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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햇 Jun 19. 2024

잠시 잃고 보니 감사한 것들


시간이 참 자-알 간다.


벌써 한국에서 지내는 날의 60%가 지났다. 2년간의 공백을 가지고 돌아와 보니, 많은 것이 다르게 보인다. 그간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것임을 깨닫는 요즘이다. 별것 없는 일상을 낯설게 보면서 느낀 것들과 한량처럼 보내는 나날들을 소소하게 담아보았다.


   어여쁜 집 앞 산책길이다. 누가 이렇게 예쁘게 코스모스를 빼곡히 심었을까? 저녁이 되면 기분 좋게 선선했던 6월 초순이었다. 동네천은 정말 많은 사람들의 힐링을 담당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걷고, 뛰고, 자전거를 타거나 가족, 반려동물과 산책하는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해가 있든 없든 기나긴 산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었는가 생각해 보았다.








  계절학기 Final Paper 과제가 남아서 요즘 낮 시간에는 줌 미팅과 페이퍼 쓰기를 열심히 하고 있다. 집에서는 자꾸 드러눕고 싶어지고, 낮에 집에 아무도 없다 보니 한 번 자면 서너 시간을 내리자다가 하루가 다 지나가기도 한다. 하여, 스스로 강제해서 카페에 나가고 있다. 한국 프랜차이즈 카페들은 홀도 큼지막-하고, 요깃거리도 많고, 좌석도 편하고 일하기 참 좋다. 또, 짐을 다 두고 화장실을 다녀와도 가져가지 않는 게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카공하기 더없이 좋다. 덕분에 한 번 카페에 가면 4시간 내외로 엉덩이 무겁게 할 일을 꽤 많이 해치우고 있다.


    여담이지만, 이번 여름 랩 연구 일이 딜레이 되고 있다. 입학 전부터 지난봄 학기 마칠 때까지 랩 연구 프로젝트 때문에 숨 돌릴 틈이 없었는데, 처음 있는 일이다. 솔직히 불안하기는 한데, 너무 꿀이라서 행복한 양가적인 마음이다. 학기 중에 많은 것을 다 병행하느라 허덕였는데, 뭐 하러 그랬을까 싶기도 했다. 다음 학기는 좀 다 내려놓고 살아볼까?


   모쪼록 자의로 발생한 휴식은 아니지만, 비생산적인 삶도 매우 좋구나- 생각했다. 덕분에 올여름 방학에는 지난 학기들과 다르게 허덕이지 않고 계절학기 수업 하나만 하고 나머지는 펑펑 놀고먹고 있다. 폭풍 전 고요일까 봐 두렵고 또 랩에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불안하기도 하지만, 모르쇠하고 편승하고 있다.



7월에 미국에 돌아간 미래의 내가 다 처리하고 있겠지 생각해 본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대구에 다녀왔다. 사실 이번 방문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이었다. 두 분 다 만 나이로 90대이신데다가 건강도 최근에 급격히 안 좋아지셨다. 이번 여름에 한국 방문을 건너뛸까 하다가, 들어오기로 결심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번 여름은 꼭 봬야 할 것 같았다.


   얼굴을 뵈니 두 분 다 너무 마르시고 늙으셨지만, 여전히 생기 있으셔서 마음이 놓였다. 할아버지는 무려 만 97세이신데, 인지 기능이 너무 좋아서 가족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다 꿰고 계신다. 남편 따라 미국 간다고 했을 때, 남편만 학위를 하고 나는 못할 줄 아셨는데(?) 나도 박사과정을 시작해서 놀랐다는 얄궂은 농담도 잊지 않으셨다. 물론 진담이실 수도 있다......!


   할머니는 치매기가 있으셔서 만나는 내내 같은 말만 반복하셔서 조금 슬펐다. 그럼에도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닌지, 가장 최근에 대가족에 합류한 우리 남편을 비롯해서 모든 가족들을 아직은 다 잘 알아보셔서 다행이었다. 잊히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내심 마음 졸였기 때문이다. 말을 반복하는 거야 계속 처음 들은 것처럼 굴면 돼서 큰 문제가 아니다. 치매가 있었음에도 잊히지 않음에 그저 감사한 하루였다. 그거면 됐다.



실존 문제는 늘  두렵고 어려운 것 같다. 당최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뜸하게라도 운동을 하고 있다. 지속적으로 하기에는 조금 찔리고, 때때로(?) 정도로 해보겠다. 운동을 오가는 길, 하교한 초등학생들이 동네 천 징검다리에서 늘 놀고 있다. 저렇게 책가방은 길바닥에 팽겨진 채로. 물가에 발을 담그고 지나쳐가는 갖가지 하천 생물들을 괴롭히고 있다. 도시 한복판에서 자란 애들이 자연스럽게 개울에서 노는 게 너무 순박하고 귀여워 보여서 한 컷 남겼다. 요즘은 무균실 같은 환경에서 키워지는 아이들도 많다는데, 푸근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좋았다.



  그리고 짧은 자기반성 - 운동을 더 자주 해야겠다. 당장 내일 또 가야지...... 따흑




      한국 온 김에 친구들을 실컷 만나고 있다. 같이 나고 자란 오랜 친구들은 언제 봐도 할 말이 많다. 다들 성숙하게 무르익어가는 것이 보인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만나면 결혼, 임신, 출산에 대한 이야기도 필연적으로 많이 하고, 커리어나 자기 계발 쪽도 여러모로 고민을 털어놓게 된다.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와 살아오면서 정리한 생각들을 주고 받노라면 배우는 것도 많고, 다들 야물딱지고 똑 부러지게 참 잘 산다는 생각이 든다. 어딜 내놔도 걱정 없는 내 친구들이다.



      아, 여담이지만 고등학교 때 말이 너무 너무 많아서 내가 '공주: 공포의 주둥이'라고 별명 붙여준 친구가 프리랜서 쇼호스트로 잘나가면서 최근에 한 인터뷰에서 이 별명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을 봤다. 별명 창시자로서 뿌듯한 순간이었다. 공주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해!









   오랜만에 효녀 모먼트도 있었다. 엄마가 쇼핑을 같이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최선을 다해서 싸우지 않고 평화적인 쇼핑을 하고 왔다. 패션에 대한 선호가 달라서 중간에 작은 위기가 있었지만 말이다. 무려 2시부터 7시까지 돌아다녔다. 집에 오니 발이 불에 타는 것처럼 아팠다. 엄마가 MZ 포즈도 알려달라고 해서, 아는 것도 없지만 대충 고양이 귀를 만드는 포즈를 알려주고 같이 사진도 찍었다. 효도도 사회생활이다. MZ 화이팅(?)




그리고 이번 포스팅에도 빠질 수 없는 폭풍 같은 한국 음식 먹방이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다 보니, 알게 모르게 은근히 행복했나 보다. 어느 순간 "아, 이런 즐거움을 두고 왜 멀리 가서 고생을 해야 하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관계, 음식, 익숙함을 뒤로한 채 이역만리 땅에 이방인으로 가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잘 먹고 잘 쉬는 게 때로는 이렇게 위험하다.






    아마도 한동안 오래된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들, 그리고 맛있는 향토 음식들에 결핍이 많았기에 이렇게나 좋은 것일 게 분명하다. 이런 게 막상 또 일상이 되면 그게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지 잊고 살게 마련이다. 어쩌면 이역만리에서 고생을 하고 돌아왔으니 이런 것들이 또 다 감사하고 행복한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돌아가는 그날까지, 더 알차게 먹고, 만나고, 놀다 가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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