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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영신 Jan 24. 2019

[이전글] 한겨레의 ‘사스마와리’에 반대합니다

<미스핏츠>, 2015년 6월 11일 게재.


네 눈에 티끌, 내 눈에 들보


경종을 울리는 기사였습니다. <한겨레21> 1064호 커버스토리 ‘저널리즘 없는 저널리스트의 탄생’은 ‘기레기’가 그득한 한국 언론의 문제점을 낳은 원인 중 하나로 ‘공채 제도’를 꼽았습니다. ‘아랑카페-스터디(학원)-인턴십-도제식 수습’으로 획일화된 기자 선발 및 교육제도 때문에 저널리즘 정신을 제대로 배우지도, 구현하지도 못하는 기자가 붕어빵 찍어내듯 길러진다는 지적입니다. 한국 언론의 모래알처럼 많은 문제점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를 잘 짚어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사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저널리즘 정신이 거세된 언론에 대해 ‘언론사의 책임’과 ‘언론사 밖 책임’ 중 후자를 드러내는 데 더 치중하고, 막상 언론사 자체의 들보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사는 기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언론사 입사 전-입사 후’ 단계 중 ‘입사 전’ 단계의 문제점(언론고시)을 지적하고 대안 역시 입사 전 단계(저널리즘스쿨)에서 찾고 있습니다.


수습기자: 나.돈다.경찰서.


그러나 저는 한국 언론에서 기레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오히려 ‘입사 후’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사스마와리1)’를 통해서입니다.


별 볼일 없는 존재로……


<한겨레21> 커버스토리 인터뷰이들도 같은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이봉수 원장은 “저널리즘의 기본도 배우지 않은 이들이 언론사에 입사해 선배들의 잘못된 보도 관행과 문장, 심지어 가치관까지 닮아가는 게 문제다”라고 말합니다.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 역시 “우리 언론은 굉장히 우수한 인력들을 1~2년씩 재수시켜 뽑아놓고는 다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고 전합니다.


저는 바로 이런 말들에 주목합니다. ‘언론사에 입사해 선배들의 잘못된 보도 관행과 문장, 심지어 가치관까지 닮아가는 게 문제’, ‘다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진짜 문제는 기자를 ‘어떻게 뽑느냐’ 보다는 ‘어떻게 교육시키느냐(만들어 가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물어보겠습니다. <한겨레>는 만약 저널리즘스쿨에서 잘 교육받은 최우수 학생을 추천받아 채용한다면, 그 신입기자를 이전과 다르게 보다 혁신적이고 창의적이고 저널리즘 정신이 충만한 ‘신인류’ 기자로 키워낼 자신 있습니까? 지금 하고 있는 그 방식으로?


퇴화의 시작, 사스마와리


<한겨레21>은 커버스토리에서 입사 후 수습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비인간적인 수습 거쳐”, “수습 교육은 OJT(직장 내 교육) 방식으로 이뤄진다. 연차 낮은 사회부 경찰 출입 기자가 일대일 도제식으로 취재 방법과 기사 작성법을 가르친다”고 서술하는 정도로 그칩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 언론의 수습기자 교육 방식인 사스마와리야말로 기레기 양산의 핵심 절차이며, 그러므로 이 과정은 기사에서 묘사된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심각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스마와리를 반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스마와리는 ‘반인권적’입니다.


SBS 드라마 <피노키오>중 캡쳐


사스마와리는 일본어 ‘사츠마와리(察巡)’에서 파생된 말로 수습기자가 1~4개월가량 경찰서 등을 돌며 사건을 찾고 취재 훈련을 받는 한국 언론 특유의 교육제도입니다. 문제는 이 기간 동안 수습기자들은 사람 아닌 짐승 취급을 받으며 혹독한 시간을 버텨야 한다는 점입니다. 수습은 새벽부터 새벽까지 경찰서와 대학병원, 장례식장 등을 돌면서 선배 기자에게 보고하느라 비인간적인 처사에 내몰립니다. 남녀 구분 없이 좁고 더러운 2진 기자실에서 하루 2~4시간씩 쪽잠을 자고, 제대로 밥도 챙겨 먹지 못합니다. 선배의 욕설과 막말을 듣는 것도 다반사이고, 월급보다 많은 택시비를 쓰기도 합니다. 진실과 정의, 그리고 인권을 수호하겠다며 언론에 투신한 젊은이들이 부조리하고 반인권적인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사스마와리는 ‘권위주의적’입니다.


