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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멘탈 Aug 01. 2023

사람이 제일 무섭다. 그중 제일은 한국 사람이다.

첫 하숙집, 그리고 삼촌의 두 얼굴 1

그 사람을 나는 ‘삼촌’이라 불렀다. 싫지도 좋지도 않은 그냥 아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 사람이 호주에 와서 살고 있었고 어쩌다 보니 난 그 사람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 사람은 매우 목소리가 크고 아래턱이 나와 불도그처럼 생긴, 그리고 술을 먹으면 진짜 ‘멍멍이’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친절한 듯했지만 가끔씩 불필요한 말들을 내뱉는 짓궂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한국에서는 다니지도 않던 교회를 호주에서 매우 열심히 다니고 있었는데 그건 시드니에서의 교회는 사회생활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와이프를 나는 ‘이모’라고 불렀는데 이모는 착하고 순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Croydon이라는 동네에 있는 작은 타운 하우스를 렌트해서 살았다. 그 사람은 두 개의 독방을 약속했지만 우리가 오고 나니 말을 바꿨다. 그래서 가장 예민하던 시기에 난 서먹하던 아빠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방 세 개의 좁은 집에 그 집 식구 넷에 셰어생 오빠, 그리고 아빠와 나까지 7명이 살게 되었다. 아빠와 나는 그 사람에게 그저 돈의 수단이었을 거다. 변변한 직업도 없던 그 사람에게 우리는 굴러들어 온 호구들이었을 거다. 엄마, 아빠가 그 모든 걸 왜 그냥 수용했는지 아직도 다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엄마는 아빠 성격상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여기서 적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생각했을 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못 본 척 넘어갔지 않았을까.


티브이에서 E.T.라는 영화가 나오던 어느 날과 별다를 것 없는 밤이었다. 정확히는 6월 10일 일요일 밤이었다. 아빠는 방에 있었고 나와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어린아이 둘은 거실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호주 티브이는 뭘 보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한데 그 이유는 중간 광고가 엄청 많기 때문이다. 어렸던 아이들은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방에 들어가 자게 됐고, 나는 어쩌다 보니 그 사람과 단둘이 거실에 남아 티브이를 보게 되었다. 별생각 없이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그 사람이 뜬금없이 내 허리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어버버 하며 밀쳐냈다. 그리고선 무엇인지 모를 싸한 기분에 나 역시 영화를 끝까지 보지도 못하고 쫓기듯이 방으로 올라갔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이후로 그 사람은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 나에게 부적절한 스킨십을 시도했다. 다섯 번을 더. 그때마다 내가 피하면서 왜 그러냐고 물으면 딸 같아서 그러지, 삼촌은 가족이잖아 하며 말 같지도 않은 말들을 늘어놨다. 그러고선 다 같이 있을 때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렇지 않은 듯 지냈다. 지금 돌아보면 아마 그 사람은 간을 봤던 것 같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또 내가 아빠에게, 혹은 다른 누구에게 말하는지. 다 큰 지금에야 생각하면 난 당장에 엄마, 아빠에게 털어놨어야 한다. 하지만 그때는 어린 마음에 후폭풍이 두려웠다. 그래서 난 찝찝하고 기분도 더럽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원래도 짖꿎은 장난과 말을 하는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고 애써 담담한 척을 했던 것 같다. 그러고선 나는 최대한 그 사람과 혼자 남지 않기 위해 애썼다.


어느 오후였다. 그 사람과 단둘이 한 공간에 있지 않으려는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엌에서 그 사람과 맞닥뜨렸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른 어른들은 다 외출 중이었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사람은 갑자기 내 허리를 들어 부엌 상판에 올려 앉히더니 내 볼을 거칠게 잡아끌어내려 입을 맞췄다. 내가 밀쳐내고 뭐 하는 거냐고 신경질을 내자 예뻐서 그러지 삼촌인데 뭐 어때하며 능글맞게 웃었다. 미친놈. 피가 거꾸로 솟구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던,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던, 고작 열다섯 애였다. 입을 연신 손으로 닦아내며 방으로 뛰쳐 올라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문을 잠갔다. 이제 확실했다. 이건 맞지 않았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놓인 상황을 마주했다.


어린 나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아빠나 엄마에게 얘기하는 것은 왠지 하면 안 될 거 같았다. 시드니에서 저 인간의 도움 없이 아빠랑 나랑 둘이 살아남는 것이 그때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 영어는 한없이 부족한 것 같았고 아빠는 나 때문에 집 떠나 외국에 끌려와 고생 중이었다. 아빠가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아마 다시 돌아간대도 난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을 것 같다. 


펜을 들어 다이어리에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나는 대로 적기 시작했다. 총 일곱 번의 추행. 허리를 끌어안고, 허벅지를 쓰다듬고, 귓불을 만지고, 목덜미를 만지고... 결국 입까지 맞췄다. 호주 오고 두 달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부터 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 사람과 겸상을 하고 싶지 않아 이모가 밥을 차려 놓으면 그 사람이 오기 전에 재빠르게 먹고 일어난 다던지, 그 사람이 밥을 다 먹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후다닥 먹고는 했다. 입맛이 없다고 하고 밥을 안 먹고는 모두가 다 잠든 새벽녘에 부엌에 내려가 식빵이나 시리얼을 우걱거리며 먹고 허기를 채울 때도 많았다. 집에 돌아오면 대부분은 방에 문을 걸어 잠그고 틀어박혀 있었고 그 사람이 없을 때나 방을 나서곤 했다. 살이 점점 찌고 머리카락은 뭉텅이로 빠지기 시작했다. 모두 내가 호주에 와서 적응을 하고 사춘기까지 겹쳐 그런 거라 생각했다. 답답했지만 상관없었다. 그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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