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바쁜 일개미로 살아가는 여름학기다. 이번 주는 수업 페이퍼와 논문 작업 마무리 등등할 일이 많아 학교에 붙어살았다. 박사생은 여름만 보고 산다는데, 우리 과는 여름도 녹록지가 않다, 아휴! 그래도 지도 교수님이 가르치는 여름학기 수업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점이 한 줄기 희망과 위로일 것이다. 한 학기를 6주로 압축한 덕분에 절대적으로 쓰는 시간이 너무 많은 수업이다. 그래도 이 수업만 끝나면 시간적 여유도 조금 더 생기고, 한국도 가서 설렌다.
무엇보다, 지도 교수님의 온 가족 여름휴가 기간이 시작된다 - 야호! 평소 워커홀릭이라 주 중 주말 밤낮없이 실시간으로 답장을 보내기로 유명한 지도 교수님이 유일하게 먹통이 되는 때다. 그가 가족 휴가를 갈 때에만 연락이 두절된다. 이것만 생각하면 마음에 희망과 설렘의 바람이 살-랑하고 불어온다.
물론 그만큼 그가 떠나기 직전까지 피치를 한-껏 올려둔다는 것이 함정이다. 게으르게 지내고 싶은 마음을 겨우 부여잡고 학교로 향한다. 기분을 조금이나마 낫게 해보고자 볕도 안 드는 어두운 던전 같은 오피스 말고, 숲속 뷰를 자랑하는 단과대 도서관에서 일을 했다. 때마침 스타벅스 커피 쿠폰도 생겨, 작은 사치 한 잔을 실천해 보았다. 한국 가서 놀고먹을 생각밖에 없는 뇌를 어르고 달래가며 지금-여기에 데려오기 위해 불가피한 사치였다고 하겠다.
도서관은 거의 전세를 내고 혼자 쓴다. 교직원 사서 분들을 빼고는 사람이라곤 없어서인지 에어컨이 유난히 춥다. 한겨울 기모 맨투맨을 챙겨 입으며 일을 해도 추울 지경이었다. 앉아서 일을 하고 있으면 어느새 손발이 차가워지고 턱이 덜덜 떨려 이가 부딪힌다. 실내 기온을 대체 왜, 아니 무슨 자격으로 16도로 설정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지구 온난화는 고사하고 한여름에 동사하겄소 이 양반들아.
혼자 공부하면 너무 고독하고 늘어져서 Dissertation Writing Group에도 다녀왔다. 박사 논문을 쓰는 선배 선생님들하고 두런두런 수다도 떨고, 일하기 싫다고 푸념도 하노라면 기분이 한결 낮다. 무엇보다 텅텅 빈 유령 같은 학교에 우리 과 박사 선생님들은 꽤 많이 남아있어서 전우애가 느껴진다. 다들 놀고 싶고 휴가 떠나고 싶고 고향 가고 싶을 텐데 말이다.
대면 수업이나 Writing group이 없는 날은 최대한 집에서 재택을 하려고 한다. 아이스 라테 한 잔 맛나게 풀어와 한숨을 푹푹 쉬며 일을 시작하노라면 옆에서 남편이 게임하는 소리가 요란하다(위의 왼쪽 사진 참조). 같은 박사과정인데 나만 왜 이리 바쁜지, 안 그래도 붙들기 힘든 사기가 더 떨어지는 기분이다. 심지어 이번 주 배신자 남편이 같이 학교에 가서 할 것을 하겠다는 약속을 한주 내내 하루도 안 지켜 버거킹 모닝을 쏴야 했다는 후문이다.
그래도 기분이 저조하고 영 동기부여가 힘들었던 5월에 비해 6월이 되니 여러모로로 한결 났다. 큼지막한 해야 할 일들을 꽤 많이 쳐내기도 했고, 최근에 좋은 뉴스가 들려왔다. 지도 교수님이 큰 그랜트를 따오게 돼서, 내년부터는 학부생 티칭을 하지 않고, 연구 업무로 학비와 인건비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 포스팅을 쭉 봐왔던 분들이라면 내가 미국에서 학부생 가르치는 일에 얼마나 많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것이다. 드디어 베이비 시팅 은퇴다!
