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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13. 2023

이 영화가 정말로 위험한 이유 <영화 조커>

영화로 만드는 에세이

"마누라가 무슨 뜻인지 알아?" , "마! 누으라!"


웃음과 울음은 원초적이다. 하지만 울음이 웃음보다 먼저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울음을 터트린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선포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알림이다. 울음은 이처럼 비교적 대부분의 인간에게 공통의 표현이다. 


갓난아기가 태어나자마자 해야 할 일은 울음 터트리기인 것과 같이 대부분의 인간이 인종과 문화 환경과 상관없이 비슷한 상황에 슬픔을 느낀다. (동의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상실, 분노와 같은 감정이 울음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울음은 문화적 사회적 배경에 상관없이 비교적 공통된 감정을 공유하는 편이다. 하지만 웃음은 그렇지 않다. 웃음은 문화, 사회, 시대, 언어, 맥락 등 그 순간에 고려되는 것이 정말로 많다. 웃음은 가끔 정말로 이해하기 어렵다.


커뮤니티 사이트를 둘러보면 정말로 이해할 수 없이 자기들끼리 웃는 경우가 많다. 나는 웃기지도 않는데 그들은 'ㅋㅋㅋㅋㅋ'를 연발한다. 그럼 나는 그냥 대충 그런 게 있나 보다 하고 넘어간다. 유튜브로 접하는 스탠드업 코미디, 개그를 일상으로 하는 채널들도 가끔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그런 경우 때론 집단적 소외를 경험하는 듯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웃는데 나만 안 웃긴 이 느낌. 뭔가 고립되는 느낌, 누구나 한 번은 해봤을 이 경험은 마치 초등학생 때로 돌아가는 듯하다. 유년시절 다들 웃는데 나만 못 웃고 있었던 경험, 왠지 트라우마로 남은 것만 같지 않나? 인간은 웃음에 대한 선천적 공포 역시 가지고 있다.

코미디에도 클리셰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울음에도 비교적 공통된 감정 상태가 있는 것처럼 코미디도 비교적 공통적인 이야기로 접근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 슬랩스틱, 금지된 성에 관련된 이야기, 똥에 대한 이야기 등. 나이대에 상관없이 웃음을 유발하는 클리셰들은 꼭 빠지지 않고 코미디에 사용된다. 


그렇지만 사라져 가는 것들도 있다. 이제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코미디는 보이지 않고 있다. 시꺼먼스와 같은 분장과 성차별적 발언의 코미디는 사회적으로 금기시 됐다. 인종차별을 일삼는 백인 코미디언들이 한때 미대륙에서 유명세를 떨쳤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을 대상으로 농담을 하던 코미디언들이 보이지 않는 것 등을 생각하면 웃음은 확실히 특이하다.


그리고 유머러스(웃김)에 대한 접근 역시 특이하다. 왜 대중은 '남성'의 유머에 비교적 관대할까? 유머러스한 남성을 이상형으로 꼽는 여성은 많지만 유머러스한 여성을 이상형으로 꼽는 남성은 절대적으로 숫자가 적다. (이 역시 현재에 들어 점점 변해가는 추세이지만) 


남성은 여성의 유머에 비교적 관대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기존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남성은 여성의 사회활동은 물론 웃음활동까지 참여를 막은 걸까? 왜 여성이 남성보다 유머러스함에 더 이성적인 선호도를 갖게 된 걸까?


내 생각에 코미디는 굉장히 난해한 예술 중에 하나다. 관객의 웃음코드를 맞추기 위해 코미디언이 고려해야 할 것은 사회, 문화, 시대, 언어, 맥락 등을 고려해야 한다. 코미디언들이 똑똑하다는 편견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닌 듯하다. 


그들은 보다 빠르게 대중문화를 읽어야 하고 그것을 비꼼으로써 공감과 웃음을 만들어야 한다. 높은 수준의 코미디는 높은 지능이 뒷받침돼야 할 것 같만 같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유머러스함이 이성적 선호 척도에 들어가는 것은 아마 높은 수준의 유머가 공감 능력과 지능에 대한 지표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을 웃기기 위해선 먼저 세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앞서 말한 모든 고려사항들은 모두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태도에 반영된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세계관을 읽어야 하며 그 안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보여주고 심지어는 웃겨야 한다. 


질서를 알아야지만 분석이 가능하고 종국엔 분해가 가능하다. 원초적인 발상도 나쁘지는 않다. 그것 역시 그가 인간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아서는 세상을 얼마큼 이해하고 있을까? 그에게 있어 아버지의 부재는 꽤 큰 영향을 주는 듯하다. 아버지는 보통 문학적으로 세계, 질서, 도덕, 규율 등을 의미하는데 그래서인지 아서의 세계는 앞서 말한 것들이 혼란스럽고 때로 부재한다. 


그에게는 세 명의 아버지상이 있는데 첫 번째는 그의 광대 회사 사장, 두 번째는 토마스 웨인 세 번째는 머레이 프랭클린이다. 토마스 웨인이 진짜 아버지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찌 됐든 셋 다 아서를 유기하고 상처를 준다는 게 핵심이다. 


아서는 세계, 질서, 도덕, 규율에게 유기당하고 상처를 입고 분노한다. 아서의 '당신들은 뭐가 웃긴지 판단한다'라는 맥락의 대사를 머레이에게 하는 것 역시 이 영화에서 남성과 아버지가 '세계' 혹은 '가치'와 대치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아서가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에게 롤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반쪽 세계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쉽게도 그를 남성으로 길러내지 못했고 아서는 어린 소년으로 남았다. 그의 유머가 대중들에게 먹히지 않는 것 역시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가 끝까지 코미디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가 기존 남성 세계, 기존 세계에 들어서고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을 대변한다. 그는 노력하지만 기존 세계는 그를 튕겨내기만 한다.


그래서 아서는 기존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다른 방식을 선택한다. 그는 코미디로써 인정받는 자신이 아닌 폭력으로써 대중들에게 인정받는 자신, 가면 쓴 광대로써 기존 세계의 문턱을 넘으려 한다. 코미디는 자신을 배척하고 판단했지만 폭력은 자신을 집단 내부로 끌어들였다. 그가 지하철 내부에서 폭력을 유린하고 폭력 자체가 되며 사라지는 것이 이를 반증하는 듯하다. 


그는 스스로 파괴와 폭력 그 자체가 되었고 그럼으로써 드디어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지금껏 계속해서 세계에 발 딛고 싶어 했고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기존 사회가 가진 가치관에 부합하기 위해 (코미디언이 되기 위해) 그렇게 부단히 노력했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몇 번만으로 그는 고담시 시민 일부의 영웅이 되었다.

이 영화가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이며 대중들에게 반감을 갖게 만드는 이유, 그러니까 이 영화가 정말로 위험한 이유는 문학적(이야기)으로 세계(도덕, 질서)의 부재를 연상시키며 불쌍한 주인공이 상황을 돌파하는 방식이 폭력적이고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기존 세계는 부도덕하고 타락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폭력적인 동기와 행위가 발현되며 이것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유발하고 있는 것 역시 큰 쟁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감독은 마지막 엔딩에서 이 모든 것이 마치 하나의 유머 혹은 환상, 혹은 정신병자의 넋두리 정도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감독이 망치를 든 혁명이나 기존 세계의 해체에 동의하고 있다고 보기엔 조금 어렵다. 


영화 조커는 감독이 준비한 하나의 거대한 코미디 자체이며 감독이 어떻게 세계를 읽고 비꼬고 있는가에 중점을 두고 보는 것이 옳은 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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