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는 개인적 소감에 불과하며 언제든지 수정되거나 파기될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소리도 없이'라는 영화의 제목엔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 있다.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범죄들이 우리의 삶에 소리도 없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의미일까? 글쎄 그런 잔인한 범죄들은 생각보다 우리 삶에 가까이 있다. 만약 다수의 아동을 납치하여 인신매매하는 조직이 국내에 있다면 다음 날 아니 언젠가라도 네이버 뉴스 메인에 대문짝만 하게 걸려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알고 싶지 않아도 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범죄 소식들을 듣거나 본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것들을 찾아서 볼 정도다. 가끔 대중들은 그런 일에 열광한다 싶을 정도로. 그럼 그게 아니라면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정말 이 세계에 '소리도 없이' 벌어지고 있는 일은 무엇일까?
*성실한 땀방울 내일의 미소
영화의 오프닝은 성실한 두 남성 태인과 창복의 하루 일과로 시작된다. 둘은 계란을 팔다가 이동하고 옷을 갈아입고 시신을 유기한다. 창복과 태인은 꽤 유능한 청소부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어른들은 모두 태인과 창복처럼 자기 일에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프로들이다. 이들은 모두 조직화되어 있고 모두가 제 역할을 하여 맞물리는 톱니처럼 움직인다. 누군가는 아이를 납치해오고 누군가는 아이를 약속시간에 맞춰 이동시키고 누군가는 아이를 매매한다. 그들이 하는 행위가 범죄라는 것을 제외하면 이것은 평범한 상품의 유통과정과 일치한다. 이들을 하나의 유기체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통하는 노동은 곧 재화라는 약속 때문이다. 이 소리도 없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칙은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의 더 나은 내일의 삶을 꿈꾸게 만든다. 노동은 인간의 삶에서 많은 것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는 것 역시 노동이다. 사회 속에서 우린 '잉여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가? 사회에 나가 회사에 들어간 뒤에도 우리는 동료와 고용주에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괴로워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이처럼 자신의 쓸모와 가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동이다.
*아동의 상품화
태인과 창복이 얼떨결에 떠맡게 된 초희는 상품성이 떨어지는 상품이다. 원래 삼대독자 중 아들을 납치하려다가 일이 잘못되어 딸인 초희를 납치하게 됐는데 초희의 부모는 계속해서 초희의 몸값을 협상한다. 이후 후반부 인신매매범들에게도 초희는 나이 때문에 가격이 후려쳐지는 등 떨어지는 상품성에 의해 계속 곤욕을 겪는다.
과거 아동인권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을 때엔 아동들 역시 노동을 해야 했다. 많은 우화 속에서 어린아이들이 계모와 계부에 의해 집안일과 노동을 하는 등 어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이야기들이 등장하기도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과거 아이들은 단순히 가정에서 소비의 역할만 담당하는 것이 아닌 생산의 역할 또한 담당해야 했다. 다르게 보자면 아동들 역시 노동의 한축을 담당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아동을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고 단순히 아동들을 도구로 취급했을 뿐이다. 영화 속에서는 태인을 내세워 도구화된 아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당연 태인이다. 영화 속에서 자세히 그려지지는 않지만 창복이 태인이 꼬마일 때부터 데려다가 입히고 먹이고 그리고 일자리까지 내줬다고 한다. 창복은 다른 인물들에 의해 꼬박꼬박 부장님이라고 불리지만 태인은 계속해서 하대 당하고 어른으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태인은 초희와 같이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그러면서도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약자의 상태에 놓여 있다. 태인의 집은 이렇다 할 규칙이 없는 세계다. 가족을 상징하는 밥상의 다리는 부러져 있고 빨래며 쓰레기며 방 안에 전부 널브러져 있고 씻는 것도 먹는 것도 전부 대충이다. 그런 와중에 초희가 등장해 집 안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고 규칙을 만든다. 그리고 부러진 밥상 다리까지 대체한다. 태인은 어린 초희가 부모의 역할인 규칙 세계를 담당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쓰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초희는 단순히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홍의정 감독은 소리도 없이의 이야기를 별주부전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했다. 토끼가 자기의 쓸모를 가지고 꾀를 내어 자라를 속여 목숨을 부지한 이야기에서 감독은 자라의 이야기에 더 비중을 두고 다루기로 한 듯 보인다. 자라 역시 용왕의 생명연장을 위한 도구였고 현재의 아동은 결국 이 사회의 수명연장을 위한 도구로써 키워지고 있다.
