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멜라니 조이
전 생선회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횟집으로 회식을 가면 우스갯소리로 저 때문에 충분히 못 먹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입니다. 살아있는 생선을 고르면 아주머니의 요란한 칼솜씨에 채 몇 분이 걸리지 않아 입속으로 들어오는데, 정말 정신없이 먹방을 찍습니다. 뭔가 싱싱하고 탱글탱글(?)한 식감이 너무 좋고, 초장의 알싸한 맛과 된장의 구수한 맛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그냥 생선회라면 덮어놓고 좋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여행하던 스시집이나 횟집은 꼭 가보곤 합니다.
하지만 생선회를 처음 접했을 때는 마음 붙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방금 전까지 나를 바라보던 광어가 아주머니의 칼질 한 번에 머리가 날아가고, 손질 한 번에 배가 갈라져 살점을 뜯기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무슨 거룩한 심성을 가진 것도 아니라서 회가 나오자마자 이성을 잃고 먹긴 했지만, ‘내가 이렇게 마음대로 먹어도 되나’라는 찜찜함은 남아있었습니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는 이러한 찜찜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멜라니 조이는 사회심리학자로서 육식주의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우리가 육식을 하면서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육식은 전 지구적 문화처럼 되어버렸는데, 이게 과연 타당한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되묻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사회학자인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식의 종말」과 큰 차이점이 있다면 「육식의 종말」은 육식주의의 폐해와 부작용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수치적 근거를 들어서 설득했다면, 「우리는 왜..」는 한 편의 호러영화처럼 적나라한 현실을 그대로 들이댑니다. 전자가 딱딱하고 학술적인 느낌이라면 후자는 ‘육식주의 이거 큰일 났다.’, ‘이대로 가면 안 된다. 지금 멈춰야 한다.’라는 뉘앙스를 가득 담아내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난 한 해 동안 사육되고 운송되고 도살된 100억 마리의 동물 중 몇 마리를 보았는가? 도시에 살고 있다면 거의 못 보지 않았을까. 시골에 산다고 해도, 언덕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를 몇 마리나 보았는가? 기껏해야 한 번에 50마리 정도? 닭이나 돼지나 칠면조는 어떤가? 한 마리라도 본 적이 있는가? 이 동물들을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 영화에서는 몇 번이나 봤는가? 거의 매일 고기를 먹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식략이 되는 동물들과 평생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인데도 우리 대부분은 무심히 넘겨 버린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 49p
49p에서는 흡사 저자가 독자를 앞에 앉혀두고 압박면접을 하듯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냅니다. 물론 독자가 제대로 답을 하지 못 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몰아치는 것이겠죠. 두 번째 읽으면서 저자가 왜 이렇게 격정적으로 썼는가를 고민했습니다. 아마도 다분히 의도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레미 리프킨처럼 수치나 들먹이면서 빙빙 둘러서 얘기하니까 아직도 모르겠지? 기다려. 내가 진짜를 보여줄게’ 라며 적나라한 현실을 독자의 눈앞에 들이댄 것 같습니다. 충격적인 도축 실태를 낱낱이 보여줌으로써 육식문화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격정적인 호소는 평소에 무심코 육식을 하던 독자들의 관심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냅니다.
저자는 육식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며 육식은 일종의 ‘학습된 선택'이라고 주장합니다. 채식주의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채식을 위주로 한 식습관을 말하는 것, 혹은 그 의지의 표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식하는 사람들에게는 왜 그러한 정의가 없느냐며 문제제기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육식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지적합니다. 저자가 굳이 육식주의라고 명명한 이유는 단지 육식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인종차별, 여성차별 등 각종 차별 역시 사람들이 그러한 차별을 ‘차별’로 인식하고 명명하기 전까지는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만약 육식마저도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선택지로 바뀔 수 있다는 논리도 성립합니다. 즉, 저자는 육식주의라는 견고한 신념을 무너뜨림과 동시에 육식주의는 언제든 치환 가능한 개념임을 책 전반에 걸쳐서 주장합니다.
이 책이 육식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하더라도 완성도 부분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중 결정적인 한계라고 생각되는 점은 적절한 대안 제시가 없다는 것입니다. 적나라한 현실을 들이댐으로써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야겠다는 저자의 의도는 일견 성공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육식을 둘러싼 거대한 사회경제적 시스템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채 마무리하고 있어 도덕적 기준만 앞세운 윤리 교과서처럼 느껴집니다. 가령 소고기의 경우 미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수입되어 우리의 식탁 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미 완전한 글로벌화가 완료되어 육식은 어느 한 국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전 세계적으로 얽혀있는 문제입니다. 즉, 세계화된 식육사업과 유통구조는 원천적으로 통제가 불가능한 것이죠.
나아가 육식을 반대하는 저자의 주장 중 한 가지는, 동물도 우리와 같이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먹기 위해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를 보면 식물 또한 감정을 가졌다는 결과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모를 뿐이지 만약 식물도 감정을 가진 생명체라면 우리는 동일한 논리를 가지고 채식을 할 수 있을까요. 식물은 감정을 가지지 않은, 완벽하게 먹어도 되는 것이라고 간주해도 되는 것일까요. 이처럼 육식을 대신할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이 책의 큰 공백처럼 느껴집니다. 만약 이 책을 읽고 저자의 주장에 동조한다 하더라도 ‘그다음은?’에 대한 물음표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저는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식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며, 개인적인 핑계라면 너무 맛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고기를 먹고 생선회를 즐기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이 있다면 ‘한 번이라도 그들을 생각하자’라는 것입니다. 일례로 주변에서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방법 중 한 가지는 마트에서 장을 볼 때 ‘동물복지 마크’가 있는 제품을 구입하는 것입니다. 동물복지 마크는 농림축산검역본부에서 검증된 농장에게 부여되는 인증으로 깨끗한 환경에서 관리를 받으며 자란 가축을 인도적인 방법으로 도축 처리된 상품에만 붙여집니다. 살아 있을 때만이라도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게끔 돕는다면, 차라리 이 방법이 현실적인 대안이자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요.
그렇게 오늘도 육식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