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스에서 글쓰기 좋은 계절이다. 선선하고 바삭한 가을바람을 피부로, 귀로 맞이하며 글을 쓰고 있자니 퍽 행복하다. 폴짝폴짝 물결무늬 꼬리를 자랑하며 뛰어다니는 이웃집 청설모와 눈 맞춤도 한다. 주중에 이 좋은 계절을 스쳐만 다니다가 온전히 머무르니 여유롭고 충만하다.
가을이다.
어느 출근 날의 아침이다.
집 문을 열고 나가면 가끔 해 뜰 녘 하늘이 아름다워서 넋을 놓고 본다. 이제 출근하는 아침은 꽤나 어두운데, 그 와중에 하늘이 보랏빛으로 그득-한 것을 보면 초현실적이기도 하다. 출근하는 내 세상은 온통 먹구름 색이지만, 사실 하늘은 온통 핑크빛 보랏빛이다.
일하는 심리 상담 센터 오피스다. 남편이 노트북 받침대를 사는 것을 보고 잽싸게 같이 하나 사서 설치해 보았다. 센터에서 주는 노트북과 모니터가 높이가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듀얼 모니터 사용을 못 하고 있었는데, 받침대로 노트북 높이를 높이니 "이거다!" 싶었다. 오피스가 꽤나 만족스러워지고 있다.
그리고, 가습기도 새로 들여놓았다. 사무실이 되게 건조해서 콧속이 아팠다. 어려서는 물론이거니와 성인이 돼서도 희한하게 코피가 잘 나는 코라서, 심리상담하다가 코피 날까 조금 불안해서 가습기를 하나 새로 했다. 용량이 짱짱해서 덕분에 아직 코피는 한 번도 안 났다. 역시 인생은 아이템이다.
남들 보기에는 너저분하려나 잘 모르겠지만, 엔프피에게 이보다 더 조직되고 정리된 책상은 없다.
풀타임 근무할 때 바리바리 싸가는 식량들이다. 8시 출근은 시간 맞춰가기 바빠서 아침도 못 먹고 후다닥 싸서 간다. 시나몬 크루아상 토스트 두 장 굽고, 땅콩버터 그득그득 발라 먹는다. 점심은 보통 샐러드 많이 싸가는데 지난주에 싸간 샐러드가 음식물 쓰레기 냄새를 풍기며 상해 있던 것에 트라우마가 생겨서 이번 주는 팩 샐러드를 안 샀다. 아까운 내 돈......!
대신 요거트 그래놀라 범벅을 점심 삼아 싸갔다. 그리고 냉장고 털이 겸 건강도 챙길 겸 샐러리와 당근, 사과 간식도 정갈하게 쌌다. 한국 친구들에게 가끔 사진을 보내면 어떻게 그렇게 야무지게 건강하게 잘 챙기냐고 하는데, 미국 사니 부지런함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덕목이다.
대충 사 먹을 곳 많은 서울이 가끔 너무나 그립다.
열 일 하고 퇴근하는데, 직원 주차장을 보니 내가 마지막 퇴근이다. 괜히 뭉클하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나니 8시부터 6시까지 있었다. 너무 피곤하다. 원래는 5시 퇴근인데, 4시에 마지막 심리 상담이 있어서 5시에 마치고 차트까지 쓰고 나면 6시 금방이다. 남아서 차트를 정리하고 있노라면 청소하는 외주 업체 분들이 청소랑 소독하는 틈바구니에서 일하곤 한다. 후딱 정리하고 집 가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차를 보는 기분이 오묘하다.
이번 주 기분 좋았던 것 하나는, 슈퍼바이저 선생님이랑 처음으로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했다는 것이다. 그간 뭔가 하여튼 미묘하게 안 맞는 것들이 많았고, 영어 지적부터 시작해서 내가 잘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그래도 내가 틀렸다고 생각지는 않아서 크게 신경 안 쓰고 그냥 내 마음대로 가던 길 계속 갔더니, 지난주에는 슈퍼비전 받을 때는 비로소 내 접근에 대해서 슈퍼바이저 선생님도 효과적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거의 학기 7주 만에 처음으로 같은 페이지에 있었던 것 같다.
작년에 같이 일한 슈퍼바이저 교수님은 그냥 척하면 착, 아 하면 어! 하고 맞아서 고생을 전혀 안 했었는데, 올해 슈퍼바이저는 척하면 응? 아하면 응? 이런 케미라 되게 당황스러운 적도 많고 고생을 조금 했다. 그래도 안 맞는 슈퍼바이저와도 이렇게 합을 맞추어 가면 되는 거구나 하는 배움을 또 많이 얻은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심리 상담 센터 말고 수업 듣는 학과 건물이다. 수업 가는 길에 단과대 건물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이 예뻐 보여서 한 컷 남겼다. 미국 캠퍼스 장점 중 하나는 어느 건물을 가든 학생들이 앉아서 공부할 공간이 넉넉하다는 것이다. 외부 상담 실습을 시작한 이후로 학과 건물에 오면 친정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한다.
