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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ㄴㅈㅇ May 15. 2017

경계에 선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것,

『변신』 프란츠 카프카

  군 제대 후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 교양과목으로 ‘사회봉사’를 수강했었습니다. 해당 과목은 학교에서 수업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한 학기 동안 자원봉사를 하고 그 소감을 레포트로 제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학점이 매겨지는 게 아니라 이수/미이수로만 나뉘었기 때문에 부담은 적었으나, 어디서 봉사활동을 할지 결정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평소 노인복지, 아동교육에 관심이 있었고 겉치레로 하는 봉사활동보다는 진짜 생생한 현장(?)을 느끼고 싶었으나 그런 환경을 제공하는 곳은 많지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중랑구 드림스타트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서울역 노숙자를 인터뷰한 후 느낀 소감을 제출하는 것으로 해당 과목을 이수할 수 있었습니다.


  한 학기의 봉사활동 중 중랑구에서의 수업도 좋았지만, 제 마음을 더 울렸던 곳은 서울역이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총 20명 가까이를 인터뷰했습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느꼈던 것은 유명한 ‘안나 카레리나의 법칙’처럼 불행한 가정의 모습은 저마다 달랐다는 것입니다. 제각기 다르고 제각기 불행한 모습들. 보증을 잘못 서서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사연은 양반에 속했습니다. 딸이 강간을 당해 아내가 미쳐서 자살하고 자신 또한 알콜중독자가 되어 거리로 나온 아저씨. 아내는 도망가고 아들은 도박으로 집안의 전 재산을 날린 아저씨. 전기기술자였으나 일감이 끊겨 가족이 생업에 나섰지만 아내는 도망가고 딸은 행방불명이 된 아저씨 등.. 저마다 가슴에 담아 두었던 한을 토해내느라 인터뷰 시간은 길어지기 일쑤였습니다.


갈 곳 잃은 사람들


지수엄마도 그러다가 안오더라고...”


  인터뷰했던 분들 중 아직까지 ‘지수아빠’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다른 분을 인터뷰하고 있었는데 나에게 먼저 다가와서 얘기를 하자고 청하신 분이었습니다. 노숙하시는 분들을 인터뷰할 때 이름을 묻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한 번도 이름을 묻진 않았는데, 먼저 자신이 ‘지수아빠’라고 소개를 하셨던 그분은 예전엔 조그마한 공장의 사장님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때는 성북동에 으리으리한 집도 있었지만 IMF 위기를 정면으로 맞고 파산해버린 그와 그의 가족. 하지만 가족 간의 사랑이 워낙 단단하기에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옅어지고 채권자들의 빚 독촉이 거세지자 할 수 없이 혼인관계에 의한 채권채무로 인해 명목상 이혼을 하셨습니다. 그때까지도 그분은 안심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가족 간에 감정으로 인한 불화나 의견차이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이혼을 했던 것이기에, 법적으로는 남남이지만 여전히 가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겠죠. 그 무엇도 다 받아줄 수 있는 ‘가족’이라고 말이죠.


  실제로도 아내였던 ‘지수엄마’는 이혼 후에도 서울역에 자주 찾아왔었다고 합니다. 올 때마다 재기의 가능성을 물으셨지만 현실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날이 갈수록 발걸음이 뜸해지면서 3년이 지난 후부터는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 그 자리 똑같은 계단 층수에 앉아 있음에도. ‘언젠가는 오겠지’하며 기다린 것이 10년이 넘었다는 말을 할 때쯤 눈물을 흘리셨는데, 대화를 하면서 끊임없이 들이키는 술기운 때문인지 지난 감정에 대한 서러움 때문이지 그렇게 생면부지의 학생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의 눈. 아저씨의 눈에 얼핏 지나갔던 배신의 감정과, 그 위에 쌓인 세월의 먼지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이유 따위는 초월했다고 굳건히 믿었던 내 가족이 실제로 자신이 알던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지수아빠’는 길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의 신화라는 것


  우리는 가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세상이 험난하고 냉혹해질수록 가족이 필요하고 그들에게서 위로를 얻습니다. 가족은 회사처럼 나를 능력으로 판단하는 곳이 아니며, 무언가를 해내야 되고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난 곳이라서 그렇습니다. 즉,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인정받고또 언제나 사랑받는 곳이라는 믿음 덕분에 가족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영원한 안식처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혹자는 이러한 믿음을 '가족의 신화'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개념을 따뜻하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가족만큼 서로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고 상처를 주는 존재도 드물기 때문이죠. 명절 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TV 드라마에는 넓은 거실에서 다 같이 밥을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오지만, 실제로는 각자 알아서 먹고 저녁에 잠깐 만나서 인사하고 방에 들어가기 바쁜 게 현실입니다. 혹은 그조차도 못하는 가정도 많습니다.


