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경쟁의 공정한 조건, 소위 말하는 ‘기회의 평등’이 단 한 차례라도 존재했던 적이 있었는가?”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 던져졌다. 2021년 7월 14일 대기업 하청업체, 쿠팡물류센터, 배달 플랫폼 등에서 일하는 청년 노동자 김태훈 등 7명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파업하고 있는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절대다수의 청년들은 공무원이나 공기업 정규직 같은 안정된 일자리를 얻기 위해 성패가 불분명한 기약 없는 수험생활을 몇 년씩 할 만큼 경제적 여유가 없다”며 “그런 청년 노동자들에게 ‘너희는 경쟁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니 좋은 일자리를 가질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은 사회적 폭력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들 청년 노동자의 목소리는 최근 한국사회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공정’이 단순히 시험을 통해 능력을 평가하며 절차의 객관성‧투명성을 확보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라는 사실을 잘 드러낸다. 이들이 지적하듯, 기회나 결과의 ‘불평등’은 경쟁의 출발선을 다르게 만들기 때문에 곧바로 ‘불공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정은 사전적으로는 ‘공평하고 올바르다’라는 뜻이지만, 이처럼 사용하는 이가 서있는 입장이나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서울 여의도 한 호텔 앞 건강보험공단 직원들의 시위트럭의 모습. ⓒ 연합뉴스
공정의 다차원성, ‘형평’‧‘평등’‧‘필요’
‘세 아이와 하나의 피리’ 이야기는 공정의 복잡한 속성을 잘 드러낸다. 여기 피리 하나를 두고 다투는 세 아이가 있다. 한 아이는 “나만이 피리를 불 수 있다”며 피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아이는 “나만 가난해서 장난감이 없다”면서 소유권을 주장한다. 또 다른 아이는 “내가 그 피리를 부지런히 만들었다”며 같은 주장을 한다. 이들의 말을 모두 귀담아들었을 때, 과연 누구에게 피리를 주는 게 옳을까? 각각의 주장은 성취의 추구, 빈곤의 퇴치, 노동 산물을 누릴 자격 등에 입각해 있으므로 어느 것 하나 쉽게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다. 평생 불평등과 정의 문제를 연구해온 경제학자이자 사상가 아마르티아 센이 《정의의 아이디어》(2019)에서 소개한 사례다.
공정은 이렇듯 다차원적 개념이다. 박효민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여러 학자들의 공정 이론을 정리한 논문 <공정성 이론의 다차원성>(2015)에 따르면, 공정성 이론은 자원 배분의 기준‧원칙에 주목하는 ‘분배공정성’과 공정한 의사결정 과정에 주목하는 ‘절차공정성’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분배공정성의 원칙은 다시 ‘형평’, ‘평등’, ‘필요’ 원칙으로 나뉜다. 형평 원칙은 자원이 개인의 재능과 노력에 따라 성과에 기여한 비율에 비례해서 분배되면 공정하다고 보는 것이다. 평등 원칙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원을 균등하게 분배받고 동등한 생활조건을 갖게 될 때, 필요 원칙은 개인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어 자원이 배분될 때 공정하다고 본다.
이때 형평 원칙은 개인의 성과가 중요한 경쟁 상황에서 강조되고, 여기선 생산성을 높이는 게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다. 평등 원칙은 집단 내 연대와 협력의식이 강한 상황에서 중시되고, 조화와 화합을 주요 목표로 삼는다. 필요 원칙은 집단 구성원 간 친밀감과 상호의존성이 높은 상황에서 중시되고, 주된 목표는 개인의 행복이다. 한편 절차공정성 이론에 따르면 구성원들이 공정하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분배를 결정하는 주체‧체제가 정직하고 편향되어 있지 않다는 신뢰가 있어야 하고, 개인이 자기 이익을 보호할 수 있도록 분배 결정 과정에 참여해 의견을 낼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공정의 다차원성을 ‘교육’이라는 자원에 적용해보면, 자연스레 어렵고 복잡한 질문이 이어진다. 한 사회에서 한정돼 있는 양질의 교육 기회를 과연 누구에게 주는 게 옳을까? 능력‧노력에 따라 특정 시험 성적이 가장 높은 사람에게 주는 것,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나눠주는 것, 가난해서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가 없는 사람이나 재능이 부족해 더 공부가 필요한 사람에게 더 많은 교육 자원을 주는 것 중에 무엇이 가장 공정할까?