“내 전화는 벨이 세 번 울리기 전에 받아.” 올해 초 기자를 다룬 드라마 <피노키오>가 유행할 때 경향신문이 ‘수습기자의 하루’에 대한 기사를 올렸다가 독자들에게 호되게 데인 적이 있습니다. 한 독자는 페이스북 댓글을 통해 “다른 회사에서 2시간 재우면서 일시키고, 선배들이 전화 3번 울리기 전에 받으라는 식으로 신입들을 대했다면 ‘갑질’ 기사감 아닌가요? 기업이 하면 ‘갑질’, 신문사가 하면 ‘기자정신’인가요?”라고 질책했습니다. 사스마와리는 이처럼 상식 있는 일반인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전근대식 상명하복이 지속되는 기간입니다. 수습은 선배의 불합리한 요구에도 입도 뻥끗 못하고 심지어 1진 기자실에 들어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권위와 권력에도 쫄지 말라고 교육받는 기자가 막상 제 선배의 권위주의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뿐입니다.


셋째, 사스마와리는 ‘불법’입니다.


왜 이게 불법이라고 말을 모태!


근로기준법 50조(근로시간)에 따르면 1주 간 근로시간은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습니다. 또 근로기준법 53조(연장근로의 제한)에 따르면 당사자 간 합의에 의해 1주 동안 12시간을 한도로 근로시간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습기자는 2~4시간 자는 때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노동시간입니다. 살인적인 노동강도입니다.


만약 어느 대기업 하청공장에서 (비단 수습기간 때뿐이라 할지라도) 이런 노동을 강요한다면 각 언론들은 당장 사회면에 고발기사를 실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자기네 언론사들은 이 같은 불법행위를 지난 수십 년 동안 너무나도 태연하게 저질러오고 있습니다. 지난 2월 4일 <미디어오늘> 보도에서 김민아 노무사는 “기자들이 걸면 (언론사는) 노동법 위반으로 걸릴 거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자가 자신의 위치상 걸지 못할 거다. 수습기자들의 노동실태는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넷째, 사스마와리는 ‘시대착오적’입니다.


일제 제국주의의 잔재인 사스마와리는 구시대적 취재관행인 출입처·기자단제도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안수찬 기자는 지난 2009년 <미디어스> 칼럼에서 사스마와리가 출입처 제도로 이어지는 양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사람을 만나려면 사건을 취급하는 경찰과 친해져야 한다. 어울리는 일이 잦아진다. 피의자의 처지보다 경찰의 고충에 공명하는 일이 많아진다. (…) 그들은 ‘경찰 간부의 눈으로’ 세상 보는 법을 기자들에게 전염시킨다. 이 과정은 이후 기자 생활 내내 반복된다. 검찰, 법원, 행정부, 국회, 청와대 등에서 거듭된다.”


여러 사회 현상과 삶, 만남, 책에서 기자 스스로의 안목으로 기사를 길어 올리기보다, 경찰서를 돌며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 위주로 취재하는 행태는 출입처 중심 받아쓰기 저널리즘의 원형이 됩니다. 권력‧자본과 알게 모르게 결탁하면서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기레기가 되는 것입니다.


어이 기자 양반, 기사는 받아쓰기가 아니라고.