  나아가 현대사회에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부터 가족이라는 공동체도 전혀 다른 개념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애가 자라면 내 노후를 조금 도와주지 않을까?’라며 노후대책의 일환으로 양육을 생각하고,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옆집 철수는 금수저인데, 나는 왜 흙수저 집안에서 태어났을까’라며 수저계급론으로 부모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기도 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우리 부모/자식은 그렇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고(혹은 믿고) 있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가 깊숙이 들어올수록 우리가 믿는 가족의 신화는 점차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 자본주의가 가족의 신화를 깨뜨리는 상황을 아주 예리하게, 그리고 아주 바닥까지 끌어내려서 가족의 의미를 묻는 작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최근 작품일 것 같지만 무려 100년 전 작품이죠.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소개합니다.




  카프카의 『변신』은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라는 주인공 그레고르의 묘사로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이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다시 일상성을 되찾고 잠시나마 가족과 그레고르와의 공존관계가 지속되는데, 그것도 잠시뿐.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협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던진 사과를 맞게 되고, 이것이 등에 박혀 썩어 들어가면서 그레고르는 조용히 숨을 거두게 됩니다.


  민음사 기준으로 분량이 70p 밖에 되질 않고 줄거리도 단순하지만, 사실 『변신』은 그리 만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이 작품은 크게 3개의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고, 각 사건들 사이에는 가족의 일상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부에서는 그레고르의 변신과 가족 간의 갈등. 2부에서는 가족 내에서 그레고르의 소외화. 3부에서는 ‘벌레’의 추방과 죽음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변신』에서는 그레고르가 아니라 그레고르를 바라보는 3명의 가족들 즉,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특히 여동생을 주의 깊게 보았을 때 카프카가 의도한 메세지가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본 포스팅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몇 가지 생각했던 점들을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으아아아니내가 고자벌레라니!!


  1부 처음에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거동이 불편한 점을 얘기하고서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충분히 당혹스러울 만도 한데,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고된 직장생활에 대해서 푸념을 늘어놓는데, 매일같이 기계처럼 일어나서 출근하다 갑자기 원심력을 잃어버려 혼란에 빠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몸이 상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방에서 나오려고 합니다. 하지만 상사에 의해 벌레의 모습이 목격되자 상황은 급격하게 달라집니다. 상사는 도망치고 어머니는 혼절합니다. 동생은 울고 아버지는 적의에 가득 찬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25p) 그를 방에 집어넣습는다. 문이 닫혀있을 때만 하더라도 가족들은 그레고르를 가장으로 여기며 늦지 않게 출근해주길 바랐는데, 막상 벌레가 된 그의 모습(=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모습)을 본 후부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며 가혹하게 대하기 시작합니다.


이보시오 의사양반! 내가..


  2부에 와서는 그레고르가 벌레로의 자각이 강해지고, 그에 비례하여 점차적으로 소외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그는 천장에 즐겨 매달려 있었다(45p)’ 등의 표현을 통해 그가 내면적으로도 벌레가 되어가는 모습이 묘사되죠. 특히 2부에서 벌어지는 ‘가구를 옮기는 사건’은 그레고르가 가족들에게 더 이상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상황을 드러냅니다.


  그레고르에게 가구란 어떤 의미인가요. 철저하게 고립된 방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채취가 남은 물건을 꼽으라면 그에겐 가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전부터 가구에 대한 떡밥이 많이 깔리긴 했습니다. 변신한 아침 첫날 상사가 찾아왔을 때 그레고르는 벌레라면 자연적으로 ‘기어서’ 나가야 하건만, 사람들을 보겠다며 다리에서 진물이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립보행을 시도하는데, 이때 옆에서 지지대가 되어 주었던 것이 그의 가구(장롱)였습니다. 나아가 변신 이전에 그의 취미라곤 실톱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었는데(19p), 그 실톱이 보관되어 있던 곳도 가구(장롱)였으며, 그가 인간일 당시 가졌던 모든 추억이 남아있는 물건도 가구(책상)였습니다. 즉 그레고르에게 있어서 가구를 뺏는다는 의미는 인간일 당시 쌓았던 모든 추억의 집합체이자앞으로 인간임을 유일하게 증명할 수 있는 희망을 앗아가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인간의 존재의미가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추억, 기억의 총합’임을 생각해본다면, 가족들은 그의 마지막 남은 인간다움에 사형을 내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런 그의 가족들의 행동들은 필요 없는 존재란 사라져도 무방하다라는 냉혹한 현실을 비틀어 표현하는 것으로까지 보여집니다.





