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치유되지만 후회는 꽤 오래도록 남는다.
나의 가장 길었던 연애는 3년이다. 당시 연인이었던 A와는 오래 만났던 만큼 많이 싸우고 화해하며, 참 열심히도 상처를 주고받았다. 결국은 매번 같은 이유로 반복되는 다툼 때문에 헤어지게 됐지만 A와의 연애에서 후회되거나 미련이 남는 것은 없다. 그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모두 보여줬기 때문이다. 굳이 후회되는 점을 꼽자면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며 친구에게 고민 상담을 했던 것 정도가 아닐까? 그때 나는 고작 21살이었고, 8년이 지난 지금도 친구는 그때의 내가 얼마나 진지 했는지 설명하며 날 놀리곤 한다. A와의 연애에서 아무런 후회가 남지 않는 이유는 그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적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서로에게 솔직했고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그래서 상처도 많이 받았고 또 주기도 했을 테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때 나를 힘들게 했던 상처들은 이유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도록 남아 날 괴롭히는 것은 상처가 아니라 후회의 경험이다. 대학교 4학년 때 나는 B를 처음 만났다. 친한 후배의 친구였는데, B의 서글서글한 성격 탓에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그즈음에 나는 좋아하던 선배가 있었고 B는 전 연인을 잊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연애상담을 해주며 서로를 응원해주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 나는 선배와 사이가 틀어졌고, B도 그의 전 연인이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우리는 기분전환을 위해 친구들과 함께 자주 놀러 다녔고, 자연스레 그와 같이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나는 점점 그에게 호감이 생겼고 그의 마음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함께 다니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섣불리 호감을 표시할 수 없었고, 그도 나를 이성으로 생각한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물을 용기도 없었다. 마음이 커질수록 나는 전처럼 B를 편하게 대할 수 없었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한 나는 그와 자연스레 멀어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거리를 두는 내가 걱정됐는지 그는 눈치 없이 나의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했고, 언제까지 이렇게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이런 내 감정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아직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던 여름밤, 나는 최대한 가볍게, B에게 내 감정을 털어놓았다. 내가 갑작스럽게 그와 거리를 두어야 했던 이유에 대하여. 분명 놀란 눈치였지만 함박웃음을 숨기지 못하는 B를 보며 나는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인 것을 확신했다. 서로의 마음을 어느 정도 확인한 우리는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되었고, 친구에서 연인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설렘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에게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과의 이야기 주제에 그의 전 여자 친구가 종종 등장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덜컥 두려워졌다. B가 전 연인을 얼마나 좋아했고 힘들어했는지, 또 그녀가 가끔씩 나타나 그를 어떻게 흔들어 놓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 두려움을 알 리 없는 그는 나에게 점점 더 다가왔고 마침내 진지한 고백을 해 왔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고 너무나 기뻐 B의 마음을 당장에 받아들였지만, 그의 과거를 알고 있는 나는 상처받게 될까 여전히 두려웠다. 결국 사귀기로 한 지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친구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차라리 그때 솔직하게 내 감정을 털어놓았다면 어땠을까? 그의 솔직한 대답을 들을 용기가 없어서, 상처받기가 두려워서 했던 나의 선택이 후회라는 무서운 감정을 남기고 말았다. 긴 시간 상처를 주고받은 A와의 연애는 나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은 데 반해, 시작과 동시에 끝나버린 B와의 이야기는 아직도 때때로 나를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기게 한다. 지금도 나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게 너무나 두렵다. 상처를 주는 대상이 내가 좋아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면 더더욱 그렇다. 한 번 상처받으면 치유가 힘들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상처를 받으면 얼마나 힘들고 무너지는지 알기에 그렇다. 그렇지만 상처받기가 두려워 시도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이렇게나 오래가는 것일 줄 알았더라면, 쉽지 않더라도 기꺼이 상처받기를 택했을 것이다.
아직 실수투성이에 상처받을까 두려워 전전긍긍하지만 모든 관계에 솔직하게 임해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진심을 숨기는 관계는 결코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을뿐더러 이렇게 평생 데려갈 후회까지 선물해준다. 그 사람에 대한 예의도, 나를 보호하는 방법도 아닌 것이다. 진심을 다하고 나면 상처를 받아도 대부분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상처는 아프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다했기 때문에 또 다른 것에 집중할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후회와 상처,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나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다시 온다면 이제 나는 상처받기를 선택해보려 한다. 상처는 언젠가 회복되지만 후회는 도무지 회복할 길이 없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