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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Jun 05. 2022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 리뷰, 해석

이 리뷰는 개인적 소감에 불과하며 언제든지 수정되거나 파기될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가 좋은 영화인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엔 영화 속에 사용되는 예술적이고 영화적인 문법과 세 가지 이야기를 아주 짜임새 있게 끼워 맞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각본가로서 지닌 기술적 능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장 뛰어난 영화적 성취는 바로 관객의 마음속 깊숙한 곳의 어딘가를 건들고 있으며 그것이 관객을 치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상 매체 스스로 역동하는 힘인 그러니까 훌륭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뒤섞었을 때 나타는 그 힘 말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용하고 있기에 이 영화는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었다.


*비극과 주인공

삶을 살아가면서 겪는 비극은 당연하지만 피해 당사자에게는 전혀 의도가 없는 일들이다. 누가 고의로 비극을 향해 치닫는가? 스스로를 고난과 슬픔 속으로 밀어 넣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마치 한 번도 대비하지 못한 자연재해와 같은 비극에는 의도와 이유가 없다. 전통적인 이야기 속의 비극을 겪은 주인공들은 통과의례의 시간을 가진다. 자신의 비극을 감내하거나 이겨내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를 더욱 강한 시련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서 깨달음을 얻고 정화를 얻는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이런 클리셰에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왜 가만히 있어도 얻는 자연재해와 같은 깨달음과 정화는 없는가?'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비극을 겪은 주인공 가후쿠의 힐링 로드 트립 무비이다. 하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어떠한 고군분투, 정확히 말하자면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감독은 비극을 겪은 인물의 정화의 의지를 과감하게 삭제한다. 가후쿠는 내가 비극을 겪었으니 새 출발을 해야겠다 혹은 나를 돌봐야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없는 인물이다. 심지어는 그의 운전대까지 다른 인물에게 빼앗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가후쿠에게 자연재해와 같은 비극을 배치하고 자연재해와 같은 정화를 겪도록 만들었다. 아내를 잃는 비극을 겪은 가후쿠에게 깨달음과 정화를 뒷좌석에 앉아 체험하도록 명령한다.


*영화의 오프닝(비극)이 가지는 의미

드라이브 마이 카의 오프닝은 마치 소설의 프롤로그와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마치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듯한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가후쿠라는 인물의 비극에 집중하고 있다. 사실 영화의 오프닝은 보지 않아도 될 만큼 후반부에 그 내용이 모두 충분히 가후쿠 혹은 그 주변 인물들에 의해 설명된다. (유일하게 오프닝을 보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는 여고생 이야기일 뿐이다. 그마저도 그 이야기의 의도를 다카츠키가 앞에서 얘기한다.) 굳이 따지자면 이후의 이야기들은 모두 오프닝의 주석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필요 없는 장면인가? 아니다. 아내 오토와 가후쿠 사이에서 낳게 되는 미스터리한 여고생 이야기가 가지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도 분명 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자연재해와 같은 비극을 설명하는데 아주 긴 시간을 투자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오프닝 이후 가후쿠가 자신의 슬픔과 고난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삶의 의의, 존재의 목적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었다면 대사로 처리하고 생략해도 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가후쿠는 운전대를 빼앗긴 채 뒷좌석에 앉아 있는 인물이다. 즉 가후쿠에게 비극을 겪을 의지가 없었던 것처럼 정화와 깨달음을 겪을 의지가 없는 것을 서로 대치가 되도록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봐야 하는 게 맞다.


여고생 이야기는 오토와 가후쿠 두 사람 사이의 비극이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대해 문학적인 방법으로 풀이한 것이다. 그 은유를 만약 풀어본다면 이렇다.

여고생이 짝사랑하는 남자 야마가는 당연히 가후쿠이다. 어머니의 강한 통제를 받는 야마가의 방안은 가후쿠의 내면이다.

그 방 안에서 은밀한 행위를 하는 여고생은 오토 자신이다. 여고생은 야마가의 가장 은밀한 곳인 방 안 즉 내면에 침입하고자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내면의 깊숙한 곳까지 알고 싶어 하는 그녀의 욕망은 무단침입이라는 부도덕한 일로 표현된다. 아내 스스로가 자신의 욕구를 부도덕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그 욕구의 주인인 스스로도 부도덕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 여고생의 전생이 칠성장어라는 비유가 더 정확히 설명해준다. 칠성장어는 거머리처럼 다른 물고기의 피부에 붙어 기생하며 살아가는 생물이다.