*아동으로 살아가는 것은 장애인가?
감독은 태인에게 교육의 기회, 부모로부터 무조건적 사랑을 받을 기회를 뺏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말할 기회, 즉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 기회까지 빼앗았다. 언어적 기능을 상실하고 몸부림과 눈으로만 대화해야 하는 태인은 거절할 기회와 타인의 욕구를 소유할 기회조차 없어진다. 이것은 사회가 아동을 바라보는 시선과 연결된다. 아동의 욕구는 현대에 이르기 전까지 무시되어 왔다. 현대인들은 아동의 복지와 인권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지만 이전 산업시대까지만 해도 아동의 욕구는 과감히 무시되는 것들이었다. 감독이 아동을 상품화한 것처럼 아동은 상품, 혹은 상품 생산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으며 당당하게 자신의 욕구를 주장하는 것은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감독은 태인에게 더욱 가혹한 설정을 부과하면서까지 아동으로써의 삶이 장애에 가깝다는 것을 설명하려 한다. 초희와 태인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고 계속해서 어른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태인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한계를 경험해야 하고 결국 초희도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두 인물이 후반부에 경찰 사건에서 연대하는 것은 두 인물이 앞서 말한 점들로 인해 유대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인과 초희는 비슷한 처지에 있기에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유대하게 된다. 초희가 비닐하우스 앞에서 태인과 같이 박수를 치며 기다리는 것 등의 모습이 설명한다. 그리고 엔딩은 마치 태인이 행복했던 순간을 그리는 것처럼 표현됐는데 이것은 태인이 초희로 인해 가족애를 경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인은 초희로 인해 무너졌던 (아니면 애초에 비어있던) 가족관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태인에게 초희는 그런 의미에서 구원자의 의미에 가깝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결말)
영화 속의 어른들은 모두 성실한 일꾼이지만서도 어딘가 허술한 인물들로 그려진다. 그들은 영화나 이야기 속의 악당들처럼 치밀하거나 계획적이지 않고 허둥거리고 넘어지고 황당한 일로 목숨을 잃거나 한다. 경찰과 같은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인물들도 어딘가 허술하게 그려진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은 아동의 시기를 겪었다. 부처와 예수도 요람에서 태어나 무덤으로 향했다. 우리가 아동을 이해하는 데에 TV 프로그램과 미디어가 필요했던 것 그리고 그 대부분의 잘못이 부모(어른)에게 있는 것에 대해 무지했던 것 등은 사회가 가진 문제점이지 단순히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어른들이 오은영 박사의 상담과 문제 해결을 보며 자신의 트라우마와 문제에 대한 정화를 체험한다. 금쪽 상담소는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정신은 아동기에 남아 있는 어른이들에게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한편으로는 아동에 대해 여전히 폭력적인 행태를 보인다. 아동, 청소년들을 무시하는 밈과 어투들은 사회 곳곳에서 만연하게 사용된다.
태인은 자신이 있어야 할 시기에는 있지 못했던 학교로 초희의 손을 잡고 돌아간다. 초희의 손을 잡고 학교로 돌아간 태인의 모습은 더 이상 아동의 모습이 아니기에 그리고 태인에게 그곳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기에 돌아갈 수 없다. 사회로 돌아간 둘의 유대는 사라지고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인지하게 된다. 초희는 태인을 유괴범이라 말하고 태인은 자신이 돌아온 길을 뒤따라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향한다.
한줄평: 우린 모두 이 사회의 금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