했다. 녹음 도중에 옆방에서 딸들이 장난감을 들고 와서 놀기도 했다고. 역시 이제 힐러리 한은 얼음공주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평범하고 따뜻한 모습이 철두철미 엄청난 기교를 요하는 이 곡에 따사로운 온기를 덧입혔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음반을 수많은 다른 이 곡의 녹음들보다 돋보이게 만든 것이 아닐까?


이자이의 바이올린 소나타 Op.27은 모두 6개의 곡으로 이뤄졌다. 모두 연주하는데 대략 한 시간 남짓 소요된다. 사실 무반주 바이올린 연주곡은 감상하기 매우 까다로운 장르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파르티타의 경우, 정경화, 나탄 밀스타인, 헨릭 셰링 등이 연주한 3 종의 음반을 구비하고 열심히 반복 청취했지만, 아직도 그 멜로디를 따라잡기 벅차다. 역시 무반주로 연주하는 이자이 바이올린 소나타는 비유하자면 묵을 묻힌 붓으로 휘갈긴 추상화 느낌의 서예 작품이랄까? 피아노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바이올린으로만 선율을 만들어 가는데, 난해한 시를 읽는 듯 정신을 집중해야 겨우 그 윤곽이 느껴진다. (물론 이자이는 현대 작곡가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낭만주의적 화성의 느낌은 있다. 다행히도)


이 음반은 바이올린을 배운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재미있을 것이다. 바이올린으로 할 수 있는 온갖 기교가 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음을 동시에 연주하는 더블스톱은 기본이고, 네 줄짜리 현을 가진 바이올린을 가지고 여섯 개의 음으로 이뤄진 화음을 내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기. 브리지 위에서 활을 그어서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폰티첼로 기법. 활을 쥔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으로 하는 피치카토...


힐러리 한은 이 곡을 연주하면서 마치 본인이 작곡한 곡인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듣기에 어렵고 때론 고통스럽기까지 하지만, 반복해서 듣다 보니 점점 곡에 빨려 들어가서 이자이로 빙의한 힐러리 한이 내 앞에서 연주하고 있다는 환각을 느끼게 된다. 열 번을 들어도 파악하기 어려운 멜로디, 그러나 곱씹을수록 스멀스멀 느껴지는 이자이-힐러리 한 중합체의 낭랑한 모노드라마, 바흐와 낭만음악과 인상주의 음악, 그리고 스페인 하바네라의 향취 등 강하고 다채로운 색채감을 바이올린이라는 단색으로 표현해 내는 환각작용... 이 음반은 도전욕을 자극하고 파고들게 만들고 결국 황홀감에 젖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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