 여고생은 집에 잠입할 때 문 앞 화분에 열쇠가 있으리라 스스로 짐작하고 문을 연다. 야마가라는 인물의 내면에 잠입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말해준다. 하지만 그 내면이 어머니의 강한 통제를 받고 있기에 표면적이라는 사실도 내포하고 있다.

여고생이 처음엔 자위를 참으며 해도 되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그녀에게도 규칙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야마가의 방이 야마가의 어머니에 의해 통제된 규칙 세계인 것처럼 (야마가의 통제된 내면 세계인 것처럼.) 그녀 자신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규칙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의 탐폰을 야마가의 책상 서랍에 두는 이유. 탐폰은 말 그대로 징표다. 야마가의 내면세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야마가의 발견이 아닌 그의 어머니의 발견을 먼저 언급하는 건 왜일까? 어머니의 존재를 자신으로 극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즉 이미 견고한 규칙 세계에 금이 가고 자신으로부터 그 세계가 다시 정립되었으면 하는 심리이다.

야마가의 방에선 사라져도 모를 것들을 가져가면서 자신의 징표는 점점 대담하게 남기는 그녀의 이유. 타인의 내면에 들어서서 자신의 흔적을 강하게 남기고 싶으면서도 그녀 자신의 내면 속 부도덕한 욕망들은 또 들키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

야마가의 방에서 자위를 하는 중 또 다른 침입자, 빈집털이가 등장해서 그녀를 강간하려는 이야기의 의미. 또 다른 침입자는 여고생 그녀 자신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신일 가능성이 높다. 칠성장어가 다른 물고기에 기생한다는 점에서 빈집털이 역시 그녀의 일부일 것이다. 자신을 강간하려는 빈집털이범을 살해 후 유유히 떠나지만 감시카메라만 생기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는 카메라를 똑바로 보고 '내가 죽였다'라고 발음한다. 이것은 그녀는 자신의 부도덕한 욕망과 죄책감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딸아이를 잃은 것에 대한 죄책감에도 해당한다. 어떻게든 내면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아내가 섹스를 한 후에 이야기를 낳는 이유. 딸을 잃은 이후 둘 사이는 아무래도 어떤 균열이 생긴 것 같다. 딸과 아내 그리고 이야기는 동일시된다. 아내는 오르가즘의 끝에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편과 구조적으로 연결됨과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녀는 그런 상태가 되면 취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낳는다. 딸은 독립적으로 하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동시에 아내가 있어야 만들어지기에 아내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상태에서 좋은 글이 나온다는 것은 아내 오토가 남편 가후쿠와의 연결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어떤 균열이 있었던 듯하다. 이 균열은 아무래도 '상처'에 대해 공론화하지 않았던 것, 즉 두 사람 사이의 단절을 의미한다.


*가후쿠(하마구치 류스케)의 연출법(연기론)의 의미.

영화에는 두 개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와 바냐 아저씨가 연출된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바냐 아저씨는 모두 오프닝에서 가후쿠가 이미 극을 완성한 시점으로 한 번씩 연출되는데 아내를 잃기 전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기하고 이후에 아내를 잃고 장례식 후 바냐 아저씨를 연기한다. 가후쿠는 각 극에서 블라디미르 공과 바냐를 연기한다. 이후 히로시마 연극제에서는 다시 바냐 아저씨를 연출하게 된다.

 가후쿠가 두 작품 모두에서 고수하는 연출 방식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 두 작품에서 가후쿠의 연출 의도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가후쿠의 연출법이 어떤 결과를 낳겠는가? 에 대해 고민해볼 수는 있다.

