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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영신 Jan 24. 2019

[이전글] TV도 ‘도끼’다

세상을 깨우는 놀이판 한 마당, KBS 대기획 <시대의 작창, 판소리>

방송문화진흥회, 2015 좋은 방송을 위한 시민의 비평상 대상


 

책은 도끼, TV는?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젊은 프란츠 카프카가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덕분에 ‘책은 도끼’라는 등식이 성립됐다. 이 말엔 책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사회와 자아가 기존의 통념을 깨부수고 무언가 새로운 창조와 변화를 성취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기대감이 담겼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지만, 아직도 책의 정신적 위상만큼은 꼿꼿하다.


반면에 TV는 어떨까? ‘글쎄요’다. TV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는커녕 기존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오히려 강화하는 미디어에 가깝게 여겨진다. ‘시청률’이라는 절대 명제를 앞세우고 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보다 흥미롭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지상파 방송, 종편, 케이블과 위성, 인터넷, SNS, OTT(Over the Top) 등 온갖 미디어 플랫폼이 각축을 벌이는 시대라 시청률 지상주의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바보상자’라는 오명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이런 때 TV에서 오랜만에 돌연변이 하나가 튀어나왔다. KBS 대기획 <시대의 작창, 판소리>(이하 <판소리>)는 자칫 고루하게 느껴지는 판소리라는 전통 문화를 제대로 소개하며, 이를 통해 얼어붙은 세상을 깨우는 방송 프로그램이다. 시대의 부조리를 꿰뚫고 변화시키려는 판소리의 변혁적인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음악(판소리)+다큐+드라마’라는 혁신적인 스타일을 구현했다. 즉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TV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이쯤 되면 TV도 도끼가 될 수 있다.       


질문 하나, “기생이냐 아니냐”     


<판소리> 최대의 성취는 조선 후기 민중의 삶과 꿈을 담은 판소리의 심오한 정신을 제대로 프로그램에 담아냈다는 점이다. 그저 지루하고 통속적인 줄 알았던 판소리가 시대를 위로하고 재창조하는 위대한 힘이 있었다는 사실을 쉽고 흥미롭게 재현하고 있다. 기존의 판소리 관련 프로그램이 판소리를 그저 소개하는 데 그쳤다면, 이 프로그램은 직접 판소리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판소리가 되었다.


1부 ‘범법자 춘향 재판기’는 판소리 ‘춘향가’ 이야기다. 춘향이와 이몽룡, 변학도의 이야기가 기본적인 드라마로 펼쳐지는 가운데, 군데군데 판소리 명창들의 노래와 전문가 인터뷰 같은 다큐멘터리 요소를 삽입한 구조를 취했다. 이 춘향 편에서 <판소리>와 춘향가가 던지는 핵심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바로 “아비가 양반이고 어미가 기생이면 그 딸은 기생이냐 아니냐?”는 물음이다.


조선 시대 종모법에 따르면, 출생한 아이의 신분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른다. 그러므로 기생의 딸인 춘향이도 기생이다. 사또 변학도가 심문 과정에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부분도 바로 이 대목이다. 이를 근거로 변학도는 춘향이와 자신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고, 그녀에게 수청을 들 것을 명령한다. 조선 시대 신분 체제의 철저한 옹호자다.


그러나 춘향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그녀는 변학도의 제안을 거절하고 이몽룡에 대한 사랑과 절개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다. “기생은 열이 없소 충이 없소!”라고 쏘아붙인다. 당시 여성의 정절은 양반집 규수만의 덕목이었다. 따라서 기생인 춘향이 정절을 지키겠다는 것은 비천한 자기의 신분을 뛰어넘겠다는 의지였고, 사회 체제를 부정하는 주장이었다. 춘향의 변혁성은 첫날밤 이몽룡에게 요구한 혼인서약서 즉 불망기에도 드러난다. 이는 양반과 기생의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 속에서 당대의 관행과 법이 허용하지 않는 대등한 사랑을 요구하는 행위였다. 체제에 대한 철저한 저항자다.


<판소리>는 이처럼 춘향가가 단순한 남녀의 사랑과 권선징악을 그린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조선 봉건제도의 부조리를 통렬하게 고발하고 시대 전체에 대한 용맹한 거부와 저항을 그린 이야기라는 것이다. <판소리>에서 춘향이 변학도와 두던 장기판을 통째로 뒤엎어버리는 장면은 세상을 ‘리셋’해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길 바라는 춘향과 대중의 마음을 잘 상징하고 있다.   