어차피 연구 업무와 논문 작업은 계속 해오던 것이라, 그것으로 인건비를 받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다만, 지도 교수님이 워커홀릭이라 앞으로 일을 얼마나 더 마음 놓고 팍팍 줄 것인지는 꽤 두렵긴 하다. 그래도 앞으로 하게 될 연구가 심리치료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연구라 재밌게 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콜라보 하는 교수진만 열 명이 넘어서 배우는 것도 많을 것 같아 설렌다.
당분간은 지도 교수님께 충성이다.
너무 공부랑 일 얘기만 늘어놓은 것 같다. 이번엔 보다 말랑한 삶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남편이랑 달리기하는 야외 트랙에 자주 출몰하는 아기 토끼가 있다. 아유, 정말 얼마나 작고 여리고 귀여운지 모른다. 피터래빗의 주인공 '피터'로 이름 지어주었다. 트랙에 갈 때마다 두리번거리며 피터를 찾아 헤맨다. 전체적으로 갈색인데 엉덩이와 꼬리만 동그랗게 새하얀 것이 특징이다. 사람을 너무 무서워해서 다가가면 꽁무니 빠지게 도망쳐서 조금 서운하다. 엄-청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야 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히면 정말 빠르게 도망가고 만다.
그래도 마냥 좋다 -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귀여운 것이다.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서 문화생활(?)도 하고 다디단 캬라멜 팝콘도 먹고 행복한 주말을 보내고 왔다. 남편이 미션임파서블을 좋아해서 최근에 개봉한 최신작을 보고 왔다. 개인적으로는 미션 임파서블에 애착이 없던 터라 유튜브 요약으로 전편들을 대충 훑기만 하고 갔는데, 마지막 편을 보고 완전히 매료되어 왔다. 스포 없는 감상평만 남기자면, 내가 이단 헌트가 아니라서, 특수 요원이 아니라서 감사하다. 특별한 존재는 너무 힘든 것 같다. 평범한 능력의 사람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가 특수 요원도 아닌데 3시간 내내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다들 이단 좀 내버려 둬라!!!!!!
영화 보러 가기 전 남편이랑 평소 가보자고 늘 말만 했던 동네 예쁜 스팟에 가서 꽃 구경도 하고, 아점도 먹었다. 남편이 딱 나의 니즈에 맞게 꽃의 다채로운 색감을 잘 담아주어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래도 여름이니 이런 여유도 누리나 보다.
드디어 올여름 첫 수박을 마트에서 데려왔다.
미국은 수박이 정말 싸다. 한 통에 6-7천 원 수준이다. 씨 없는 수박인데 달고 시원하고 맛났다. 요즘 많이 습하고 더워져서 야외 러닝을 하고 오면 몸이 되게 지치는데, 그때 냉장고에 차갑게 썰어둔 수박을 요란스레 베어먹으면 그만이다. 여기가 천국이요. 또 다른 날은 저녁에 비 예보가 있어 낮에 러닝을 다녀왔는데, 땀도 너무 많이 나고 더위 먹을 것 같이 머리도 띵했다. 돌아오자마자 블루베리 한가득 넣고 요거트와 얼음을 함께 갈아 스무디를 만들어 먹으니, 등골이 오싹하고 열기가 싹 가셨다.
수박과 스무디 없이 어찌 여름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한국에 갈 날이 머지않아 냉털을 시작했다. 보통 한국 가기 전 2주 전부터 냉털 요리에 필요한 재료만 구입하고 남은 재료 소진에 힘쓴다. 냉장고에서 나올 수 있는 조합으로 메뉴판을 쭉 구성하고 매 끼니 그 메뉴판 안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먹고 싶은 것을 골라 해먹는다. 이렇게 한 2주 정도 하면 냉장 냉동 모두 비우고 갈 수 있다. 최근 냉털 집밥으로는 곰탕, 미트볼 오므라이스, 낫또 덮밥과 연어 스테이크, 에그 마요 샌드위치 등등을 해먹었다. 남은 일주일 머리를 잘 굴려서 남은 재료를 맛있게 소진하고 가야겠다.
설렘을 뒤로한 채 오늘의 과업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렇지만 즐겁고 설레는 일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다. 타지살이가 참 고된데 돌아갈 고향이 있고, 집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러기 전까지 파이널 프레젠테이션도 해야 하고, 페이퍼도 써내야 하는 큰 산이 두 개나 예고되어 있다. 마지막까지 차분하게 할 일에 전념하기를 바라며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