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한시십오분 Jan 07. 2023

스물세 번째 심상.

오랜 그림을 붙잡고 싶지 않다.

사용 프로그램 : CInema4D, Redshift, AfterEffects


오랜 그림을 붙잡고 싶지 않다. 

미온한 손으로 그린 어리숙한 그림을 

지나온 계절만큼 몇 번이고 덧대고 있다. 

이 시간의 끝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뒤엉킨 감정은 스쳐 지나갔다. 

지탱한 사고는 가히 추상적이었다. 

모호한 풍경의 그림을 오래 잡고 싶지 않다.




  삶을 마칠 때 무엇을 준비할 수 있을까. 까만 천장을 공허하게 바라볼 때 스며드는 생각이다. 무어라도 남기고 싶어 시작했던 창작이다. 목소리를 남기고 싶어 음악을 했고 상상을 보이고 싶어 영상을 했다. 마지막으로 감정을 전하고 싶어 글을 썼다. 한때는 살아왔던 흔적들이라도 있으니 언제 죽음을 맞이해도 괜찮단 생각을 가졌다. 촌스러워도 온전한 나를 표현했던 단편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서 색이 많이 바랬다. 오직 잘해야 한다는 강박과 집념의 집합체가 되었다. 삶을 이어가려는 발버둥이나 나를 그렸던 시간과 상이하다. 내 것이라고 여겼던 조각은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삶을 그리는 풍경이 부재하고 있다. 끝을 마주할 때 남길 수 있는 흔적은 오래전에 멈췄다. 


  이뤄놓은 건 맞지 않은 작은 조각뿐이다. 나를 표현하는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광고하고 자본으로 가치 있는, 서로 이어질 수 없는 파편이다. 사회에 살아남기 위해 나를 죽였고 그 사실을 잊었으면서도 자각하고 있다. 애정이 메마른 허울만을 남긴다. 이것들은 내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그만둘 수 없다. 원치 않는 조각을 계속 품으면서 또 다른 형태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 해괴한 그림을 오래 그리고 싶지 않다. 이 그림을 오래 붙잡고 싶지 않다. 


  후회가 흩날려도 결코 쌓이게 두고 싶진 않다. 작업물이 완성되면 의미 모를 한숨이 먼저 나온다. 분명 오늘의 일과를 마쳤다는 안도감이 표면적으로 나타나지만 좋지 않은 뒷맛이 느껴진다. 항상 후회가 뒤따른다.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풍경이 담겨있지 않다. 어떻게 하면 나를 잘 팔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물이다. 매일을 후회가 먼지처럼 날리는 골방에서 보내고 있다. 이 먼지가 쌓이기 전에 그만둘 수 있을까. 후회가 쌓인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앞으로 맞이하게 될 시간들이 같은 모습이라면 먼 미래까지 바라지 않는다. 끝에서는 짧지만 돌아보면 적지 않은 걸음을 걸었다. 다가올 내일이 오늘과 같다면 바라 왔던 지난날을 몇 번이고 곱씹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바라건대 다시 한번 순수했던 내 이야기를 펼칠 수 있기를. 


오랜 그림을 붙잡고 싶지 않다.

작가의 이전글 스물두 번째 심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