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훈 Aug 02. 2022

영화 큐어 리뷰, 해석

이 리뷰는 개인적 소감에 불과하며 언제든지 수정되거나 파기될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푸른 수염

샤를 페로의 푸른 수염은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이지만 그 내용은 동화라고 보기 어렵다. 푸른수염 이야기가 어째서 민담에서 '동화'가 되어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큐어에서 이 이야기를 영화의 가장 전면, 즉 오프닝에 내세웠다는 점을 해석해보자.

 옛날 어느 숲 속에 한 남자와 예쁜 딸이 살았다. 어느 날 황금마차가 집 앞에 서더니 늠름한 왕이 내렸다. 왕은 딸을 달라고 남자에게 요청했다. 남자는 기뻐하며 결혼을 승낙했다. 사위가 될 왕은 푸른 수염이 있다는 것만을 빼면 흠잡을 게 없는 사나이였다. (여기까지만 영화에서 설명된다.) 특이한 푸른 수염이 자라는 이 왕은 결혼을 한 뒤 항상 아내들이 실종된다. 푸른 수염은 새 아내에게 자기 성의 열쇠를 쥐어주고 이 성 안의 모든 문은 열어도 되지만 지하실 구석의 작은 방문 하나는 열지 말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아내는 이 방을 열게 되고 그 안에 지금껏 실종된 여성들의 시체가 쌓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푸른 수염은 아내가 금기를 깼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내 역시 살해하려 한다. 하지만 아내는 꾀를 내어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는다.

 영화 오프닝에서 후미에는 딸이 푸른 수염을 살해 한다고 말하지만 현재의 동화에서는 딸의 형제들에 의해 푸른 수염이 도망친 것으로 표현된다. 이후  영화의  오프닝 스코어가 들리고 영화   살인을 목격하게 된다. 영화  푸른 수염 이야기에 주목할 만한 것은  가지가 있다. 이야기의 시점이  속에 사는 남자와 딸을 중심으로 시작된다는 것과 딸이 푸른 수염을 살해한다는 . 평화롭게  속에 살던  사람에게 연쇄살인범이 찾아오고 (후미에의 입을 빌리면)   역시 살인자가 된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하겠으나 나는 결국 큐어라는 영화가 여기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후미에

이 영화에서 가장 잊히기 쉬운 등장인물은 후미에다. 후미에는 오프닝을 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았음에도 영화 속에서 쉽게 사라지게 된다. 다카베 중심의 이야기에서 그녀의 등장은 다카베에 의해 드물게 비칠 뿐이다. 그녀가 어떤 이유에서 어떤 사건에 의해서 정신병을 앓게 되었고 또 정확히 어떤 병명을 앓고 있는지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의사 같지 않은 의사와 상담 세션을 진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멀리 상상력을 뻗어보자. 다카베는 과연 진정으로 그녀를 위하고 있는가? 그녀의 상태가 나아지길 기대하고 있는가? 사쿠마의 추천으로 보낸 병원이지만 그녀는 점차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 계속해서 빈 세탁기를 돌리고 식탁 위에 다카베를 위해 생고기를 준비하고 자주 길을 잃고 헤매는 행동들은 그녀에게 차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전의 상태에 비해 그녀가 나아지고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사실 다카베의 성에는 차지 않는 일이었다. 다카베가 후미에를 정말로 성가셔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연출로 알 수 있다. 그래서 다카베는 그녀가 진심으로 더 나아지길 기대하지 않고 있다. 후미에가 자꾸만 길을 잃는 것은 다카베의 의식 속에 그녀가 '잊혀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후미에는 다카베에게 있어서 불안과 스트레스이다. 마미야의 은거지에서 나와 차에 탄 후 아내에 대한 끔찍한 상상을 문득 떠올리는 장면은 다카베에 후미에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바로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를 본 후의 관객들에게도 후미에는 잊히기 쉬운 존재이다. 후미에와 관련된 질문은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다카베가 그녀를 죽인 거야 뭐야?' 영화 전체가 다카베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풀이되고 있기에 관객 역시도 후미에라는 인물의 서사에는 전혀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가 결국 후반부 후미에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켜버리는 것처럼 후미에는 격리의 대상, 보살핌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마미야

큐어의 주된 이야기는 마미야라는 인물을 추적하는 것이다. 큐어를 정말 간단한 하나의 문장으로 줄인다면 다카베는 마미야가 누구인지 알기 원한다. 가 된다. 그러나 마미야는 무언가(욕망, 열정, 의미, 분노 등)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도구(사물)이기에 그를 추적할수록 다카베는 자신과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세계에는 사물을 이용하는 인간만이 있을 뿐이고 사물을 마주하는 인간은 없다. 다카베는 결국 마미야라는 인간을 도구처럼 취급하고 손에 쥐고 그의 목숨까지 흔들고 결국 앗아간다. 다카베 그 자신이 혐오했던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도구화시키는 그 행위 자체를 결국 자기 손으로 실현한 것이다.

