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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자인간 Sep 30. 2024

준 강남에서 영끌 월세를 살다.

판교 백현마을

나는 판교 백현마을에 산다. 보다 정확히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백현마을이라 해야 하겠지만, 백현마을 사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자신의 집 위치를 소개할 때 공식 주소에는 포함되지 않는 '판교'를 붙이기 마련일 것이다. 서초구 서초동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집이 '강남'에 있다고 얘기하는 것과 거의 유사한 이유다. 

판교 백현마을 지도. 네이버 지도


2024년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은 '판교'라는 지명에서 서울의 이른바 '강남 3구'와 '마용성' 보다는 못 할지라도, 웬만한 서울의 아파트 가격을 가볍게 뛰어넘는 고가의 아파트를 떠올린다. 게다가 그런 판교를 경부고속도로를 기준으로 동판교/서판교로 구분하기도 한다. 내가 사는 백현마을은 그 둘 중 조금 더 비싼 것으로 알려진 동판교에 있다. 


내가 비싼 동네 산다고 자랑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사실 나는 월세를 산다. 물론, 매매가가 비싼 동네인 만큼 월세도 상당하다. 흔히들 아파트 영끌 구매 후 갚아나가는 주담대 원리금 수준이랄까.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자조적으로 '영끌 월세'를 산다고 얘기하곤 한다. 


왜 이렇게 비싼 동네에서 자기 집도 아니면서 생돈 날려가며 '영끌 월세'를 살고 있냐고 묻는다면, 판교, 특히 동판교의 우수한 교통환경이 가장 큰 이유라고 말할 수 있겠다. 판교는 경부고속도로,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 제2경인고속도로, 용인서울고속도로 등 4개의 고속도로와 분당수서로, 대왕판교로, 3번 국도 등 굵직한 간선도로 여럿이 교차하고 있어, 서울과 경기 남부의 어느 지역이든 승용차로 빠르게 이동 가능하다. 바로 이 점이 동탄이 직장인 나와 경기 남부 중 어디를 발령받을지 알기 어려운 아내 모두의 출퇴근을 위한 최적 지점이 판교가 되는 이유다. 게다가 곧 전역해서 내년에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복학할 아들의 통학이라는 제3의 변수까지 고려했을 때도 서울로 가는 광역버스의 허브이자 판교역이 위치한 동판교는 최적 입지라 할 만하다.


물론, 비싼 동네에는 훌륭한 교통만큼이나 생활을 위한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그리고 판교는 판교 특유의 부자 IT 기업들의 육중하고 번쩍이는 통유리 빌딩숲과 그 사이사이에 위치한 근사해 보이는 레스토랑과 카페들로 인해, 뭔가 인텔리전트 하고 엘레건트 하며 리치해 보이는 느낌이 강하다. 이것이 '영끌 월세'를 살면서까지 굳이 판교에 살고 있는 부차적이지만 보다 기저에 깔려있는 이유일 것이다.


사실 1년 반쯤 전에 판교로 이사오기 전에는 강원도 원주에 살았더랬다. 원주는 강원도에서도 수도권에 가장 가까운 편이어서, 나는 지인들에게 내가 사는 곳은 '준 수도권'이라고 농담 삼아 얘기하곤 했다. 그리고 '준 수도권'이란 말을 행동으로 증명하듯, 나는 10년이 넘는 세월을 원주에서 동탄으로 출퇴근해 왔었다. 


원주에서 나는 상류층이라 할 만했다. 원주에서 가장 신도시로 각광받는 동네에서도 가장 넓은 축에 드는 아파트에 살았고, 그래도 남는 돈으로는 상가를 투자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원주 구시가지의 낡은 주택에 사시며 추위 더위와 사투를 벌이시던 연로하신 장인장모님을 위해 원주 신시가지의 작은 아파트를 분양받아 헐값 전세로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재계약 없이 편안히 사시도록 배려해 드리기도 했다. 재산이 거의 없으신 어머니를 위해서는 어머니 고향의 아파트를 매입해서 사시게 끔도 했다. 준중형 세단이었지만 나와 아내 각각 번듯한 수입차 한 대씩 몰면서... 굴지의 대기업에 20년 넘게 다닌 사람으로서 원주는 대출받을 필요 없이 '플렉스'를 맘껏 실현할 수 있는 낙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경기도로 발령받았다. 20여 년을 기다리던 소식이어서 나와 아내는 모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월세 살이가 시작되었다. 갑자기 허둥지둥 이사를 해야 했기에 코로나 직격탄을 맞은 상가를 처분할 수 없었다. 장인장모님 계시는 원주 아파트, 어머니 사시는 포항 아파트는 어르신들이 살아 계신 한 처분할 수 없다. 판교 '국평' 아파트 가격의 삼분의 일 수준인 원주 신도시 대형 아파트는 처분해 봐야 판교 아파트 월세 보증금 정도 건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월세 살이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월세 살이를 시작할 때는 전국 아파트 가격이 최저점을 찍을 무렵이었다. 나는 그 정도 수준의 가격이 유지된다면, 또는 약간의 플러스알파가 붙더라도, 상가를 처분하고 차근차근 돈을 조금 더 모은 후 주담대를 활용하면 2년 후 집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요즘 강남 집값이 신고가를 찍은 곳이 많다. '준 강남'인 판교에서도 몇몇 단지에서 신고가를 찍었다. 장인장모님이 사시는 원주나 어머니 사시는 포항의 집값은 보합 또는 하락세다. 이제 나는 내가 월세로 살고 있는 백현마을 국평 아파트를 당분간 매수할 생각이 없다. 아니, 매수할 수 없다. 나는 현재의 미친듯한 서울 수도권의 집값 상승이 일시적일 뿐이고 결국 합리적인 가격으로 수렴할 것이라 믿으며 세입자 생활을 당분간 계속하겠다고 마음먹은 상태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망국적 수도권 중심주의를 피해서, '준 수도권'이기는 해도, 지방에서 십수 년을 살았다. 그 후 내가 나고 자란 수도권에 다시 진입한 후 1년 반, 수도권에서 살아온 것과 비수도권에서 살아온 것의 격차는 따라잡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내가 사는 판교 백현마을은 경기도에서 집값 비싸기로 소문난 동네다.

판교 백현마을의 가장 큰 장점은 교통이다. 그리고 당연히 럭셔리함도.

1년 반 전에는 우선 영끌 월세로 버티다가 집을 매수할 계획이었지만, 현재로서는 매수는 보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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