춘향가는 훗날 동학농민운동의 ‘진군가’로 쓰였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주장한 동학 농민들은 진군가를 부르며 “암행어사 출두요!”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여기서 암행어사는 이몽룡이 아니라 바로 농민들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사랑 노래가 또 다른 시대에서 위대한 혁명의 노래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 같은 시대적 맥락을 이해한 후 춘향가의 사랑가 한 대목을 들으면 사뭇 다른 느낌이 전해진다.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은 그저 생생한 청춘의 즐거운 사랑 놀음이 아니었다는 것, 그것은 시대의 불의와 아픔을 어깨에 짊어지고 세상을 바꾸려 했던 위대한 사랑이었다는 것. <판소리>는 이처럼 익숙한 줄 알았던 춘향가를 완전히 새로운 노래로 바꿔 들려준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내사랑이야”       


질문 둘, “어느 곳으로 가면 산단 말이냐”   

  

1부 ‘범법자 춘향 재판기’가 권력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2부 ‘신흥재벌 흥부의 경제학’은 자본에 대한 이야기다. ‘흥부가’는 조선 후기 극심한 빈부 격차로 인한 대립을 형제 간의 갈등으로 대변해 그려내면서 시대 속의 썩은 고름을 신랄하게 고발한다.


조선 후기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모든 이가 평등하게 통용하라는 뜻의 ‘상평통보’가 발행되었지만, 이 돈의 쓰임은 그리 평등하지 못했다. 놀부가 부농으로 시작해 고리대금으로 재벌이 된 반면, 흥부는 집에서 쫓겨나 근근이 일용직 노동으로 먹고 사는 몰락한 존재가 된 것처럼. “생살지권을 가진 돈 부귀공명이 붙은 돈 맹산군의 수레바퀴처럼 둥글둥글하게 생긴 돈”이 민중들의 삶을 완전히 갈라놓은 것이다. 흥부가는 부패한 환곡제도, 가난한 이들의 매품팔이, 악덕 고리대금 사업 등 당대의 패악상을 자연스레 노래에 녹여내며 시대를 풍자한다.


이러한 고통의 시대를 헤쳐 나가는 방법에서 놀부와 흥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놀부는 “가문 논에 물길 파고 장마 논에 물길 막고 애호박에다 말뚝 박고 다 팬 곡식 모 뽑기” 같은 심술을 부리며 남을 괴롭히고 밟고 올라서는 데 몰두한다. 오늘날에도 익숙한 풍경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자본주의 경쟁 사회의 승자가 되기 위해 양심을 팽개치고 남을 짓밟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부는 이와 다른 방식을 취한다. 그는 찢어질 듯한 가난 속에서도 “노인이 등짐지면 자청하여 져다 주고 길가의 빠진 물건 임자 찾아 전해주”면서 긍휼과 연대의 정신을 발휘한다. 부러진 다리를 고쳐준 제비가 흥부에게 보은포 박씨를 선물해 금은보화를 얻게 된 후도 마찬가지다. “나도 오늘날 제비 덕에 쌀과 돈이 많이 생겼으니 기민 구제를 할라네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아 우리 집을 찾아오소”라고 말하며 자신의 재산을 분배하는 데 나선 것이다.


이처럼 흥부가는 단순한 형제애뿐만 아니라, 빈부격차를 불러오는 사회구조의 모순을 파헤치고 이를 해결하기 바라는 민중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제 배 불리기에 몰두하는 탐욕과 이기심을 버리고 좀 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공동체성이 회복되기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결코 해학을 놓치지 않는다. 가령 흥부의 장남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면서도 “나 장가 좀 보내주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청중들은 눈물을 흘리는 동시에 배꼽을 쥘 수밖에 없다. 고통과 희망, 웃음의 한 바탕 어우러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박씨’이다. 과연 누가 저 은혜 갚은 제비처럼 돈이 가득 든 박씨를 물어다 준단 말인가. 그러니 흥부와 아내의 박 타는 소리는 신명나면서도 서글프다. 두 눈을 반짝이는 민중들의 염원이 그 소리에 달려있으나, 현실 속에서는 도무지 찾을 길이 없으므로.


