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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ks Oct 04. 2024

개발자 출신의 로스쿨 자기소개서

컴공생, 로스쿨에 도전하다 (8)

원서 접수가 끝난 지 좀 됐다. 자기소개서도 자기소개서지만, 증빙자료 준비하는 데도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들기에 끝마치고 나니 뭔가 하얗게 불태운 느낌이 든다. 앞선 자기소개서 관련 포스트에서는 GPT를 잘 활용하는 방법, 피드백 받을 사람을 정하는 방법 등 정작 자기소개서를 “쓰는” 방법은 언급 없이 곁다리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그랬던 이유는 이미 조금만 찾아봐도 ‘좋은 자기소개서 쓰기’에 대한 글이 수두룩 빽빽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발자 내지는 컴공생이 로스쿨에 가기 위한 자기소개서를 쓰는 방법에 대해서는 찾아봐도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끄적여보기로 했다.



나쁜 재료로 좋은 요리를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지금부터 쓸 이야기는 임의로 추출된 컴공생을 로스쿨에 보내는 방법은 절대 아니다. “컴공생이면 개발자나 하지, 왜 변호사가 되고 싶은가?”는 질문에 '자연스러운'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보통 저렇게까지 비꼬지는 않지만) 입시 대비가 아니더라도 그냥 주변인에게 로스쿨 준비한다고 말하는 순간 수도 없이 마주해야 할 질문이다. 언제는 그게 귀찮아서 일반 공대 대학원 준비로 둘러댄 적도 있었는데 오래 못 가고 진실을 실토하게 되더라...


자연스러운 답에 집착하다 보면 다른 '합소서'(합격 자소서)를 베끼려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다른 지원자는 갖고 있을 법 관련 수업, 학회, 공모전, 출판, 자격증 경험이 내게는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불안에 빠질 수 있다. 근데 비법학사를 일정 비율 이상 선발하는 것이 제도화된 만큼, 명목상으로나마 다양한 배경의 원생을 뽑고자 하는 로스쿨에서 이러한 법 경험이 없다는 것이 결격사유가 되지는 않는다. 자격사(나는 아직까지도 '자격사'의 합의된 범위가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변리사나 공인회계사 수준을 뜻하는 모양이다) 지원자에 비해 내 매력이 떨어질 수는 있지만, 로스쿨이 정원 1명인 것도 아니고 내게 주어진 무기를 잘 휘두른다면 합격의 기회는 있음을 상기하자.



장르가 아닌 연출


공대 출신에게 있어, 가장 무난한 논리는 “컴퓨터공학 기술(e.g. AI)이 법률과 충돌하는 경험을 보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중재자가 되고 싶다.” 정도가 되겠다. 그것보다 더 특별한 명분을 찾겠다고 날뛰면 높은 확률로 '자기'소개서의 범주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 다만 컴공이 아닌 사람도 “AI 시대가 법률에 가져올 영향”을 들먹이며 자소서를 쓸 점은 유의해야 한다. 영화로 비유를 하자면, 우리는 장르가 아닌 ‘연출’에서 차별화를 보아야 할 것이다.


전공자 출신이라면, 그저 인터넷으로 문헌 조사 살짝 한 사람은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독특한 지문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법학 교수는 절대 모를 이상한 전공 지식을 정의하라는 것이 아니라, '좋은 프로그래머는 초보자도 읽기 쉬운 코드를 작성하는 사람이다.' 같은 주관적인 가치관을 잘 어필하는 것에 있다. 팩트에 기반한 레포트를 쓰기를 지도받아온 공대생이라면 반박의 여지가 있는 주관적인 이야기를 쓰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자기소개서의 절대적인 권위자는 자신이기 때문에 반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법이라는 영역도 생각보다는 "정답이 없는" 인문학스러운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주관을 밝히는 데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자신만만한 척하는 이 글에도 수많은 반박의 여지가 열려있는 것처럼,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



금지어에 집착하지 말 것


자소서 형식에 대한 단골 조언들이 있다. "저는"을 쓰지 마라, 두괄식으로 써라, 쉼표 쓰지 마라... 쓰면 탈락한다는 표현이 참 많다. 뇌절이 심해지면 "하지만"를 "그러나"로 바꿔 써야 된다는, 민간 신앙에 가까운 속설까지도 굉장히 쉽게 찾을 수 있다. 특정 표현이 기피되는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 그저 쓰면 안 된다고 받아들이게 되면, "ㅏ 없이 글쓰기" 같은 이상한 챌린지를 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그럼 오히려 그런 안티패턴을 쓴 글보다 더 기괴하게 글이 꺾여버릴 수도 있다.


초안을 쓸 때는 사소한 형식은 신경 쓰지 않고 쭉 내용을 전개하는 데 집중하는 게 첫 번째 조언이고, 두 번째 조언은 왜 그런 자소서 금지어들이 생겨났는지 맥락을 이해하고 피드백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형식을 다듬는 것은 독자가 형식의 난해함에 시선을 빼앗겨 정작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 소개팅을 하는데 상대방이 뭔가 아방가르드한 옷을 입고 있다면, 그 사람 자체보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에만 시선이 가니까 문제인 것이다. "저는"을 쓰지 말라는 것은 사실 "저는"이 너무 반복되는 것을 피하라는 뜻이다. 대학 강의를 듣다가 교수님의 특이한 말버릇(예: "여러분들", "You know")에 한 번 꽂히면 정신을 빼앗기듯, 글을 읽다가 '저는' '저는' '저는'에 리듬을 타게 되는 독자를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잠깐 어떤 자기소개서 글을 보도록 하자.