 마미야는 살인을 종용했는가? 마미야가 사용하는 최면술은 나가서 살인을 저질러라 목에서 가슴까지 X를 그어라는 식의 방식이 아니다. 개인의 내면에 파고들어 자기 자신에게 짐이 되는 즉, 개인으로써 장애가 되는 것들을 지워내도록 만든다. 이전부터 있어왔던 이 최면술은 사람들의 내면 속에 들어가 방아쇠를 당기게 만드는 역할을 했을 뿐 살인의 직접적인 계획을 만들지 않았다. 진정한 개인, '나'는 누구인가?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의 끝에 내가 아닌 모든 것을 제거한다는 결론에 다른 것이 메스머 최면술의 방식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나 자신까지도 제거하는 것 이것이 바로 큐어, 치료제인 것이다. 바로 이 최종 세션에 다른 인물은 영화 속에서 사쿠마, 마미야, 다카 베이다. 최종 세션에 이르게 되면 오래된 병원 혹은 공장 같은 곳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을 본 인물들은 사쿠마, 마미야, 다카베 이렇게 세 명이다. 세 인물 모두 이 최종 세션에 도달한 이후 스스로를 제거하게 된다. 마미야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잃고 사쿠마는 스스로를 제거하고 다카베는 모든 것을 잊고 해방이라도 된 듯 살아간다.


*다카베

다카베에게는 두 개의 장애물이 있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아내, 그리고 매일 끔찍한 범죄와 부딪히면서도 제정신을 유지해야 하는 형사라는 직업. 다카베는 두 개의 장애에서 계속 불안과 스트레스를 얻는다. 마미야를 취조하고 집에 귀가했지만 아내가 없는 것을 보고 그는 황급히 뛰쳐나간다. 단순히 편의점에 갔다가 길을 잃었던 아내를 다행히 찾고 아내는 다카베에게 당신이 지쳤다는 말은 건넨다. 여행은 안 가도 좋다는 그녀를 다카베는 위로한다. 그런데 정확히는 아내를 향한 불안과 스트레스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아내를 사랑한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다카베는 후에 이 불안과 스트레스를 겪지 않으려면 아내라는 '객체'를 제거해야 한다.라는 끔찍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아내가 자살했을 거라는 순간적인 망상에 휩싸여 집에 도착한 다카베는 목을 맨 아내의 모습을 보며 절규하지만 그것은 다카베 내면에 숨겨져 있던 불안과 스트레스가 부표처럼 표면 위로 튀어 오른 일이었다. 영화 초반부의 초등교사와 다카베의 공통점은 사랑하는 사람을 살해했다 혹은 살해하고 싶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불안과 스트레스를 겪는다. 마미야(얼굴 없는 남자, 메스머)는 이것마저도 제거하라고 종용한다. 큐어에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이 존재한다. 영화 후반부 사진으로 등장하는 얼굴 없는 남자는 극단적 미니멀리즘을 증명한다. 감정의 미니멀리즘, 최소의 감정을 위해 눈, 코, 입을 완전히 지워버린다. (여기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떠오르기도 한다.) 눈코 입의 제거는 그나마 남아 있던 인간성의 완벽한 제거를 의미한다. 마치 그림자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림자에게는 그 어떤 인간성도 남아 있지 않다. 다카베는 마미야를 추적하고 취조하면서 계속 그림자에 잠식당한다. 영화 속에서 그가 마미야를 취조할수록 어둠 속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다카베는 정신병원에 감금된 마미야를 찾아가고 마미야는 결국 방아쇠를 당기게 만든다. 다카베는 사회적으로 거세되었던 감정을 폭발시킨다. 이번엔 네 차례라며 라이터의 불을 키는 다카베, 그러나 반대로 마미야의 덫에 걸린다. 이후 다카베는 마미야처럼 얼굴 없는 남자가 된다.


*큐어

앞서 말한 것처럼 큐어에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이 존재한다. 더 이상의 팽창이 거부될 때 인간은 축소된다. 큐어에서 물은 꽤 중요한 메타포로 사용된다. 현실에서도 수위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여럿 은유로 사용되는 것처럼 큐어에서 물의 수위는 다카베의 감정상태가 임계점이 이르렀다.라는 은유가 된다. 마미야는 그 컵에 힘을 주지 않고 살짝 밀어 물이 흐르도록 즉, 자연 상태로 물이 흐르고 낙하하도록 만드는 전도사의 역할을 한다. 다카베의 수위가 가득 찬 것을 보여주는 아내와의 수변공원 씬은 정신병원에 감금된 마미야와의 대화 씬으로 인해 완성된다. 임계점에 이른 다카베의 정신에 몇 방울의 빗물이 떨어지자 이제 그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마미야는 가득 찬 다카베라는 컵을 손 끝으로 살짝 미는 것 만으로 넘어지게 만들고 그를 빈 컵으로 만들게 되는 셈이다. 영화는 이것을 '큐어' 치유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엔딩씬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다카베가 치유된 것은 확실하다. 후미에는 다카베의 사주를 받은 간호사에 의해 죽었을까? 식당 종업원은 왜 칼을 들었을까? 만약 둘 다 다카베의 사주가 아니라면? 아마 사회 전반에 치유의 물결이 일어났기 때문일 테다. 마미야의 등장 이전부터 X자로 목이 그어지는 살인이 두 건 더 있었다. 마미야 같은 전도사가 하나가 아닐 가능성은 있을까? 영화가 끝난 후 엔딩크레딧이 올라오는 평범한 도시의 풍경과 도심의 소리는 영화관 밖을 나가는 관객의 심리에 상당한 울림을 만든다. 큐어가 공포물인 이유는 그 어떤 잔인한 표현이나 심리적 압박을 만드는 씬을 통해서가 아닌 '일상'으로 회귀하는 관객들에게 강물만큼 차오른 분노와 불안을 제대로 상기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일 테다. 큐어 속에서 불안과 분노를 증폭시키는 소음들이 우리 일상의 평범한 소음임을 다시 생각해보면 이것은 소름 끼치는 역전이 된다.


한줄평: 일상의 불안과 분노를 놀랍도록 섬세하고 아름다운 영상언어로 구현한 구로사와 기요시.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소리도 없이 리뷰, 해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