“시리렁 실건 시리렁 실건 시리렁 실건 실건 실건 실건 실건……”    

 

질문 셋, “TV냐 판소리냐”     


<판소리>의 미덕은 프로그램 자체가 판소리와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다. 판소리를 대상화해서 관찰하거나 소개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판소리의 형식 및 정신과 창조적 합일을 이룬 것이다. 이는 이제껏 TV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모습인 동시에 판소리의 매력을 최대로 나타낼 수 있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특히 ‘음악(판소리)+다큐+드라마’가 어우러진 파격적인 형식은 그 구성이 판소리와 꼭 닮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판소리는 소리꾼이 노래하는 ‘소리’와 말로써 장면이나 정경을 묘사하는 ‘아니리’, 몸짓으로 극적 내용을 표현하는 ‘발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판소리> 역시 음악과 다큐, 드라마가 한 데 어우러져 있는데 여기서 음악은 판소리의 소리, 다큐는 아니리, 드라마는 발림과 각각 짝을 이룬다. 판소리가 음악+서사+공연이 함께 있는 종합예술인 것처럼, <판소리> 역시 종합예술로서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프로그램을 보면 마치 판소리 한 마당을 그대로 감상한 듯한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 판소리에서 다소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용어도 영상과 드라마와 함께 들으면 쉽게 이해된다는 장점도 돋보인다. <판소리>는 판소리와 TV 프로그램이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TV 프로그램을 통해 판소리의 변혁적 정신을 되살렸다는 점도 중요하다. 오늘날 TV는 대중의 오락적 취향에 맞추기 급급하느라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거나, 세상과 자아에 변화를 불러올만한 창조적인 콘텐츠를 만드는 데 소홀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판소리>는 조선 후기 사회상을 고발하는 판소리를 통해 오늘날의 시대적 모순과 부조리를 끊임없이 환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흥부가 편에서 놀부가 부당한 착취와 폭력행위로 현대 법정에 섰지만 무죄를 선고 받고 법원을 비웃는 모습이라든지, 흥부가 일당 3000원을 들고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장면 등은 판소리의 주인공들과 현대 우리들의 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오늘의 시청자들 또한 시대를 넘어 과거 조선 후기 민중이 가졌던 변화와 연대에 대한 희망을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TV 프로그램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을 만큼 창의적인 장면도 으뜸이다. 흥부와 아내가 박을 타는 장면에서 판소리와 현대 무용, 그림자극을 동원한 장면이나 창자가 마천루에 올라 소리를 하며 도시에 돈을 뿌리는 장면 등은 다른 어떤 미디어에서도 보기 힘든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장면이다. 한국 고유의 색과 선, 여백을 살린 춘향 편의 장면도 마찬가지다. 이 같은 수준 높은 표현력은 우리 사회의 미적•예술적 기준을 높이는 데도 분명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해답 찾기, TV를 넘어서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보르헤스는 단편소설 <알렙>에서 매우 신비한 물체 하나를 소개한다. 이름이 ‘알렙’인 그 물체는 허름한 집 지하실 계단 사이에 있는 작은 구체인데, 그것은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고 있는” 공간이다. 곧 세상의 모든 풍경을 볼 수 있는 스크린이 되는 셈이다. 오늘날 눈부신 미디어의 발전상을 보노라면, 자연스레 이 신비로운 물체 알렙이 떠오른다. 지금은 실제로 손바닥만한 물체를 통해 지구뿐 아니라 우주 너머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장면과 이야기를 볼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한 문학 거장의 가장 전위적인 상상은 이제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이 되었다.


이처럼 상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상상이 되는 이 시대. 미디어 빅뱅의 시대. 그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자극의 시대에 TV는 과연 무엇을 보여주고 말해야 할까? 그 해답 중 하나를 <판소리>가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세상을 깊이 있는 눈으로 꿰뚫어 보고 대중들에게 더 나은 사회와 자아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다. 판소리는 조선 후기 대중들에게 가장 유행하고 사랑받는 미디어였다. TV 역시 오늘날 대중들에게 가장 친숙하고 인기 있는 미디어다. 과거 판소리가 변혁의 시대를 ‘작창’했던 것처럼, TV 역시 희망찬 미래를 ‘제작’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TV는 판소리다. TV는 도끼다. TV는 지금 진화하고 있고 진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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