저는 제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부터 프로그래밍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그와 관련된 수학과 과학 분야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다양한 탐구 활동을 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진학을 준비할 시기가 되었고, 저는 주변인들과의 상담을 통해 과학 고등학교에 지원하는 것이 저의 과학 및 수학에 대한 탐구력을 펼칠 좋은 기회라 생각하게 되어 이렇게 OO과학고등학교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합격 자기소개서인데, 아마 누가 봐도 사교육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것 같은 첨삭되지 않은 중학생의 순수한 문체였던 게 의외의 매력 포인트였을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왠지 "못 썼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저는이 "불필요하게" "반복"되기 때문이다.


한국어의 '-은/-는' 역할 언어학에서는 보통 topic marker라고 본다. 주제(topic) 한번 설정되면 그 대화 내에서 별도의 언급이 없으면 유지되는 것을 기대한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은/는' 없이 문장을 전개해도 특별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주제가 전환된다면 '은/는'을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다. 자기소개서 맥락상 글쓴이를 주제로 전개될 것을 기대하기에, 일반적으로는 '저는'을 빼도 문장이 자연스럽게 읽힌다. 하지만 중간에 어떤 개념이나 사건이나 사례를 설명하면서 주제가 글쓴이 밖으로 빠져나왔다면, 그다음 문장에서 '저는'을 쓰는 것이 분위기를 환기하는 데 더 좋은 선택일 수 있는 것이다. 아래 문단에서는 '저는'의 사용이 없는 것보다 자연스럽다.

3학년 때 과학 선생님께서[는] 아래와 같은 과학 관련 주제에 대해 조사할 것을 숙제로 내 주셨습니다. [저는] 이에 성실히 참여하며 과학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애초에 자기소개서에서 '과학 선생님'을 주어로 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게 적절하냐고 따질 수 있고, 이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문장 구조를 뜯어고쳐야 하는 것이지, 쉽게 '저는' 몇 개 지운다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태고 싶다. 문장에 담긴 내용(3학년 과학시간 숙제) 자체가 너무 알맹이 없어 보여 아쉽지만, 그래도 굳이 가볍게 퇴고해 보자면 이런 느낌은 어떨까.

과학 현상을 조사하는 숙제에 성실히 참여하며 과학적 개념을 깊이 이해했습니다.



문학적 은유 가미하기


감수성이 부족한 공대생이 쓰는 글에 신선함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미니 팁 하나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국어 시간에 너무 자주 쓰여서 이제는 관용구가 되어버린) 은유법의 아이디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 파워포인트로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창조적인 활동을 하면서 그것의 무한한 활용 가능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파워포인트 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꿈이 생겼고,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고등학교 입시에서 한 층 진화한 대입 자소서를 가져왔다. '파워포인트'랑 '프로그래밍'은 서로 자연스럽게 잘 붙는 키워드는 아니다. 하지만 그 중간에 '게임'과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을 엮고 나니 생각보다는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철저한 삼단논법으로 한 줄 한 줄 논리를 전개했다면 이를 수 없는 결론이었을 것이다.


"나열식" 내지는 "열거식" 자소서를 지양하라는 조언도 많이 들을 수 있다. 이 또한 앞선 '저는' 논쟁과 마찬가지로 "나열" 그 자체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A를 했다. B를 했다. C를 했다." 식으로 팩트만 나열했을 때 A에서 B로, B에서 C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글쓴이가 느꼈던 감정선 같은 게 드러나있지 않아 독자가 당황하게 된다는 뜻이다. "인력거를 끌었다. 돈을 많이 벌었다. 아내가 죽어 있었다.". 이 앞뒤 맥락 없는 팩트 3연타에 치여서 독자의 마음속에 폭발하는 물음표를 잠재우기 위한 적절한 간주(interlude)를 추가하라는 뜻이다. 함축적인 의미를 이해할 여유가 있는 문학 작품이라면 나름 신선할 수도 있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 수많은 지원자를 평가하는 교수의 입장에서는 작품의 의도가 낱낱이 해설되어 있길 바란다.


스토리 전개의 재료로는, 내가 그냥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다른 에피소드나 가벼운 생각들을 엮어보면 된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유사성'을 찾고, 그것을 제시하는 식으로 한 칸 한 칸 나아가보자. 다만 이러한 트릭은 신선함을 넘어 궤변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법학 교수 앞에서 궤변을 내놓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찐찐막 팁

수많은 피드백 지옥을 뚫고... 아니면 이제 내 자소서 꼴도 보기 싫어서 최종 제출을 하려고 하면, 그때 진짜 진짜 마지막으로 이것만 챙기자.


맞춤법 검사기는 돌리자. 딱히 브런치 플랫폼이라 그러는 건 아니고, 다음 맞춤법 검사기가 개인적으로 긴 글 오탈자 한 번에 보기에는 편했다.

따옴표나 가운뎃점 등 특수문자 체크. '가명·익명처리'가 '가명&#8729익명처리'로 프린트될 때의 당황스러움을 느껴보셨는가.

소리 내어서 읽기. 음성 합성(TTS) 서비스를 이용해서 그냥 쭉 들어보는 거라도 해보자. 목적어가 목적어가 반복되거나 빠진 찾는 데 유용하다. 오히려 이런 실수를 맞춤법 검사기가 잘 못 잡는다. 아니면 기껏 퇴고해 놓고 최종본이 아닌 과거 버전을 제출하는 불상사도 막을 수 있다.

글자수 제한이 10자 이내로 간당간당하다면, 실제 제출할 때 의도한 것보다 내용이 몇 자 불어날 수 있으니 '~것 같습니다'처럼 불필요하게 늘여진 말이 있는지 체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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