공정은 평등과 정의, 자유라는 개념이 중첩돼 있으며,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 구성원들은 하나의 공정성 원칙을 절대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상대적이고 종합적으로 활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공정관은 ‘형평’ 원칙에 치우쳐 있는 경향이 강해 보인다. 한국리서치의 <한국사회 공정성 인식조사 보고서>(2018)에 따르면, 시민 응답자 중 “능력이나 노력의 차이에 따른 보수의 차이가 클수록 좋다”는 의견이 66%에 달했다.
능력주의에 포섭된 일차원적 공정
이는 한국사회에서 공정 개념이 ‘능력주의meritocracy’ 이데올로기에 깊이 포섭돼 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출신 배경이 아니라 재능과 노력, 곧 능력에 따라 경제적 자원과 사회적 지위가 차등적으로 분배되는 체제를 말한다. 능력주의라는 말은 1958년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공상소설 《능력주의의 부상》에서 능력에 대한 과도한 강조가 오히려 극심한 불평등을 낳는 세태를 풍자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지만, 이후 영미권에서 세습 귀족주의에 대항하는 진보적 이념으로 평가되며 널리 퍼졌다.
물론 능력주의는 혈통‧신분에 따라 자원을 배분했던 전근대성을 극복하고 경쟁과 효율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그 자체로 심각한 맹점과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먼저 능력·노력 외에 많은 요소가 경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개인이 온전한 능력과 노력으로만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사회학과 교수인 스티븐 맥나미와 로버트 밀러 주니어는 《능력주의는 허구다》(2015)에서 능력을 이겨버리는 비능력적 요인들로 “차별적 교육 기회, 불평등한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 특권의 상속과 부의 세습, 개인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손쓸 방법이 없는 불가항력적인 요인들, 자영업자의 자수성가를 방해하는 대기업, 편견에 의한 차별 등”을 꼽았다.
설사 순수하게 능력과 노력으로 평가받는 이상적인 사회가 실현된다 해도, 능력주의는 ‘차등’을 강조하는 내재적 특성 때문에 결국 심화된 불평등과 불공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승자들이 자원을 독식하거나 과잉 수령하고 이를 자녀에게 세습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소외와 배제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대니얼 마코비츠 예일대 로스쿨 교수는 《엘리트 세습》(2020)에서 “엘리트 대학 졸업자들이 최고 직업을 독점하는 동시에 초고숙련 근로자에게 유리한 신기술을 고안해 최고 직업은 더 훌륭해지고 나머지 직업은 더 열악해진다”며 “능력주의는 교육과 직업 사이의 되먹임 고리를 만들어내고 그 고리 안에서 개별 분야의 불평등은 다른 분야의 불평등을 증폭한다”고 지적했다.
대니얼 마코비츠 예일대 로스쿨 교수의 저서 《엘리트 세습》(2020) ⓒ 세종
강준만 전북대 교수도 논문 ‘왜 부모를 잘 둔 것도 능력이 되었나(2016)’에서 능력주의의 단계는 귀족주의 반대말로서의 능력주의(1단계) → 교육과 시험평가에 의한 능력주의(2단계) → '교육세습'의 영향을 받는 능력주의(3단계) → '승자독식'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4단계)로 진행된다고 통찰했다. 이에 따라 능력주의는 결국 양극화와 세습이 심화해 “변형된 세습적 귀족주의”로 되돌아가고 마는데, 오늘날 한국 사회도 이미 이 상태에 이르렀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이 밖에도 능력주의는 다양한 능력 또는 노력의 형태를 정확히 측정하기 어렵다는 점, 능력을 자본 생산성과만 연결 지어 도덕적‧윤리적 기여는 무시한다는 점과 같은 한계도 갖고 있다. 이에 대해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정치철학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돈을 잘 버는 일은 그 사람의 능력과도 무관하고 그가 한 기여의 가치와도 무관하다”고 일갈했다.