이뿐만이 아닙니다. 선배들이 시키는 것만 닥치고 취재하면서 젊은이 특유의 패기와 독특한 시각, 창의성 등은 점차 사라집니다. 다변화하는 저널리즘 환경 속에서 획일적인 사건사고 기사, 불필요한 속보 경쟁, 판에 박힌 스트레이트 기사작성에 매몰되기도 합니다. 지금 세계 저널리즘 생태계는 미래를 향해 급속도로 달려가고 있는데, 한국 언론의 취재교육은 아직도 제국주의 시대의 구악에 머물러있는 셈입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러나 아직도 많은 기자들이 사스마와리의 효용성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겨레21> 보도 이후 한 젊은 기자가 SNS에서 “그래도 사스마와리만큼 효율적인 게 없다”, “대안이 없다”, “단시간에 밥벌이하는 사람으로 만든다”고 적은 것을 보고 절망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언론사에 입사하면 함께 구시대의 유물을 청산하는 데 힘을 쏟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젊은 선배들이 오히려 변화를 추구하는 목소리를 찍어 누를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 기자들이 왜 질문을 안 하죠?


저는 과문한 탓인지 사스마와리를 두둔하는 목소리를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사스마와리를 통해 어떤 장소에서든 누구에게나 막힘없이 질문을 던지고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용기를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난 2010년 G20 서울정상회의 폐막식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을 받겠다”고 하는데도 한국 기자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앉아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또 사스마와리를 통해 민감하고 어려운 취재도 근성을 갖고 돌파하는 능력을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 진행 중인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해 ‘워터게이트’ 사건을 2년 동안 취재한 밥 우드워드, 칼 번스타인처럼 끈질기게 탐사보도 하는 기자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사스마와리를 통해 거친 재난 현장이나 분쟁지역에서 버티며 취재하는 법도 익힐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국 언론에서 (세월호의 보도참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의 젊은 여기자 안나 에렐(가명)처럼 목숨을 걸고 IS에 잠입해 장편 르포를 써내는 기자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사스마와리는 무엇을, 누구를 위한 ‘지옥훈련’입니까?  


아이고 사스마와리가 답도 없고 끝도 없네


그러므로 ‘대안이 없다’고 말하는 한국 언론에게 저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 자리에서 말한 명언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를 들려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작전통제도 한 개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놔 놓고, 나 국방장관이오, 나 참모총장이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제대로 된 수습기자 교육 하나 만들지 못했으면서 편집국장이오, 논설위원이오, 보도국장이오 한다는 말입니까?    


‘신인류’의 기자를 위해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단언컨대 사스마와리는 그 시대적 소임을 다했습니다. 저는 독자로서 더이상 젊은 기자들의 눈물까지 착취해낸 기사를 보고싶지 않으며, 또 언론인 지망생으로서 부조리를 온몸으로 체득하고 이에 무감각해진 기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한국 언론은 사스마와리를 폐지하고 미래 저널리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수습기자 교육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글 제목을 ‘<한겨레>의 사스마와리에 반대합니다’라고 정한 것은 한겨레21이 기자채용에 대해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에 더해, 한겨레가 그래도 한국 언론 중에 신뢰받고 양식 있는 언론사인 만큼 사스마와리 반대 목소리에 귀 기울여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겨레 같은 진보언론이 과감하게 변화에 앞장서야 발걸음이 더딘 다른 언론들도 하나둘 따라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언론인 준비생도 이제 한국 언론의 오랜 적폐에 끌려가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개선을 요구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사에 지속적으로 의견을 내 그들의 변화를 촉구해야 합니다. 수습기자들도 용기 있게 선배의 불합리에 맞서고, 사내 게시판과 사보 등을 통해 교육 시스템을 바꿔달라는 요구를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급진적으로 말하면 수습들이 연대해 회사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신고하는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언론 개혁을 외치는 시민단체들도 압박을 가할 수 있습니다.


세월호 이후 한국 언론의 실패는 자명한 것이 됐습니다. 그런데도 변하지 않는 것은 침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스마와리는 한국 언론이 바꿔야하는 여러 목록 중 첫째줄에 있습니다. 신인류의 기자가 탄생하길 원한다면 발목을 잡는 덫을 치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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