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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멘탈 Aug 12. 2023

사람이 제일 무섭다. 그중 제일은 한국사람이다.

첫 하숙집, 그리고 삼촌의 두 얼굴 3

지옥 같았던 하숙집은 나의 의지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벗어날 수 있었다. 걱정과는 다르게 아빠는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금방 스트라스필드(Strathfield)에 있는 하숙집을 찾아 옮겼다. 나의 두 번째 하숙집은 수영장이 있던 대저택이었는데 3대가 같이 살고 남는 방에는 하숙생을 채웠다. 나는 독방을 쓰게 하고 아빠는 집세를 아끼기 위해 다른 아저씨들과 방을 같이 쓰기로 했다. 하숙집 이모는 좋은 사람이었고 나는 첫 이사를 하고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아빠 역시 같이 방을 쓰던 아저씨들과 잘 지냈고 그렇게 첫 하숙집에서 있었던 일들은 덮어졌다.


남편에게 맞고 내 모발폰을 들고나갔던 이모는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오는 주일에 교회를 갔다. 그 사람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뭐가 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린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그 사람이랑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잘 피해 다니는 것뿐이었다. 아빠는 내가 그 사람을 극도로 기피하는 것을 이해하고 아무것도 묻지도 강요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이사를 나오고 그 사람도 곧 이사를 갔다고 했는데 그 이후에 아빠가 그 집에 초대를 받아 갔던 적이 있다. 아빠를 부르다니 참으로 뻔뻔한 사람이다. 찝찝한 마음으로 저녁만 먹고 나와서는 다시는 그 사람 볼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 사람과의 일을 묻어버리고 나 역시 없었던 일처럼 내 인생을 살아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 그렇게 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스무 살 무렵에 그 사람을 실버워터에 있는 나이키 할인 매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마치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나에게 인사하고 나와 아빠의 안부를 물었다. 수백 마리의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이 소름 끼쳤지만 그때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을 하고 인사를 했다. 집에 오는 차 안에서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아는 척을 할 수 있는 건지 생각이 많아졌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었는지 다 잊어버린 사람처럼 행동하는 게 진짜 다 잊어버린 건지 아님 기억을 하면서도 그렇게 행동한 건지. 이래도 저래도 있었던 일이 없어지지 않고, 이래도 저래도 소름 끼치는 건 매 한 가지였다.


더욱더 기가 막힌 건 그 사람이 자신을 '목사'라고 칭하며 자신의 교회를 개척했다는 것이다. 시드니 각지의 한인 슈퍼에 금요일마다 배부되는 한인 잡지에 그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가 버젓이 나와 있었다. 세상에 '목사'라니 해도 너무 하지 않은가? 열다섯 중학생을 탐하고 자신의 와이프를 때리는 사람이 목사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화가 났다. 내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그 사람이 목사로 불릴 자격이 없다고 말해볼까. 아니면 크리스천리뷰(호주에서 발행되는 기독교인 잡지)에 전화를 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소문을 내볼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결국 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다 커서 중고등학생이 됐을 그 사람의 아이들과 그래도 남편이라고 싸고돌던 바보 같던 이모를 생각하니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시간을 그 사람 때문에 더 허비하고 뒤흔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나에게 일어난 그 일이 내 잘 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그 나이에 혼자서 그 정도면 잘 버텼다는 생각으로 자기 위안 삼는 것뿐이었다. 내가 이제 그 사람의 나이가 되어 그 일을 돌아보니 시간이 이렇게 흘렀어도 화가 나고 역겹다. 겪지 않았어도 될 일을 겪은 것 같아 억울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만큼 나도 단단해졌다고 믿고 싶다. 그 시절 나 자신에게 수없이 되뇌었던 그 말들로 큰 대미지 없이 잘 극복했다 믿고 싶다.


돌아보니 가장 간절한 순간에 나에게 필요한 말을 해주었던 금옥이 이모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이 얘기를 듣고 나를 꼭 안아주며 나지막이 그 사람이 어디 사는지 묻던 내 남편도 감사하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치는 거 마냥 내가 마침내 이 묻어 놓았건 이야기를 글로 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 브런치에게도 감사하다. 이렇게라도 다 털어놓고 나니 마음 한편이 가벼워진 기분이다. 


다시 또 그 사람을 만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제는 그냥 스쳐 지나갈거다.



난 당신이 한 잘 못으로 인해 그때부터 어른을 믿지 못하게 됐어. 누구든지 의심부터 하게 됐지. 그래서 난 유학생 신분일 때 어른들의 도움이 가장 필요했을 때 더 힘들게 살았어야 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스킨십에 거부감이 생겨서 마사지도 못 받아. 하지만 난 망가지지 않았고 더 악착같이 열심히 살았고 여기까지 잘 왔어. 당신이 한 일을 교회건 시드니건 다 퍼트리고 싶었던 적도 많았지만 이모랑 애들 때문에 참았어. 부디 그 이후로는 이모 때리는 일 없이 얌전히 살았길 바라. 사람은 안 변한다는 것을 살면서 배웠지만 목사로 살면서 회개하고 지금까지 했던 잘 못 들을 다 구하고 용서받았길 바라. 다시는 마주치는 일이 없길 바라며 이제 내 마음에서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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