이처럼 능력주의의 어두운 그늘을 제대로 인식하면, 단순히 능력주의 원칙만을 따라 자원을 배분하는 일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능력주의보다 더 성숙한 형태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자원 배분 원리가 필요한 것이다.
지방대생 좌절시키는 교육 기회‧과정 단계
위와 같은 공정의 다차원성, 능력주의의 허점을 염두에 두고 한국 교육 현장에서 지방대와 지방대생의 현실을 살펴보면, 이들이 얼마나 구조적으로 불공정한 취급을 받고 결과적으로 비합리적인 불평등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를 교육의 ‘기회’와 ‘과정’, ‘결과’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자.
먼저 교육 기회의 불공정으로는, 단연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 격차를 들 수 있다. 교육사회학에서 ‘최대한으로 유지되는 불평등’ 가설에 따르면, 고등교육의 혜택은 상위계층에게 모두 돌아간 후에야 하위계층에게 허용된다. 즉 상위계층은 고교 교육이 보편화되면 대학교육으로 차별화하고, 대학교육이 보편화되면 대학원교육으로 차별화한다. 또 ‘효과적으로 유지되는 불평등’ 가설에 따르면, 교육 기회가 팽창할 때 상위계층은 각 교육 단계에서 하위계층과는 질적으로 다른 내용으로 기득권을 추구한다. 고교 교육이 보편화되면 과학고와 외국어고, 자사고 등으로, 대학교육이 확대되면 대학서열과 전공의 중요성 강화로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처럼 더 나은 교육을 향한 경쟁은 항상 상위계층에 유리하게 설계되며, 하위계층은 이 구조적 불공정 속에서 상대적으로 선호가 낮은 교육 기회에 머물 수밖에 없다. 캔사스대 김창환 교수와 신희연 박사과정생의 논문 <입시제도에서 나타나는 적응의 법칙과 엘리트 대학 진학의 공정성>(2020)에 따르면, 부모의 소득·자산·교육 수준·직업 위계가 높아질수록 자녀가 상위권 대학에 진학할 확률이 커졌다. 또 입시전형을 어떻게 조정하든 모든 경우에서 상위계층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역으로 말하면, 부모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낮은 학생은 대학서열이 뒤처지는 대학에 갈 확률이 높은 것이다. 실제로 교육부 ‘학생부종합전형(학종) 실태조사’(2019)에 따르면, 서울대 등 주요 13개 대학 신입생 중 70%가 소득 상위 20% 고소득 계층이었다.
국가장학금 미수혜자 비율은 대게 고소득층으로 간주된다. 2018년 전국 대학의 평균 수혜율은 48.2%다. ⓒ 교육부
다음 교육 과정의 불공정으로, 정부의 대학별 재정 지원 격차를 꼽을 수 있다. 세명대 저널리즘연구소가 대학알리미를 통해 지난 2007년부터 2018년까지 전국 4년제 일반대학 220여 곳의 정부·지자체 재정지원사업 수혜 실적을 분석한 결과, 서울대(9.3%), 연세대(4.9%), 고려대(3.7%) 등 세 대학이 전체 지원금의 17.9%를 가져간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대학 재학생 수의 5% 정도(분교 포함)만을 차지하는 세 곳이 총사업비의 5분의 1 가까이를 가져간 것이다. 매년도 대학별 평균 재정지원비를 살펴봐도 서울대는 평균 3848억 원, 연세대는 2040억 원, 고려대는 1522억 원을 지원받아, 나머지 대학(평균 193억 원)과 극심한 격차를 보였다.
