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마조히즘과 부성(父性)
데미언 셔젤의 《위플래쉬》(2014)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전율이 아직 선명하다. 이 데뷔작품으로 단박에 할리우드의 기린아로 떠오른 감독은 다음 장편 《라라랜드》로 동시대 가장 주목해야 할 감독이자 스토리텔러임을 증명했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위플래쉬는 청자를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다. 플레처와 앤드류의 위태로운 관계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예측 불허의 재즈 합주와 닮았다.
이 걸작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크게 세 가지다. 신인 감독이 단편부터 이토록 완벽한 청사진을 그려냈다는 점, 그리고 불과 19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촬영을 마쳤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미스터리는 아마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관객이 궁금해할 엔딩 씬에서 보인 앤드류와 플레쳐의 미소다.
서로의 목을 조르던 두 남자가 마침내 눈을 맞추며 짓는 미소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자신을 파괴하려던 이와 충돌 끝에 만들어내는 완벽한 합주는 가학과 피가학 그 사이에 만들어낸 합일이다.
엔딩에서 앤드류의 연주를 지켜보는 인물, 짐 네이먼이 클로즈업으로 비친다. 이 남자는 플레쳐와 앤드류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지켜본다. 그 표정의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짐은 왜 엔딩에 꼭 필요한 인물이었을까?
위플래쉬에는 크게 두 개의 힘이 대립한다. 각각 짐과 플레쳐의 세계관이다. 이 둘은 정반대에 서 있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큰 의미에서는 그 목적이나 성격이 같다.
짐 네이먼은 앤드류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인물 중 하나다. 여러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소극적이고 무시당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영화관에서 모르는 관객이 그의 머리를 치고 가지만, 정작 사과하는 인물은 짐이다. 이후 사촌들과의 식사 장면에서 그의 형이 고기가 질기다며 타박하는데 짐은 웃기만 한다. 이때 앤드류의 표정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하다. 자신의 아버지가 형제에게 무시당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앤드류가 자신의 근황에 대해 얘기할 때, 그의 사촌 형제들에 의해 방해된다.
그밖에 실패한 소설가라던가, 고등학교 교사라는 점*(고교 교사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작중 플레쳐가 대학 교수인데 반해, 그가 하필 ‘고교 교사’인 점은 눈여겨 볼만한 점이다. <브레이킹 배드>에서 월터 화이트가 직업적으로 무시당하는 장면은 미국의 대중 예술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어떤 스테레오 타입으로 다루고 있는지 알 수 있다.)에서 그는 확실히 ‘파워(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짐은 시종 앤드류의 욕망을 억누른다. 그는 마치 아들이 안전한 패배자의 궤도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초반, 짐은 앤드류의 열정을 은근히 회의하며 "다른 길도 있다"라고 속삭인다. 앤드류의 꿈은 링컨 센터라는 최고의 무대를 향해 있지만, 짐은 이를 3부 리그 수준으로 낮춘다.
그의 태도는 수동적이지만, 가학적이다. 그는 일관되게 아들의 욕구를 인정하지 않고 낮추는데, 이는 플레쳐와 성격만 다를 뿐 또 다른 통제다. 그는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안에 속 뜻은 다르게 해석된다. 가정 내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앤드류를 자기 통제 아래 두고 싶은 욕구다.
그 때문에 앤드류는 인간관계에서 소심하고 서툰 모습이다. 그는 짐처럼 권력의 가장자리에 있는 인물이다. 군중 사이에 겉으로 맴도는데, 언뜻 봐도 그가 그가 주도권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앤드류가 ‘드럼’을 친다는 것은 흥미롭다. 드럼은 음악의 뼈대다. 드러머가 빨라지면 모든 악기가 따라와야 하고, 드러머가 절면 전체 연주가 무너진다.)
아버지와 닮은 앤드류의 모습은, 자신이 가장 탈피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다. 짐은 앤드류에게 있어서 극복하고 파괴해야 할 구(舊) 질서이자 장애물이다. 짐은 앤드류가 닮고 싶지 않은 무능한 아버지의 표상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비록 소시오패스일지라도) 플레쳐를 새로운 아버지 또는 의존 대상으로 대치한다.
짐이 앤드류의 날개를 꺾으려 했다면, 플레쳐는 정반대로 날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이다. 앤드류의 욕망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그 욕망을 볼모로 잡아, 가학적인 조련을 하는데 그게 실제로 효과가 있다. 앤드류의 꿈에 보다 더 가깝게 만든다. 앤드류는 그 앞에 철저히 복종할 수밖에 없다. 그가 어린 시절 짐의 마음에 들기 위해 드럼을 치고 자랑했던 것처럼 그 앞에서 능력을 뽐내려고 한다.