  이를 뒤늦게 알아차린 그레고르는 자신의 과거를 통째로 들어내려는 그레테와 어머니를 저지하려 하고, 마지막 남은 듯한 액자를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이 액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앞서 떡밥을 뿌려두었듯, 그레고르가 액자 프레임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유희/취미를 의미하는 것이고(19p), 화보 잡지에서 오려낸 사진(9p)이라는 것은 영업사원의 특징상 직업적으로 많이 보던 패션 화보에서 한 장을 발췌한 것이니 직장/직업을 의미하는 것이며, 여자사진이라는 것은 인간의 성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털모자에 털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여자사진, 그리고 그 사진을 감싸고 있는 액자 그 자체는 인간으로써 누릴 수 있는 직업, 유희, 성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성을 상징하는 집합체처럼 느껴졌습니다. 결국 마지막 남은 인간성을 빼앗기기 싫어 어머니와 그레테를 막아서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오승환의 투심과 맞먹는 아버지의 사과였고 곧 들이닥칠 그의 죽음이었습니다. 가족들은 무기력하고 경제력을 상실한 그레고르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3부에서는 하숙생이 등장합니다. 그레고르가 벌어오던 수입이 끊기고 가족들이 생계의 전면에 나섰지만 벌이가 충분하지 않아 하숙생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등당하는 하숙생은 자본주의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레고르의 변신으로 인해 다시 가장으로의 권위를 되찾은 아버지마저도 하숙생들에게는 식사 자리에서 상석을 내주고야 마는데, 한 가정 내에서 자본주의의 상대적 위치를 냉소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겠죠. 그리고 3부의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할 사건이 그레고르와 하숙생들의 만남으로 인해 벌어지게 됩니다.


  아버지는 하숙생들 앞에서 그레고르가 등장하자 어떻게든 하숙생들을 방으로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아버지와 가족들은 이미 한 번 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그레고르가 상사에게 모습을 보이자마자 그레고르가 벌어오던 수입이 끊기지 않았던가요. 이번에도 똑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아버지와 가족들은 안간힘을 쓰지만 하숙생들은 기분 나빠하며 집을 나가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이 대목에서 가족들의 인내심은 바닥나게 됩니다. 그레고르가 벌어오던 수입이 끊겼을 때는 그를 벌레로 여길지언정 어찌되었든 공존은 하려고 했지만, 그레고르의 존재가 자신들의 목에 칼끝을 드미는 생각이 들자 ‘그레고르를 없애버리자’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아버지와 여동생은 기막힌 논리를 들어 어떻게든 그레고르를 내보내려고 합니다. 저는 아버지와 여동생이 서로 주장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카프카의 냉소적인 문체를 너무나도 잘 느낄 수 있었는데, 그들의 논리를 조심히 뜯어보면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여동생은 각각 다른 원인을 들며 그레고르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저 애가 우리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다면」 하고 아버지가 되풀이했는데, 눈을 감음으로써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누이동생의 확신을 받아들였다. 「그렇기라도 한다면 저 애와 협상이라도 되련만. 그런데 저렇게ㅡ」

...

「내보내야 해요」 누이동생이 소리쳤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에요, 아버지. 이게 오빠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해요. 우리가 이렇게 오래 그렇게 믿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불행이에요. 그런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오빠일 수가 있지요? 만약 이게 오빠였더라면, 사람이 이런 동물과 함께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아차리고 자기 발로 떠났을 테지요. 그랬더라면 오빠는 없더라도 계속 살아가며 명예롭게 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을 거예요...」                                                                                                                - 70p


  아버지와 여동생의 주장을 들어보면 얼핏 그럴 듯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우선 아버지가 말하는 ‘협상’이라는 것이 사실 에둘러 표현했지만 벌레와 이야기가 된 들 무슨 협상을 할 수 있을까요. 즉 ‘협상’이라 표현했지만 사실 ‘(잘 타일러서) 쫒아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버지와 여동생의 논리는 어떻게 받아들이든 같은 결론이 나게 됩니다.