스카이 등 극소수 명문대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선택과 집중이라는 국가 전략에 따라 교육 자원을 독식해왔다. 현재 이들 대학에 대한 지원 집중 역시 나름대로는 경쟁 절차를 거친 것이지만, 그 승리는 교육·연구 인프라, 대학 평가 성적 등 이미 명문대에 유리한 기준을 적용한 덕분이다. 한국 교육에서 자원 배분 시스템은 전적으로 소수 상위권 대학이 과도하게 더 가져가고, 하위권 대학은 턱없이 적은 몫을 가져가는 방향으로 설계돼 있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교육과정의 불공정을 드러내는 ‘역진적 배분’이다. 이 때문에 명문대 재학생들은 풍부한 자원을 통해 우월한 교육조건에서 공부하며 높은 경쟁력을 기르는 동안, 지방대 학생들은 낮은 사회적 관심과 지원 속에 대학생활 동안 ‘학습된 무기력’, ‘적당한 도전’, ‘낙담과 자괴감’ 등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끝으로 교육 결과의 불공정은 노동시장에서의 차별과 과도한 격차를 들 수 있다. 한국 노동시장에서 출신 대학의 서열과 평판은 ‘절대적 신호’로 작용해 채용 차별과 임금 및 고용 격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김희삼 한국개발연구원 부연구위원이 논문 <지방대학 졸업자의 노동시장 성과와 지역별 교육격차>(2010)에서 대졸자직업이동경로조사(GOMS) 자료를 이용해 분석한 결과, 다른 조건이 유사한 상황에서도 지방대 졸업자들은 인서울 대학 졸업자에 비해 16% 정도 낮은 임금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방대 출신은 소규모 업체나 전공과 맞지 않는 직장에 다닐 확률도 상대적으로 높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지방대와 인서울 출신의 임금 격차의 3분의 2는 수능 점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즉, 백번 양보해 수능 점수 차이가 곧 생산성 차이라는 능력주의적 사고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안에서도 설명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격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상위권 대학 졸업자에게 주어지는 ‘임금 프리미엄’과 지방대 졸업자에게 주어지는 ‘비합리적 차별’은 명백한 구조적 불공정이다.
이런 불공정은 양극화한 한국 노동시장 전반에 도사리고 있다. 한국 노동시장이 ‘대기업(원청)-정규직-유노조’로 설명할 수 있는 1차 노동시장과 ‘중소기업(하청)-비정규직-무노조’인 2차 노동시장으로 나뉘고, 이들 사이의 임금·고용안정성·복지 격차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 사회 ‘교육 전쟁’도 대학서열을 높여 번듯한 일자리에 진입하고자 하는 욕망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과연 이 격차는 합리적인 것일까?
부산대 경제학부 김기승 교수와 김명환 박사과정생이 논문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분해분석을 통한 기업 규모별 임금체계 비교>(2016)에서 경제활동인구조사를 활용해 고용형태에 따른 임금분해분석을 한 결과, 2013년 기준 대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임금 격차 중 인적자본 또는 생산성에 의한 격차는 53%, 이것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격차는 4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설명될 수 없는’ 격차는 비정규직이 차별을 받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정규직이 자기 생산성에 비해 더 높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둘 사이의 격차는 비합리적이며 불공정하다. 그 뒤엔 대기업의 독과점, 불법파견, 단가 후려치기, 구조적 착취와 차별이 버무려진 불공정이 근본 원인으로 숨어 있다.
덧붙이자면, 지방대생은 교육 영역뿐만 아니라 지역불균형발전으로 인한 거대한 불공정과도 맞닥뜨린다. 단비뉴스 <청년 채용공고 80% 수도권 집중> 기사가 보도한 것처럼, 취업포털사이트에서 신입급 직원을 뽑는 채용공고의 80%가 서울 등 수도권에 쏠려 있고, 고소득‧고학력‧고숙련 비중이 높은 좋은 일자리도 대다수가 수도권에 있다. 또 <구직 청년에겐 서울 사는 것도 ‘스펙’> 기사에 따르면, 취업 카페에서 스터디를 모집하는 글도 87%가 수도권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인턴 공고도 76.5%가 수도권에 있었다. 취업할 수 있는 기회와 취업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도 모두 불공정하게 분포돼 있는 것이다.
