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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Jun 01. 2022

영화 경계선 리뷰, 해석

이 리뷰는 개인적 소감에 불과하며 언제든지 수정되거나 파기될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경계선의 시작은 주인공 티나가 스웨덴 항구 어딘가에 서서 육지 너머의 세계를 내다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항구엔 국경을 넘나드는 정박된 배와 자유롭게 비행하는 갈매기들이 있다. 그것들을 바라보던 티나는 문득 시선이 얕은 풀숲 속 벌레에게 향한다. 왜 하고 많은 것들 중 작은 벌레에 시선이 갔던 걸까? 그리고 벌레를 콕 집어 손에 들게 된 걸까? 티나는 벌레를 들고 바라보다 다시 자리로 돌려준다. 이 단순한 장면은 영화의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장면에 작은 상상력을 더해보자면 스웨덴 국경에서 세관원으로 일하는 티나는 매일 아침 차를 타고 항구에 도착해 같은 곳에 주차를 한다. 티나는 차에서 나와 바다와 정박된 배 그리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을 본다. 매번 그것들을 유심히 바라보진 않겠지만 티나의 반복되는 아침 풍경은 늘 같은 장면일 것이다. 티나는 일터로 향하면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을 검색하는 맡은 바의 일을 한다. 티나가 출근부터 퇴근까지 바라보는 것들은 '경계선(border)'을 넘어 다니는 것들이다.

 티나가 종일 보고 경험하는 외부세계뿐만 아니라 종일 갈등하고 경험하는 내부 세계들도 항상 경계선을 넘나들고 있다. 티나는 인간사회의 규범과 자신의 도덕적 윤리적 가치에 맞춰 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본능에 저항하고 있다. 티나는 벌레를 들어서 입에 가져다 넣어 보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앞서 말한 두 가지 이유를 풀어보자. 첫째로 현대인들은 그런 행동을 지양하고 혐오한다는 사회적인 행동양식과 시선이다. 두 번째로 생명을 해치는 일이 옳으냐? 에 대한 도덕적 가치 판단이다. 영화 후반부 티나는 완전히 트롤로써 정체성을 찾고 벌레들을 사냥하며 먹고 산다. 그러나 영화 초반에서의 티나는 다르다. 스스로를 인간으로 인지하고 있으며 현대인의 행동양식을 가진 티나에게 벌레를 입에 넣어서 먹어보는 일은 흥미에 의한 살생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능에 대한 억압과 제어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티나는 트롤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


*국경

 경계선에는 세 가지 상징이 있다. 첫째는 국경이다. 국가, 그러니까 조국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은 모두에게 다른 의미겠지만 우리는 국가와 자신을 떼어놓고 상상하기 어렵다. 지구 상의 문명화된 인간들은 거의 대부분 조국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으며 같은 언어와 문화권 속에 속하는 안정과 근대를 지나치며 교육받은 애국주의, 국가주의 사상은 나약한 개인들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아 때로는 유대의 의미로 때로는 광기로 사용되어 각 개인들이 국가에 충성할 수 있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소속감과 같은 감정의 실상은 인간 사회가 만들고 그 사회 스스로 약속한 고도로 발달된 행정 체계와 사법 체계라는 환상에 대한 것이다. 국가가 종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음이다. 대통령과 총리는 현대 사회의 제사장의 역할일 뿐이며 교리는 헌법으로 대체된 것이다. 현재 지구 상에는 수많은 국가들이 있으며 각 나라는 제각기 하나의 지도자를 가지며 하나의 헌법을 가진다. 그 헌법의 주석의 역할을 하는 법들은 각 나라에서 비슷한 듯 다르기도 하며 완전히 다르기도 하다.

 티나는 스웨덴의 국경에서 스웨덴의 법에 따라 입국자들의 소지물품을 검색한다. 대부분 각 국가마다 소지해서 안 되는 물품들은 거의 비슷하지만 그에 따른 처벌은 제각기 다르다. 티나가 처음에 술을 가방에 가득 담아 입국한 십 대 소년은 어쩌면 그 나이에 따라 스웨덴에서는 불법이지만 한국에서는 불법이 아닐 수도 있고 불법이더라도 그 처벌의 수위가 상당히 적을 수도 있다. 우리는 범죄자들이 각 나라별로 다른 법과 형벌에 의해 틈새를 파고들어 형을 면하거나 적게 받으려고 했던 일들을 종종 뉴스를 통해 접하기도 한다. 하물며 트롤인 보레에게는 당연히 인간들의 사법체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범죄자여서가 아니라 그는 그 사법체계에 동의한 적이 없는 트롤이기 때문일 것이다. (보레에게는 범죄라는 개념조차 없을 것이다.) 우리도 자주는 아니지만 그런 질문을 가끔 할 때가 있다. 내가 이 나라의 법에 동의한 적이 있었는가?라고 말이다. 경계선이 상징하는 첫 번째 의미인 국경부터 이 영화가 얼마나 위험한(논쟁적인) 영화인가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본능과 이성

 두 번째는 본능의 충동과 억압된 이성 사이의 선이다. 영화 속에서는 숲과 도시라는 이미지를 차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티나는 의도적으로 숲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인간 이웃도 있어 보이고 인간 남자 동거인인 롤란드도 있지만 티나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숲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발가벗고 수영도 하고 뛰어다녀도 되는 듯싶다.