‘저 애가 우리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다면, 저 애와 협상이라도 해볼 텐데’

= (가정) 저 애가 우리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다면, 저 애를 (잘 타일러서) 쫒아낼 텐데

= (현실) 저 애가 우리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저 애는 벌레야.

= (결론) 저 애는 벌레니까 쫒아내야 해

→ 결국 그레고르가 아버지의 말을 알아듣던, 듣지 못하던 쫒겨나야만 하는 논리.


‘만약 이게 오빠였다면, 자기 발로 떠났을 테지요’

= (가정) 만일 벌레가 오빠라면, 오빠는 이미 집을 나갔을 거다.

= (현실) 벌레가 집을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벌레는 오빠가 아니다.

= (결론) 오빠가 아닌 벌레는 쫒아내야 한다.

→ 결국 벌레가 그레고르이든 아니든 그레고르는 쫒겨나야만 하는 논리.


  결국 아버지나 여동생이나 그레고르가 벌레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레고르를 내보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그의 존재자체가 초래하는 경제적 위기때문입니다. 결국 그레고르는 경제력을 상실함으로써 가족과 겨우 공존하는 존재가 되었으나, 가족들의 생계를 위협할 정도에 이르러서는 어떻게든 추방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설사 그 존재가 며칠 전까지 가족이었다 할지라도요.


  소설의 마지막은 그레고르에게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평화롭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레고르가 등장하는 1부에서는 소설의 배경이 매우 어둡고 비도 오고 날씨도 흐린 반면, 그가 죽은 후 소설의 말미에서의 날씨는 매우 화창합니다. 더구나 아버지가 빚을 지고 그레고르가 일자리에 뛰어들면서부터 항상 혼자서 기차를 타고 출근하는 여행같지 않은 여행을 했다면, 그레고르가 죽은 이후에는 그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이 진짜 여행같은 여행을 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거라 기대하며 화창한 햇살을 받고 여행을 떠나는 그레고르 가족들의 모습뒤에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철저하게 조롱하는 카프카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그레고르는 사라져야할 대상으로 취급됩니다


그 다음 그레고르의 시선은 창문을 향했는데 흐린 날씨가ㅡ빗방울이 함석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ㅡ그를 아주 우울하게 만들었다.  (중략)「아 아」 그는 생각했다. 「이 무슨 고된 직업을 나는 택했단 말인가! 날이면 날마다 여행중이라니. 집에다 벌여놓은 본상점에서 일하는 것보다 직업상의 긴장이 훨씬 더 큰데다가 그 밖에도 여행의 고달픔이 덧붙여진다.」                                                                                              - 10p

vs 

그러고 나서는 셋이 다 함께 집을 떠났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리하여 전차를 타고 교외로 향했다. 그들 모두가 탄 칸은 따뜻한 햇볕이 속속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좌석에 편안히 뒤로 기대고, 장래의 전망에 대해 논의했는데 좀더 자세히 관망해 보니 장래가 어디까지나 암담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78p



그레고르는 왜 인간이 되지 못했을까


  카프카의 『변신』은 그레고르가 인간으로의 돌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주제가 아닙니다. 소설을 보다 보면 이상함을 느끼는 지점이 그레고르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그레고르 그 자신도, 나머지 가족들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레고르를 포함하여 가족들에게 그레고르가 벌레라는 사실은 확고부동한 사실입니다. 나아가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부분만 아주 판타지처럼 묘사되어 있을 뿐,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건가요.


  인간이 벌레로 변하는 것은 너무나도 판타지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뒤집어 말하자면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한 채로 소설이 시작되었다면, 즉 소설의 시작이 판타지로 시작했다면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판타지스러운 부분이 유지되고 있어야만 그레고르가 인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적어도 다른 누군가는 벌레가 아니더라도 동물로 변한다거나 마법을 부리는 해리포터 같은 존재가 묘사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판타지한 묘사가 이어졌어야만 그레고르가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의 첫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인 묘사가 너무나도 현실적입니다. 즉 그레고르 입장으로 봤을 때 출구가 없습니다. 출구가 없기에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가족의 입장에서는 그레고르가 벌레인 사실이 변수가 아니라 상수입니다. 카프카는 왜 이렇게 그레고르를 표현했을까요.