2015년 전국 시군구별 일자리 질 지수 분포. 수도권에 일자리 질 지수 상위권(초록색)이 집중돼 있는 반면 전라, 경상, 강원도 지역엔 하위권(붉은색)이 많다. ⓒ 한국고용정보원
교육 기회와 자원 배분의 다원화 필요
이처럼 한국 대학생의 60%가 넘는 지방대생은 교육의 기회·과정·결과 모든 영역에서 다차원적이고 구조적인 불공정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출신 학교에 따른 차별은 단순히 능력‧노력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불평등이 아니라, 승자에게 몰아주고 패자는 소외‧배제시키는 자원 배분 시스템으로 인한 비합리적 불공정이다. 한국의 교육 기회·과정·결과는 모두 공정하지 않으므로, 학벌에 따른 과도한 차등과 격차, 지방대에 대한 차별과 소외도 결코 당연하지 않다.
이러한 불공정과 지방대 차별‧소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우리를 지배해왔던 ‘능력주의’, ‘승자독식’의 교육 자원 배분 메커니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교육 기회 단계에서 출발선 차이로 인한 불공정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사회적 약자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지원, 기회 할당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교육과정 단계에서 심한 차등 지원으로 불평등을 심화하는 교육여건의 격차가 일어나지 않도록 형평과 평등, 필요의 원칙을 종합적으로 적용한 자원 배분이 이뤄져야 한다. 교육 결과 단계에서도 차별과 착취, 불공정 관행을 없애 누구에게나 합당한 몫이 주어질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동안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지방대와 지방대생들은 이제라도 공정한 지원과 보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절대다수 평범한 수준의 학생과 하위권 학생들도 상위권 못지않은 지원을 받고 제2, 제3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교육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정부의 대학재정지원은 획일적 평가를 통한 소수 대학 집중 지원이 아니라 각 대학의 특성과 필요를 고려해 균등하게 배분하고, 그 규모 또한 확대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2019년부터 ‘대학혁신지원사업’을 통해 소수 대학에 차등적으로 나눠준 재정지원을 재구조화해 다수 대학에 고루 나눠주는 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2021년엔 143개 대학에 총 6951억 원의 사업비를 지원했다. 또 2018년부터 ‘국립대학육성사업’을 통해 39개 국립대에 연 1500억 원의 재정을 지원하고 있다. 이는 물론 의미 있는 변화지만 이 정도로는 한계가 있다. 방향은 맞을지 몰라도 각 대학이 재정을 집행할 수 있는 내용이 제한적이고 전체 대학의 교육여건을 개선하기에는 지원 규모도 적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2022년 지속될 대학혁신지원사업의 규모를 2조 원 수준으로 확대해줄 것을 정부에 요청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획일화된 대학서열, 자원의 수도권 집중이라는 ‘병목’ 문제를 해소해 기회를 다원화하는 일도 필요하다. 조지프 피시킨 텍사스대 로스쿨 교수는 저서 《병목사회》(2016)에서 “병목이란 사람들이 건너편에 펼쳐진 광범위한 기회에 도달하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비좁은 지점을 가리킨다”며 “왜 우리 사회가 특정한 고생을 겪거나 정해진 나이에 특정한 시험을 통과하는 사람들만 일정한 경로를 좇도록 허용하는지 그 이유를 물어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제한된 기회에 몰두하는 좁은 병목을 좇는 대신 인생 모든 단계에서 좋은 삶을 위한 새로운 경로가 많아지는 ‘기회구조의 다원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대학개혁에서 기회의 다원화를 실현할 수 있는 대표적인 아이디어로는 대학 공공성 제고와 연대‧협력을 통해 각 지역에 다양하고 수준 높은 교육 기회를 만들고자 하는 ‘공영형 사립대’와 ‘대학통합네트워크’ 정책 등을 들 수 있다. 공영형 사립대는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국정과제로 편성됐지만 기획재정부 예산 삭감으로 시행되지 못하고, 2021년 ‘사학혁신 지원사업’으로 이름이 바뀐 채 5개 대학에 2년간 20억 원씩 지원하는 내용으로 축소됐다. 