 티나는 냄새로 인간들의 감정을 아주 세밀하게 알아채고 위험을 직감한다. 티나는 인간 집단에서 마치 잘 훈련된 사냥개의 역할을 한다. 개의 고도로 발달된 후각은 인간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 유전적 장점을 인간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용도로 활용한 것이며 이것이 개라는 종의 생존에 유리하게 됐다. 티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에서는 이것을 확실히 대비하여 보여주는데 롤란드의 개들이 티나를 향해 위협하는 장면이다. 아마도 과거 인간들이 트롤 사냥이 만연했던 시기에는 사냥개를 이용해 트롤들을 잡았을 것이고 그 훈련된 유전적 각인이 여전히 개들에게 남아있는 것 같다.

 티나는 마치 사냥개와 같은 예민한 후각 때문에 분명 본능의 충동질을 더 강렬하게 겪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세계의 틀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일을 잘 수행하는 것만 같아 보이는데 추측컨데 정말 긴 시간 동안 본능을 억압하는 훈련에 의해서 일 것이다. 본능에 대한 억압은 욕구에 대한 억압과 같은 말이다. 욕구를 억압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 개인은 거세당한 것처럼 자신의 욕구를 회피한다. 즉 티나는 사회적으로 거세된 인물이다. 이런 은유는 티나가 보레를 만나고 성관계를 하는 장면에서 나타난다. 티나와 보레의 성관계 장면은 의도적으로 인간의 남녀관계를 전복시킨 것처럼 표현된다. 하지만 여기서 티나 개인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동안 거세되어 사라졌던 티나의 성기(인간의 남경)가 자라나는 것처럼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티나 자기 삶의 전환점이 되며 자기 스스로를 알게 되고 본능에 이르러 구원을 얻게 되는 장면이다. 사회에 강요되고 억압되었던 성적 억압의 해방이다.


*섹스와 젠더 그리고 페티시

 위에서 연결되는 세 번째는 섹스와 젠더 그리고 페티시 사이의 경계선이다. 트롤들에게 부여된 성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젠더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페티시는 무엇일까? 성적인 흥분을 느끼는 것은 완전히 주관적인 영역이다. 각 개인은 다양한 페티시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페티시에 흥미를 가지는 것에 적극적이다. 페티시는 도착증이나 성애로까지 발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페티시는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는 본성인 걸까? 아니면 후천적인 영향인 걸까? 보레를 만나기 전까지 스스로를 기형으로 알았던 티나는 보레를 만나고 자신의 성애에 대해 알게 된다. 티나는 인간사회의 규범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롤란드라는 남성과 동거를 하고 있었지만 성적인 긴장감은 둘 사이에 전혀 없어 보였다. 이것은 티나의 잘못이 아닌 단순히 인간에게 성적인 흥분을 느끼지 못했던 탓이다. 우리는 여전히 성적 지향과 페티시 모두 그 원인에 대해 정확히 규명하지 못한다. 영화는 트롤들을 대신해서 말해주는 것만 같다. 성애는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서 사회적인 교육에 의해 바뀔 수 없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티나는 소아성애자들의 불법적인 행위를 추적한다. 영화 속 이야기의 설명방식에 의거한다면 소아성애 역시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성적 지향과 성애, 페티시의 경계선은 어디에 놓아져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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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나는 결국 자신의 본성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결심했을 것이다. 박스 속 트롤 아기와 함께 동봉된 핀란드로의 초대장은 트롤의 고향, 트롤 문명의 시작점으로의 초대일 것이다. 자기 종에 대한 질문은 각 개인의 삶에 점으로 펼쳐진 문제들을 해결해주기도 한다. 지금까지 인간사회는 그런 식으로 발전해왔고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은 종의 미스터리를 해결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현대는 많은 소수의 약자들을 사회 내부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영화 경계선은 파문을 일으키는 영화가 되기에 충분하다. 두 트롤의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이면서 동시에 파격적이고 논쟁적이다. 어쩌면 다양성을 피력하면서 다양성의 정당성에 대해 자기 스스로 돌을 던지고 있기에 그 위치가 모호해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이미지의 마술과 뛰어난 이야기의 상상력의 결합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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