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얼굴의 주름만큼 내 인격 또한 켜켜이 쌓이길
"엄마, 저 사람은 몇 살이야?"
"아, 저 모델? 엄마랑 나이가 같아."
"에엥? 진짜? 거짓말! 그럼 40 대란 말이야?"
백화점을 지나가다가 벽면에 크게 걸린 화장품 광고의 사진을 보고 초등학생 딸아이와 나눈 대화이다. 아이는 못 믿겠다는 눈치로 내 얼굴과 모델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기어이 촌철살인을 날린다.
"엄마는 아무리 봐도 40대 같은데, 저 사람은 아무리 봐도 서른 살 이상으로는 안 보여."
아니라고 말을 더 해보려 했지만, 어린아이 눈에 그리 비친다는 걸 어쩌랴, 받아들이는 수밖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몇 년 전, 우리 동네에 보톡스 열풍이 불었었다. 보톡스는 예나 지금이나 호황이지만 우리 동네에 불었던 열풍은 큰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동네의 비슷한 또래 엄마들 모두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는 무렵,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자잘한 손이 많이 가지 않게 되는 시기. 실질적으로 육아의 졸업 단계에 이르게 되어 자유다운 자유를 맛볼 때 즈음이었다.
문득 언제 이렇게 늙었지? 살은 언제 이렇게 쪘을까? 내가 다시 임신하기 전의 몸무게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 삶은 이렇게 끝인가? 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을까? 등등 엄마로서가 아닌 여성으로서 나를 쳐다보기 시작하는 시기가 되면 보톡스 바람이 들불처럼 번져간다. 평생 피부과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던 엄마들이 피부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엄마의 질풍노도' 시기. 일단 외모 경쟁력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면 잃었던 자신감도 어느 정도 돌아오는 법이라나 뭐라나.
나도 그 틈에 끼어 처음으로 보톡스를 맞아 보았다.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맞은 다음날부터 이마의 잔주름은 자취를 감추었고 각진 사각턱은 갸름해졌으며 특히나 좋았던 것은 미간을 찡그릴 수 없는 탓에 아이들에게 화낼 때조차 인상 찌푸린 얼굴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세상에나, 거기다가 보는 사람마다 젊어 보인다는 덕담을 건네는데 이건 몇 번을 들어도 새록새록 달콤한 말이었다.
내친김에 보톡스에서 한발 더 나아간 엄마들도 있었다. 물광주사, 백옥주사, 신데렐라 주사 같은 아름다운 이름이 붙은 주사들을 시술한 후엔 얼굴이 그야말로 도자기처럼 반들반들 빛이 났다. 엄마들이 가장 예뻐지는 나이, 바로 40대임을 증명하듯 피부의 탄력은 새로 살아났고, 팔자주름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져 갔으며 이마는 봉긋하게, 꺼진 볼은 빵빵하게 살아나는 것은 매번 마주하는 신기한 마법이었다. 자연스럽게 40대 아줌마들의 주된 대화는 어느 병원의 어느 주사, 어디서 맞은 보톡스가 좋다더라는 이야기로 온통 채워져 갔다.
그런데 거기까지. 보톡스의 효과는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을 넘지 못했다. 그 시간이 지나면 나도 모르게 다시 미간이 찌그러져 있었고, 이마의 주름은 그 깊이를 더해갔으며 턱은 또 네모의 꿈에 가까워져 갔다. 그렇게 다시 보톡스를 맞아야 되는 때가 찾아오면 나는 매번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언제까지 맞아야 하지? 그런데 나는 진짜 왜 보톡스 주사를 맞을까? 무엇보다 나는 눈가의 잔주름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매번 같은 갈등으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문숙'이라는 노년의 배우를 인터뷰한 기사를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잘 모르는 시대의 배우였다. 오랜 외국 생활 끝에 한국에 돌아왔다는 그 배우는 염색하지 않은 희끗희끗한(아쉽게도 완벽한 백발은 아니었다.) 머리를 길러 단정하게 하나로 묶고 있었고, 화장기도 없었다.
꾸미지 않은 모습 속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단단함이 느껴졌는데, 정말 오랜 요가와 명상으로 마음이 단련된 것 같았다. 연예인이, 그것도 초로의 여배우가 다시 한국에서 활동을 하려는데, 염색은 물론 보톡스도 맞지 않은, 주름살 가득한 맨 얼굴을 내놓고 화면에서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라니! 너무나 신선했다. 무엇보다 정말 멋있었다. 그것도 궁극의 외모지상주의가 활개를 치는 동안 천국, 무려 대한민국에서!
그랬다. 곰곰 생각해보니, 아마도 나에게는 남들과 다르게 살아갈 용기가 조금 부족했던 것 같다. 모두들 '동안'이 되려고 노력하는데 나만 혼자 주름살을 늘려가도 되는 것일까? 나만 늙으면 어쩌지? 그 쓸데없는 걱정이 보톡스와 이별하는데 장애가 된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내 눈에는 늙지 않는 뱀파이어 여배우보다 눈빛이 살아있는 초로의 여배우가 더 예뻐 보였는데 말이다.
사실 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할 때면 그 사람의 외모가 잘 보이지 않는다. 마주 앉은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어떤 말투를 가졌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이 고상하게도 천박하게도 보일 뿐, 외모로 호감을 느낀 적은 없다. 아무리 곱고 예쁜 얼굴을 가졌다 해도 시종일관 명품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댄다든지, 고위층이나 부유층과의 관계를 과시한다든지,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은근한 자랑을 늘어놓는다면 나는 단박에 그 사람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이왕이면 단박에 정나미가 떨어지는 사람보다 곱씹을수록 기분이 좋고, 예의 바른 사람, 뭔가 배우고 싶고 닮고 싶은 매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더 좋았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온 날은 기분이 좋았고, 외적인 아름다움은 그런 만족감에 낄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더 이상 보톡스를 맞지 않는다. 거리두기와 마스크로 얼굴을 내놓고 다닐 일이 없다는 것도 한 몫했지만, 아마도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듣기 위해 몸부림치는 데 흥미를 잃어서일 게다. 젊어 보인다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그것을 위해 바등거릴 시간이 아까워졌으니까.
나는 세월이 내 얼굴에 남겨놓는 흔적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다만, 늘어가는 얼굴의 주름만큼 나의 품격 또한 켜켜이 쌓여가길 바란다. 그래서 종내에는 멋진 노인이 되길. 그러기 위해 나는 많은 좋은 책을 읽고, 정갈한 음식을 먹으며, 상쾌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일 것이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매끈한 얼굴 대신, 푹 꺼진 볼과 사방팔방 깔린 잔주름으로 멋진 웃음을 가진 채 나이 드는 사람으로,
폼나는 옷을 입고 멋진 가방을 든 친구보다, 텃밭을 일구며 재미를 붙였다는 친구의 따뜻함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이 들어갈 것이다.
노화와 싸우지 않는 멋진 삶, 나는 그런 나의 잔잔한 미래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