  생각해보면 이는 『변신』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는 카프카의 문학적 실험이 아닐까라고 짐작해봅니다. ‘너희 가족들 중 한 명이 그레고르처럼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그것도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때 너희들은 어떻게 행동할래?’ 라고 묻는 것입니다. 더 쉽게 예를 들자면, 가족 중에 사업에 실패한 가장이 있거나 취업에 실패한 취준생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사랑으로 그들을 감싸고 위로합니다. 하지만 카프카는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그들이 영원히 재기할 수 없거나 취업을 할 수 없다면영원히 벌레일 수밖에 없다면 그때도 그들을 똑같이 사랑할 것인가? 나아가 그들이 무력함을 넘어서 우리의 생계를 위협할 때그때도 가족의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에 대한 본인의 대답을 그레고르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을 통해 제시합니다. 물론 그 끝은 모두 그레고르를 버리는 것으로 결정되지만 말이죠.


  물론 그렇다고해서 카프카가 그레고르를 세상 불쌍한 존재로만으로 서술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소설이 거의 그레고르의 1인칭으로 서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벌레라는 현실적 문제에서 회피할 뿐이지 맞서서 고민하거나 성찰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길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그레고르의 관점은 그가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에 크게 영향 받지 않습니다. 나아가 가족에게 보이는 따뜻한 애정조차 현실적 문제에 대한 고민이 부재한 채 인간일 때의 과거에 대한 집착정도로 그치고 있어 그레고르라고 해서 카프카가 특별히 좋게 서술하진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나아가 그레고르가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 소리를 듣고 마지막으로 방에서 탈주(?)하는데, 이는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가 듣고 싶다거나 여동생을 위해서 한 행동이라기보다 여동생을 음악학교에 보내줄려고 했던 자신의 결심에 스스로 감동받아서 감행했던 것입니다. 즉, 그레고르 또한 자신이 가족밖에 모르는 벌레가 되었던 결정적 원인일지도 모르는 사고관념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회피하거나 이해하려들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레고르가 진정 주체적 자아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자신을 벌레로 규정하는 모든 것에 반항하고 어떻게든 인간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만 했습니다(직립보행 연습을 한다던지;;). 아니면 최소한 집을 뛰쳐나오기라도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소설의 말미까지 그는 자신이 벌레라는 사실을 부정하며 인간의 세계에 머무르려하고 자신을 버린 가족의 주변부에서 인정받기를 기대하며 맴돌다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진짜 변신하는 사람이 누굽니꽈아아아아아!!!!!


  이 책의 제목은 『변신』입니다. 소설이 1인칭 시점이라 얼핏 생각하면 '그레고르의 변신'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소설의 시작부터 그레고르는 이미 변신이 끝난 상태였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을 마친 상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소설에서 진정으로 변신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저는 이 소설에서 변신하고 있는 사람, 이 소설에서 눈여겨 봐야될 사람은 그레고르 보다는 그레고르의 가족들이라고 생각하며, 진정한 주인공은 가장 입체적인 변화를 보여준, 가장 극적인 변신을 한 그레테라고 생각합니다. 


  그레테는 처음부터 벌레인 오빠에게 밥을 준다거나 방을 치워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여러 가지 도움을 주게 됩니다. 겉보기에 그레테의 행동이 그레고르를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레고르가 인간성을 망각하는데, 벌레로서의 삶에 적응하도록 부추기는 행동들입니다. 그녀는 그레고르를 벌레의 먹이로 사육하며, 벌레처럼 기어다닐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주고 방안의 지배자처럼 행동합니다. 덕분에 그레고르의 인간성은 빠른 속도로 희미해져 갑니다.