 무대 위에서 서로 상이한 언어를 쓰는 배우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대를 설득시키기 위해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게 만들기 위해 매번 꺼내는 자신의 대사는 감정과 목소리는 더욱 진실되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의 대사를 더 잘 듣기 위해 상대의 표정과 몸짓, 눈빛 하나의 미세함에 자신의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이것은 무대 위에서 기계적인 연기를 줄이고 '살아 있음'을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즉 말로 내뱉어지는 대사 그 이상의 무언가를 무대 위의 인물들이 공유하도록 만드는 것이며 그 자신들 스스로도 새로운 감정적 경험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런 연출적인 의도를 가진 연출법은 사실 부조리극 장르인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어떻게 보면 그 기능적은 측면(언어가 달라서 생기는 부조리함)에서 맞다고는 볼 수 있지만 의도적인 측면(원래 가지는 의미)에서는 조금 다르다고도 볼 수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원래 각 인물들의 대화가 서로 맞물리지 않고 미끄러지는 작품으로 부조리극 장르의 대표 격이다. 그래서 다른 언어를 이용하는 연출 방식은 원작에 충실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위에서 설명한 각 배우들의 새로운 경험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원래 고도를 기다리며는 대사들이 <밥 먹었어? / 창세기 1장 1절 빛이 있으라> 이런 식이기에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바냐 아저씨와 같은 생활극은 해당 연출 방식이 기대하는 대로 각 인물들(배우들)이 살아 있음을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 히로시마 연극제에서 가후쿠는 바냐 아저씨를 연출할 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서 리허설에서 배우들의 감정을 배제하고자 한다. 대본을 리딩 하는 과정에서 배우의 감정을 제거하고 천천히 대사를 또박또박 읽는 식의 연습의 방법은 배우 지망생들이라면 이미 익히 알고 있을 방법론이다. 이 방법론의 의의 역시 배우들이 기계적이고 답습적으로 연기하는 것을 막아주는 데에 있다. 현실을 살아갈 때 우리는 매 순간을 처음 맞이한다. 연기는 이 처음을 재연하는 일이고 이 방식은 각 배우들을 무대 위에서 처음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언어의 회의적인 기능에 대한 가후쿠의 믿음은 오프닝에서 아내 오토와의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 셈이 되었다. 오프닝에서 오토의 여러 가지 행동을 잘 관찰해보면 오토가 의도적으로 가후쿠를 자극하고 있지만 가후쿠는 극단적으로 대화를 회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토가 내연남 다카츠키를 소개하는 것 역시 가후쿠를 자극하기 위함이며 가후쿠가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참을 수가 없는 게 하나 있다.'라는 대사를 할 때 오토의 기대감의 표정은 가후쿠가 입 밖으로 뭔가를 꺼내길 바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아내는 대화를 원하지만 가후쿠는 직접적으로 회피한다.

 하지만 가후쿠는 히로시마 연극제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고 이때에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치유를 받는다. 이런 설정은 그가 대화를 회피한 것은 그 스스로 고통받을 일이긴 하지만 전적으로 그의 잘못이 아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만의 방법론이 있고 그에 의해 비극을 겪는지 정화를 겪는지는 아예 다른 이야기이다. 이 맥락은 다양하고 복잡하게 읽힐 수 있는 체홉의 희곡들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미사키

영화의 종반부 소냐의 독백이 끝난 후 가후쿠는 눈물을 흘리고 암전 된다. 그리고 곧 한국에서 생활하는 미사키에게로 컷은 넘어간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가후쿠의 힐링 로드 트립 무비이지만 '그래서 가후쿠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식의 결말이 아니다. 알 수 있는 것은 이후에 미사키가 한국에서 가후쿠의 차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미사키일까?라는 질문이 든다. 미사키는 가후쿠의 운전대를 붙잡은 사람이다. 가후쿠를 정화의 길로 인도하는 역을 하는 인물이자 그의 시간들을 목격하는 관객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는 영화 종반부 바냐 아저씨의 극에서 관객으로서 참여하고 그것들을 지켜보고 있다. 정리하자면 미사키는 가후쿠의 정화의 시간을 관찰하는 관찰자이자 인도자이다. 가후쿠의 이야기는 미사키 없이는 절대 완성되지 않는다. 그녀는 가후쿠의 시간을 담담히 지켜본 후 극장을 떠나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또 다른 인물로서 살아간다. 영화의 흐름상 사실 가후쿠의 모든 이야기는 미사키를 위해 준비된 이야기였다고 볼 수도 있다.

 미사키 역시 비극을 겪었기에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것이 가후쿠의 정화에 상당한 도움을 주기도 한다. 관객이자 인도자인 미사키와 비극의 주인공인 가후쿠는 서로 상호작용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정화된다. 이 영화가 가진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각 개인은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 속의 주인공으로 살아간다. 관객들은 영화를 본 뒤 극장을 나서면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와 견주어 보고 상호작용한다. 그리고 때론 공감하고 때론 정화의 시간을 겪기도 한다. 모든 관객들은 미사키처럼 이야기의 관찰자이자 인도자이다. 이야기와 관객은 불가분 관계여서 관객이 없는 이야기는 완성되지 않으며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드라이브 마이 카의 엔딩에는 운전대를 잡고 일상을 살아가는 미사키만이 홀로 등장한다. 이제 영화를 보고 난 뒤 자신의 삶을 살아갈 당신과 같은 존재이기에.


한줄평: 모든 이야기는 애초에 당신을 향해 존재했음을 그리고 그 이야기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당신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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