한편, 그 가학적인 새아버지 덕에 앤드류 또한 서서히 변해 간다.
처음 니콜을 대할 때에도 앤드류는 나르시시즘적인 태도를 은근히 내비쳤으나, 그때는 이제 막 자신감이 붙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후반부 니콜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에서 앤드류는 더 이상 수동적이고 마조히즘적 인물이 아닌 것처럼 그려진다. 상대를 자신의 성공을 위한 걸림돌로 규정하고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내는데, 일방적인 가해처럼 보인다. (물론 그 스스로를 상처준 것이기도 하다.)
앤드류는 이제 양가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플레처 앞에서 복종함과 동시에 타자를 통제하고 우월감을 내비쳐 스스로를 더 나은 존재로 인식시키려는 태도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여러 도피에 대해 설명하면서, 권위주위에 대한 도피에서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설명한다. 프롬은 개인이 자기 자신의 독립성을 포기하고, 자기 외부의 어떤 사람이나 힘에 자기 자신을 융합시켜 버림으로써 자아의 무력감을 극복하려는 경향을 권위주의에 대한 도피라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다.
굴복을 통한 도피(M)는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권력이나 대상에 복종함으로써, 고립된 개인으로서의 책임과 불안을 지워버리려는 시도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거대한 힘의 일부일 뿐이라는 논리로 안도감을 얻는다.
지배를 통한 도피(S)는 타인을 지배하고 자기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무력감을 감추려는 시도다. 타인을 자신의 도구로 만듦으로써 확장된 자아를 느끼려 하지만, 사실은 지배할 대상이 없으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는 의존적 상태에 빠진다.
프롬의 설명에 따르면, 권력에 대한 집착과 굴복은 모두 고독이라는 공포에서 도망치기 위한 동일한 병적 증상의 다른 표현인 셈이다.
플레쳐와 앤드류,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교수와 학생이라는 지위뿐만 아니라, 밴드 내의 역학 관계에서도 성립한다. 드럼은 연주자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갖기 쉬운 포지션이지만, 결국 전체 앙상블에 필요한 바퀴 중 하나일 뿐이다. 결국 셋 리스트와 시작과 끝, 템포를 정하는 주도권은 플레쳐에게 있다. 플레쳐에게 있어서 연주자들은 자신의 음악적 비전을 완성하는 오토마톤에 가깝다.
플레쳐와 앤드류는 엔딩씬에서 비로소 기이한 합일을 이뤄낸다. 앤드류는 무대 위에서 플레쳐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수모를 겪는다. 무대 뒤로 나가 아버지 짐의 품에 안긴다. 그때 앤드류는 다시 무언가를 생각하고 뒤로 돌아간다. 왜 그는 짐을 안고 다시 무대로 돌아갔을까?
짐은 앞서 말했듯, 앤드류가 탈피하려던 현실이다. 욕망을 억누르는 세계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아닐까? 다시 무대로 돌아간 앤드류는 큐사인을 기다리는 복종적 존재가 아니다. 권력 구도를 전복시키면서, 두 사람의 합일이 시작된다.
플레쳐 역시 앤드류가 뿜어내는 연주에 동화되어 그의 심벌즈를 고쳐주고 템포를 지휘하기 시작한다. 이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경계가 무너진다. 앤드류는 스스로를 학대하는 동시에, 청중과 플레쳐를 자신의 리듬에 가두는 지배자가 되기로 한다.
그들이 마지막 순간 교환하는 눈빛과 미소는, 합일의 희열이다. 이 두 사람의 관계 사이에 놓여 있는 ‘카라반’이 그 극적인 합일을 더 역동적으로 만든다. '가학적 지배'와 '피가학적 복종'이 서로의 꼬리를 물며 완벽한 원을 그리는 공생의 순간이다. 그리고 이 광경을 문틈으로 지켜보는 짐이 있다. (많은 사람이 느꼈겠지만, 엔딩씬에는 플레쳐와 앤드류 사이의 성적인 메타포도 숨겨져 있다.)
플레쳐와 앤드류, 이 두 괴물의 기괴한 합일의 틈새로 재즈라는 매개체는 유려하게 미끄러져 들어가 그들의 뒤틀린 관계를 하나의 예술적 형태로 봉합한다.
이 모든 것을 시청각적으로 완벽하게 설계한 위플래쉬는 단순한 음악 영화를 넘어 인간의 광기와 예술의 본질을 꿰뚫는 시대의 고전으로 남기에 충분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