  즉, 그레테의 행동은 그레고르로 하여금 현실을 바꾸지 않고 점차 적응하게 만드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이미 여러해 동안 취업을 못하고 있는 오빠에게 힘내라며 롤을 가르쳐주는 동생이라고 할까요. 롤 티어를 올린다며 밤새도록 게임을 하는 오빠에게 당장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어 도움은 되겠지만, 오빠가 재취업을 하도록 돕는 행동이라고 보기에는(=오빠가 벌레에서 인간으로 변신하도록 도와주는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그레테의 행동은 가구를 치우는 사건에서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그레고르의 인간성을 원초적으로 말살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레고르의 입장에서도 그레테는 통곡의 벽이었습니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된 이후로 인간성을 되찾고자 하는 시도가 2번 있었는데, 소설 속에서 그레테가 그 시도를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레테가 가구를 옮길 때 이를 저지하려다 아버지에게 사과를 맞았고, 두 번째는 그레테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러 나왔지만 결국 그레테가 그를 추방으로 내몬 결단의 시발점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그레고르의 시도는 번번이 그레테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레고르와 벌레를 분명하게 구분할 것을 가족 중 처음으로 요구했던 그레테는 그레고르를 ‘그것’이라고 부르다가, 그레고르가 죽은 후에야 시체를 보면서 다시 ‘그’라고 부릅니다. 나아가 권위적인 아버지마저도 그레고르를 내쫓아야 하는 결정의 순간에는 머뭇거리지만 그레테는 얄짤없습니다. 가족 중에 가장 먼저 선택을 내리고 이를 행동에 옮길 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촉구합니다.


  그레테의 단죄로 인해 그레고르는 쓸쓸히 죽어가고, 최초로 발견될 때도 직장 상사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죽었을 때도 가정부에 의해 발견됩니다. 변신한 이후 탄생과 죽음이 가족이 아니라는 점에 있어서 가족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고립된 한 인간의 탄생과 최후를 카프카는 ‘타인에 의해 목격되어진 존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에 대한 카프카의 깊이는 이처럼 우울한 것 일까요.


「아버지 어머니」 하고 누이동생이 서두를 떼며 손으로 탁자를 쳤다. 「이렇게 계속 지낼 수는 없어요. 아버지 어머니께서 알아차리지 못하셨대도 저는 알아차렸어요. 저는 이 괴물 앞에서 내 오빠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겠어요. 그냥 우리는 이것에서 벗어나도록 애써봐야 한다는 것만 말하겠어요. 우리는 이것을 돌보고, 참아내기 위해 사람으로써 할 도리는 다해봤어요, 그 누구도 우리를 눈곱만큼이라도 비난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 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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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에서 눈도 떼지 않으며 그레테가 말했다. 「좀 보세요, 그가 얼마나 비쩍 말랐는지. 그는 벌써 퍽이나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잖아요. 식사가 들어가도 그대로 되나왔지요.」                                            - 74p


  카프카는 작중 인물들 중에 그레테에게 가장 입체적인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족의 신화를 공유하고 서로를 사랑으로 감싸 안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그레테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목 끝에 경제적인 위협이 가해지면 그 순간 가족의 신화는 여지없이 무너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에게 이 책은 ‘가족이란 신성한 것’, ‘가족은 모든 아픔을 치유해주는 곳’과 같은 가족의 신화를 맹렬히, 그리고 나지막이 조롱하는 소설처럼 느껴집니다.



총평 경계에 선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것,


  그레고르는 육체적으로는 ‘벌레’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인간’입니다. 즉, 소설의 내용을 통틀어 그레고르는 벌레와 인간의 경계에 서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은 한쪽에 속해있지는 않지만 동시에 편향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덕분에 오히려 두 세계를 동시에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레고르는 자신이 벌레로 변신함으로써 가족이란 공동체가 더 이상 사랑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가족의 변신을, 자신이 끔찍이도 아꼈던 여동생 그레테의 변신을 목격하게 됩니다. 읽다 보면 카프카의 잔인할 정도로 냉소적인 설정으로 씁쓸하기도 하지만 그런 설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너무나도 현실적인 참담함이겠죠.


  서울역에서 만났던 ‘지수아빠’ 또한 아마 그레고르와 같은 과정을 겪었을 것 같아 뒷맛이 굉장히 씁쓸했습니다. 언제까지나 자신을 이해해주고 다 같이 힘을 모아 어려움을 극복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레테처럼 변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넘어서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련이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지수아빠’와 인터뷰를 할 당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라는 말은 인생이 망가졌을 때 믿었던 가족이 다 떠난 일이, 그분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고 가족이 내 곁에 내 편을 들어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내가 그럴 용기를 가진 사람인지 먼저 되묻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내가 그레고르가 되었을 때, 내가 그레고르 가족의 입장이 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한 번쯤은 경계에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질문해볼 것을 권합니다. 카프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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