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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지 Dec 22. 2020

슬기로운 소비생활

마음에도 욕심에도 미니멀을 장착하고 삼시세끼 뉴노멀을 향해 !


우리시대의 핫한 그녀, 우리시대의 트렌디함의 지존, 요즘시대가 아닌 우리시대의 그녀,  전지현이 어느 순간부터인지 처음 들어보는 마켓광고에 떴다. 달빛 아래 파자마 차림의 그녀는 도도한 표정을 짓고 신선한 아스파라거스를 깨문채 화면을 응시한다. 나의 뇌리에 '새벽배송'은 그렇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마켓컬리 광고에서의 전지현  @광고캡쳐화면


그렇지만 무턱대고 광고에 현혹되어 앱을 깔진 않았다. 내게는 그래도 최소한의 환경에 대한 죄책감은 있었기에 '신선식품 과포장'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신경쓰였기 때문이다. '그래, 나 하나만은 끝까지 버텨보자!' 무엇이든 먼저 해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얼리어덥터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나빼고 모두' 새벽배송에 대한 경험담을 늘어놓아도 뒤쳐짐에 대해 조바심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업주부인 덕에 장 볼 시간이 넉넉했다는 것도 한 몫했다. 때마침 미니멀라이프를 살아보겠노라, 고장난 냉장고도 원래 것보다 작은 냉장고로 바꾸어 넣은 참이라, 늘 그날그날 먹을 만큼만 장을 보아왔던 습관도 굳이 새벽배송까지 이용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코로나 이전에는.


그러나 어느 날 예고없이 닥쳐버린 코로나 19. 이 끝을 모르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철옹성같던 나의 결심을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트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선한 의도라도 장기간에 걸친 코로나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처음에는 사재기할 필요가 없는 것에 감사했다. 아무리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도 마트에는 늘 모든 게 넉넉했기 때문에 마트에서 조금씩 사다 먹는 습관이 전혀 방해받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예전처럼 한끼나 두끼를 해결하는데 그치지 않고 삼시세끼를 모두 해결해야 한다는 데 있었다. 그랬다. 하루에 한끼였기에 그렇게 우아한 장보기가 가능했음을 나는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다.


연일 계속되는 집밥 퍼레이드에 쌀이 무서운 속도로 줄어가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며 일주일에 한번꼴로 4키로짜리 쌀을 사러 가야했다. 화장실 휴지와 크리넥스 같은 부피가 나가는 물건들은 또 얼마나 빨리 떨어지는지! 생필품들을 사다 나르는 내 속도가 생필품들의 소진 속도를 따라가기 버거웠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식구들의 세 끼와 간식까지 챙겨먹여야 했던 나의 장보기는 하루에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세끼의 압박에 자꾸만 장바구니가 무거워졌다. 마트에 제 아무리 식재료가 천지빛깔로 진열되어 있으면 뭐하나. 내 어깨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인 걸.


욕심을 부려 낑낑거리고 장보기를 한 날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어깨에 담이 들었는지 목을 돌릴 수가 없었다. 나는 어깨에 뜨거운 마사지팩을 올리며 그제서야 뚜벅이 장보기에 백기투항했다. 환경을 지키자는 나의 알량한 소신은 그렇게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 앱을 깔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 나도 한번 해보자, 새벽배송."


처음 해보는 스마트폰 장보기는 새로 영접한 신세계였다. 배송도 해주는데 세일까지 해주는 품목들이 거의 대부분이라 사면 살수록 돈을 버는 기분이었다. 나는 자꾸자꾸 장바구니에 이것저것 담기 시작했다. 마트의 진열위치는 자주 바뀌기도 하고 사려고 했던 것들이 미처 진열되어 있지 않거나 다 팔린 경우도 있었지만 새벽배송 앱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검색만 하면 찾는 물건들이 착착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걸 눈뜨자 마자 현관에서 들여와 정리하는 재미가 그야말로 쏠쏠했다. 이렇게 편안해도 되나 싶었다.


무엇보다 무게 걱정을 안해도 된다는 게 내 마음의 빗장을 풀었다. 방울토마토나 호박 같은 무게가 나가는 것들은 저렴한 1+1 대신 한 팩만 샀었고, 사과를 사고 싶어도 할인되는 한 박스의 사과보다 개별포장된 두어개만 샀던 내 소비패턴이 단번에 바뀌었다. 냉장고가 예전보다 좀 더 꽉꽉 채워지는 게 흠이었지만 또 그만큼 식구들이 많이 먹으니 문제될 건 없었다.