어쩌다 보니 이날도 또 혼자 마지막 퇴근이었다. 이날은 원래 Research Writing Group을 하는 날인데, 같이 하는 친구들이 못 오거나 피곤해서 먼저 가서 혼자 남겨졌다. 요즘 작성 중인 Manuscript을 빨리 진행하고 싶어서 그냥 혼자 남아 마저 하고 갔다. 바로 위 사진을 보면, 내가 일하는 장소 외에는 불도 다 꺼져서 조금 음산하고 무섭긴 하다. 그래도 5시 넘으면 이 공간은 철문이 굳게 닫겨서 열쇠가 있는 관계자만 접근할 수 있다. 그것만 믿고 마저 쭉 하다가 남편과 카풀해서 퇴근했다.
이 구역 프로 마지막 퇴근러를 담당하고 있다. 매일매일 누적된 노력들이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믿으며 정진할 뿐이다.
이날은 가을 방학인 금요일이었다. 가을방학은 남의 일일뿐, Clinical Hours를 더 쌓아야 해서 심리 상담 센터에 출근해서 내담자들을 만났다. 이번 주 희한하게 피곤해가지고 무슨 정신인지 점심도 간식도 까먹고 아무것도 못 준비해둔 것이 아닌가? 하여 급하게 그나마 가까운 도서관 지하에 있는 학생 식당에서 샐러드를 사 왔다.
그런데, 미국 학생식당은 가격이 너무 비쌌다. 한 끼에 $15였다. 무슨 학생 식당이 한 끼가 2만 원이나 한단 말인가? 물론 밀플랜을 신청을 안 했지만 그래도 너무하다. 다음부터는 정신 다시 잘 차리고 점심을 잘 싸와야겠다. 휴!! 그래도 맛과 영양은 꽤 좋았다. 퀄리티만큼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학식이 2만 원은 정말 선 넘었다(화남). 이건 지속 가능한 가격이 아니다. 미국에서 박사생 월급에 알거지 신세를 면하려면 해먹던지 싸오던지 하여튼 부지런해야 한다.
그리고 때마침 심리 상담 센터 스탭 공용 주방에 도넛이 한가득 있어서 제일 맛있어 보이는 초코 코팅된 도넛도 하나 얻어먹었다. 센터의 좋은 점 중 하나는 공짜 간식이 자주 있다는 점이다. 각종 도넛, 머핀, 컵케이크, 파이 등등이 상시 공용 주방에 놓여있다. 대학원생에게 공짜 간식은 그저 사랑이다. 덕분에 가을 방학 날 근무도 설탕 파워로 잘 마칠 수 있었다.
가을 방학 날 근무는 있었지만 대신 Trainee Group Supervision 공식 일정이 없던지라 평소보다 퇴근은 빨리할 수 있었다. 위의 사진은 빨리 퇴근해서 신난 그림자다. 가벼운 발걸음이 느껴지나 모르겠다.
신나게 퇴근하고 오니 또 남편이 온 집안을 뒤집어엎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세상에 소파를 저렇게 헐벗겨서 시트를 다 빨아제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모르겠다. 심지어 자주도 한다. 덕분에 우리 집은 매우 깨끗해서 불만은 없다. 주말에 손님이 온다고 빨고, 쓸고, 닦고 집안을 무균실로 만드는 남편, 대단하다 정말. 그의 눈에 내가 얼마나 더러운 사람으로 비추어질까 잠시 생각해 보다가 그냥 생각 않기로 했다. 불편한 상상이다.
퇴근하고 힘들다고 징징댔더니 남편이 계란 라면을 끓여주었다. 꼬들꼬들하게 잘도 끓였다. 역시 남이 해주는 밥이 최고다. 우리 부부는 라면 섭취를 줄일 필요가 있지만, 이 뜨끈하고 맵칼한 MSG와 멀어지기란 쉽지 않다. 힐링 라면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가을 방학 기념, 친구들을 초대해서 오래간만에 맛난 것들을 잔뜩 나누어 먹었다. 행복이 뭐 별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 나누어 먹는 것, 그뿐이다. 오랜만에 LA갈비를 사다가 재워서 굽고 참치 김치찌개, 계란말이, 나리가 해온 나물들과 해서 같이 배 터지게 먹었다. 다들 잘 먹어줘서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바빠서 통 모이지를 못했는데 오랜만에 모여서 소소하게 웃고 떠드니 환기도 많이 되고 즐거웠다.
학기가 거듭될수록 힘들고 피로도도 높아진다.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는 속도 그대로 천천히 나아가 보려 한다. 아마도 계속 마지막 퇴근하는 일이 잦을 것 같다. 그래도 불만은 없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듦 속에서도 틈틈이 여유롭고, 화목한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모두 틈틈이 아름답고 찬란한 이 계절에 머무를 수 있기를 바라보며 글을 접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