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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03. 2023

관람차 같은 삶 <영화 브로커>

영화로 만드는 에세이

관람차에 탑승하기 전에는 꼭 설레고 두근거린다. 내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관람차가 앞에 멈춰 서면 혹시라도 늦을까 조금이라도 빨리 올라선다. 그리고 관람차는 아주 느리고 천천히 혹시나 우리가 뭐라도 하나 놓쳤을까 봐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가장 느리게 움직인다. 우리는 우와하는 탄성도 잠시 곧 관람차의 지루함을 알게 된다. 변하지 않는 풍경에 이토록 쉽게 질리다니 정상에 닿았다가 내려가길 시작하는 관람차의 덜컹거림에 답답한 마음이 든다. 빨리 내려서 다시 올라가고 싶은데 다른 것들도 타고 싶은데 관람차는 처음 그랬던 것처럼 변하지 않는 속도로 움직인다. 이제 내릴 때가 되면 조금 아쉽다. 위에서 보던 풍경이 영원할 줄 알았던 건지 내려서 보는 풍경에 만족을 못하는 건지. 그래도 위에 있을 때가 좋았던 건지. 관람차에 함께 했던 사람과의 시간이 아쉬운 건지. 아마 그중에 가장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사랑하는 이와의 영원할 것 같았던 천천히만 흐르고 있던 시간이 금세 끝난 것 같아서인 것 같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가장 느리게 움직이는 관람차처럼 삶은 움직인다. 우리의 자각만 변할 뿐 삶은 8살의 나에게도 30살의 나에게도 똑같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어린 나는 빨리 어른이 되어 큰 키로 높은 곳에서 세계를 보고 싶다. 그러나 삶을 살만큼 살았다거나 볼장 다 볼 나이가 되고 나면 세계는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곳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관람차의 꼭대기에 올라서서 보는 감동이 순간 지루해지는 것처럼 삶은 권태롭고 지루해진다. 따뜻하고 행복할 줄 알았던 어린아이의 세계는 어른이 되어 때론 고통스럽고 외로운 모습으로 보인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가끔 '너는 몰라도 돼'라고 얘기하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직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눈을 가리는 것 역시 그런 의미다. 그러나 아이의 눈을 가린다고 세계가 사라지는 건 아니듯. 세계는 여전한 모습 그대로 아이를 기다린다. 그래도 부모는 아이가 최대한 자신이 보는 세계만큼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나 같지 않았으면,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모는 최대한 그 시간을 지연시키려 한다. 사랑은 때론 눈을 가리고 어리석게 만들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아이는 이 또한 부모가 되어서 그것이 사랑의 속성 중에 하나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관람차는 영원히 돌아갈 것만 같다. 아니 그런 바람이 있다. 관람차를 타고난 뒤 멀리 떠나 시간이 지나 뒤돌아 볼 때 기억 속의 그때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지키고 싶은 본능적인 마음은 아마 이 관람차에서 언젠가 반드시 내려야만 한다는 걸 알기 때문 아닐까? 어쩌면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이 사랑을 하게 만들고 가족을 만들게 하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반드시 스스로를 구원하므로 우리는 사랑에 그토록 매달리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여 스스로를 지켜낼 수만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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