그런데 복병은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다. 바로 3만원의 마지노선! 내가 이용하는 앱의 새벽배송은 3만원 이하는 배송 자체가 되지 않았고 3만원을 채우면 비로소 무료로 배송이 되었다. 나는 부지런히 그 3만원을 채우려 노력했다. 고기나 과일을 사면 3만원을 넘는 것이 쉬운 일이었지만 야채가 필요한 날에는 3만원을 채우는 게 또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3만원을 훌쩍 넘겨 장을 보자니 아무래도 유통기한이 걱정되기도 했다. 하루라도 다음 날 사야 하루라도 유통기한이 넉넉한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장볼 것들을 적절히 배분하는 일이 새로운 과제였다. 그렇게 3만원에 집착하다 보니 고기가 필요없는 날에도 고기를 샀고, 한두가지면 충분한 재료에 두가지 세가지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장보기는 점점 3만원을 훌쩍 넘어갔고, 장보기가 쉬워진 만큼 더 자주 더 많은 음식을 클릭했다.


원래 한두가지 재료로 만들려던 유산슬 덮밥이었다.  오징어, 닭고기, 새우, 조갯살, 관자 청경채 등등 욕심껏 이것저것 재료를 추가하다 웍이 터져버리는 줄...



그렇게 장보기를 끝내놓고, 내가 빠트린 한가지가 떠오른다면? 나는 주저없이 앱을 열고 또 그 한가지를 위해 3만원어치 쇼핑을 했다. 그러니 나의 휴대폰에서는 끊임없이 결제 알림이 울려댔다. 거칠 것이 없던 나의 소비는 그렇게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장바구니 물가는 모르겠고, 3만원의 늪에 빠진 나는 어떻든 장보기에 열을 올렸다.


빠트린 재료를 사느라 한 번에 두 박스가 배송되어버린...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아무리 먹을만큼 장을 본다고 해도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남은 재료를 소진하기 전에 또 3만원어치의 식재료가 도착했고, 냉장고엔 차곡차곡 남은 식재료들이 쌓여갔다. 그러나 나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식구들이 어디 집밥만 먹고 살 수 있나. 간간히 시키는 배달음식, 테이크아웃한 음식들, 갖가지 남긴 음식들에 냉장고는 미어터지고 식구들의 뱃살도 착실하게 불어갔다.


자제력을 상실한 나의 소비패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역대급 식비지출은 시작에 불과했고, 한번 커진 씀씀이는 멈출 줄을 몰랐다. 비대면의 일상화로 평소에 하지 않던 간편한 랜선쇼핑이 점점 습관처럼 굳어져 먹지도 않을 걸 사고, 쓰지도 않을 걸 샀다. 아무리 코로나로 시작된 무절제라지만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일이었다. 위기의식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못 참겠는 건 냉장고를 들락날락한 음식을 결국엔 버려야 할 때였다. 조금만 더 부지런히 음식을 했더라면 버리지 않았을 재료들, 입맛에 맞지 않아도 식구들이 먹어주었더라면 버리지 않았을 음식들. 스스로 느끼는 죄책감과 식구들에 대한 서운함,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결국엔 쓰레기가 되어버린 음식물쓰레기를 버릴땐 속이 쓰렸다.


그렇게 나는 결국 지갑을 열었으되 무절제한 소비습관에 대한 후회를 얻었고, 슬프게도 버려야 할 체중마저 얻었다. 그러나 자책만 하고 있기엔 억울한 부분도 없지 않다. 나라고 코로나가 바꾼 일상이 어찌 당황스럽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단기간의 재난일 거라는 소망이 만들어낸 일시적 과소비였을 거라 스스로 토닥여본다.


코로나 19로 안그래도 추운 겨울이 더욱 스산하다. 매년 트리에서 쏟아지는 불빛이며 거리에서 울리는 음악들로 소란스럽게 맞이했던 송구영신이지만 올해는 조용한 가운데 보내게 될 것 같다. 간소한 연말을 보내며, 마음에도 욕심에도 미니멀을 장착하고, 이 참에 삼시세끼 돌밥돌밥을 뉴노멀로 삼아 다시 슬기로운 소비생활을 계획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번 겨울, 대한민국의 모든 엄마들 화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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