이 사업은 참여 대학에 회계 투명성, 법인 운영의 책무성과 공공성, 교직원 인사의 민주성, 법인·대학의 자체혁신 과제를 제시하고, 사학혁신 우수 사례를 다른 대학에 제도화하기 위해 추진된다. 그러므로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해 사립대의 재정과 거버넌스를 투명하게 바꾸고, 고등교육의 공공성을 전반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로써 사립대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면 국가 재정 투입 확대의 정당성을 마련하고 공영형 사립대를 본격 추진할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중장기 과제였던 대학 네트워크 관련 정책 역시 공동입시·공동학위라는 본래 특색을 살리지 못한 채, 일부 지역과 전공에 국한해 대학 간 교육 자원을 공유하는 ‘지자체-대학 협력기반 지역혁신 사업(지역혁신 플랫폼 사업)’, ‘디지털 신기술 인재양성 혁신공유대학’ 등의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그러므로 보다 실질적인 대학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대학 서열화 완화와 경쟁력 강화를 도모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로드맵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전쟁터’ 아닌, 공정하고 정의로운 교육 시스템으로
물론 위와 같은 혁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 교육재정의 증액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고등교육재정교부금을 신설하는 등의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 이는 지난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일이지만, 한국 교육의 구조적 부조리를 극복하고 공공성 높은 고등교육을 시행하기 위해서 좀 더 적극적인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 지방대의 뼈를 깎는 노력도 필요하다. 시민들이 지방대를 신뢰하고 공적 지원에 동의할 수 있도록, 국립대 수준의 ‘재정위원회’를 설립하거나 이사회를 개방하는 등 그동안 사학이 극도로 거부했던 변화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또 지역 산업과 연계한 교육과정 및 기술 개발, 기초학문 교육과 연구 강화, 지역사회 맞춤형 평생교육 개선 등 사회와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교육개혁 또한 실천해야 한다.
한 게임 유저가 그린 "헬조선 지옥불반도" 지도.
최근 한국사회에서, 특히 청년층에서 왜 공정이 화두가 되고 있을까? ‘헬조선’, ‘N포세대’, ‘금수저‧흙수저’라는 말이 드러내듯 한국사회에 세습과 경쟁으로 인한 불평등이 심해지는데, 교육‧일자리‧주거 등 주요 민생 분야의 자원 배분 시스템이 도무지 달라지는 게 없기 때문이다. ‘결과가 정의롭고 평등할 수 없다면, 과정만이라도 공정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처참한 전쟁터 한가운데 놓인 병사들 중 상위 10% 정도만 선발해 집에서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준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특정 능력에 따른 선발 기준과 그 절차의 객관성·투명성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개인의 존엄성이나 개성, 배경 등을 모두 고려하는 것은 지나치게 한가한 일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공정을 우리가 과연 진정한 공정이라 할 수 있을까? 공정이 거기에서 그친다면 오히려 거대한 불공정과 불의에 복무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개인이 전쟁터를 벗어나는 가장 확실하고 근본적인 방법은 바로 전쟁을 끝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게임의 규칙’이 아니라 ‘게임’ 그 자체이다. 즉 전쟁 같은 학력·학벌, 일자리 경쟁을 그대로 두고 입시제도 같은 것을 이리저리 바꾸는 게 아니라, 현실 그 너머의 교육 시스템을 상상하고 바꿔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는 공정과 평등, 정의의 가치를 총체적으로 고려해 교육 기회와 자원 배분 원리를 다원화하고 누구도 소외받거나 차별받지 않는 교육 시스템을 만듦으로써 실현할 수 있다. 지방대생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공정한 교육을 받을 권리와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