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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Jan 15. 2024

'도토리 나무' 이야기

동거 커플의 일상적인 나날

적막한 시골 풍경이다. 사람들은 참으로 부지런해서 백두대간에 열심히 다리와 도로를 놓고 그 위에 바퀴가 굴러다니도록 만들었다. 개미 하나 보이지 않는 조용한 봉화 마을과 주변 산맥은 내게 완전히 생경한 기분을 들게 만든다. 그날 우리는 다리가 놓인 이상한 세계로 한 발 내디뎠다.


영주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영주는 예비 신부 H의 고향이다.) 점심으로 염소 전골을 먹기로 했었는데 우리 커플 둘 다 머리털 나고 처음 먹는 음식이라 생소했다. 염소를 먹는다는 건 우리 삶에 놓인 선택지 중에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 마주한 염소 전골은 맛깨나 있었다. 그냥 염소 고기를 먹는 기분이고 비유하자면 양 고기에 가까웠다. 사실 우리 두 사람 다 맛을 잘 기억하진 못했다.


우리 둘 다 식사보다 엄한데 마음이 가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날 결혼을 엄포하겠다며 이미 예고를 해둔 상태였다. 가족 식사가 처음인 듯 우리 커플은 긴장하고 말았다. 어영부영 식사가 끝났다. 어째 이야기를 꺼낼 틈이 없어 보여 우리는 입도 떼지 못하고 자리를 옮겼다. 


어머니 치킨 가게에 할머님, 할아버님까지 모시고 자리를 조율한 뒤에야 결혼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긴장에 애먼 손만 바지에 닦던 나는 H의 어시스트 덕에 간신히 말을 꺼냈다.


"저희가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 (이후부터는 아무 기억이 나질 않는다.)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멋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따님을 책임지겠습니다" 따위의 감언이설을 준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여러 시간 진중하게 준비했던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한 차례 정적이 있었고 허락이 떨어졌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셨겠지만, 자녀의 공표를 들으시고는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기도 하셨다. 우리는 다음으로 결혼 계획을 공유하고 부모님 의중을 확인했다. 중간중간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숨을 골랐고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참기도 했다.


몇몇 순간에는 시간이 더디게 흐르기도 했고 몇몇 순간은 소용돌이치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의 방식대로 참 아름답게 풀어나갔다 싶다. 모든 게 계획대로 그리고 순탄하게 흐른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자녀의 자리에서 진심을 전달했고 부모님은 부모의 자리에서 자녀의 앞날을 응원하고 축복했다.


참으로 필요했던 응원과 축복이 내려지자, 두려움에 연약해 보이기만 했던 두 자녀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의욕이 솟았다. 자녀는 결국 부모의 인정이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선보이고 이를 인정받는 것만큼 기쁜 순간이 어디 있겠는가.


이야기를 마친 뒤 우리 커플은 날이 유독 좋았기에 외곽으로 드라이브를 갔다. 긴장이 풀리면서 말을 조잘댔다. 결혼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첫 드라이브 코스 부석사(절)로 향했다. 고즈넉한 산새에 소박하지만, 심지 굳은 아름다움을 뽐내는 부석사를 나도 그녀도 참으로 좋아한다.


현관을 하나씩 지날 때면 풍경과 마음가짐도 달라진다. 아미타불이 봉안된 무량수전에 들어서면 영험한 기분이 든다. 문득 생경한 기분이었다. 절을 올리다가 이 날은 참으로 많은 것들이 새롭구나 싶었다.


우리 커플은 드디어 커다란 문 하나를 열었다. 우리 커플은 다른 무언가로 들어섰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좋은 뜻으로 이제 우리는 과거와는 같을 수 없음을 느꼈다. 현관을 지난 듯, 마치 세례라도 받은 듯 묘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특히나 그날 온통 처음 해보는 것들 투성이었어서 마치 어린아이가 된 느낌이었다.


들뜨는 동시에 걱정도 두려움도 찾아왔다. 제법 무거울 것 같아 밀 엄두가 안 나던 문은 자녀를 아끼는 부모의 사랑 덕에 쉽게 열렸지만, 다음 우리가 맞이할 문은 우리 힘으로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지어야 할 책임과 세계의 요청에 기꺼이 응답하겠다며 다짐했다.


다음 날 우리 네 사람은 차를 타고 봉화에서 화덕 피자를 먹고 백두대간을 둘러봤다. 차 안에는 이야기가 꽃 피었고 웃음이 잦았다. 나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어서 몰래 웃고 때로는 거들었다.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도토리나무' 이야기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모아서 이곳저곳에 숨겨두고는 까먹어 버려서 그것들이 도토리나무가 된다는 이야기다. 아버님은 진지하게 말씀하셨고 나와 그녀는 한참이나 그 이야기에 웃었다. 나는 네 사람이 차에서 하기 딱 좋은 이야기이지 아닐까 싶었다.


겨울의 밭과 과수원은 참으로 썰렁하다. 지원사업이라고 적힌 농업건축물들이 종종 보이고 늙은 듯 늙지 않은 소나무들이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투박한 도로를 달리며 지나가는 풍경의 묘한 매력에 젖을 때면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가 툭 내던져진다. 나는 그 정도의 분위기를 사랑한다. 생경하지만, 너무나 익숙하고 따스한 기분이 나의 마음을 포옥 안아 들었다.


우리의 결혼 이야기가 시작될 때 나는 '도토리나무' 이야기를 꼭 첫 문장으로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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