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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네이도, 번아웃과 함께 여는 미국 박사 여름학기

by 화햇


무지막지했던 정규학기가 막을 내리고, 여름 학기가 도래하였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학부생들과 전쟁을 치르고 성적을 제출한 후 겨우 학기를 마무리하였다. 여름 학기는 봄 학기 마치고 별도의 휴식 없이 바로 시작했다. 여름 학기는 정규 학기보다는 수월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업도 2개 들어야 하고, 연구 일도 산처럼 쌓여있어 만만치 않다.


종강만 보면서 버텼는데 막상 종강의 기쁨이나 휴식을 잘 누릴 틈도 없이 여름 학기 과업에 대한 이메일들이 밀물처럼 치고 들어왔다. 그때부터 숨이 턱- 막히더니, 정신적으로 지친 느낌이 확 들면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봄 학기만 종강하면 살만할 거라 스스로를 속인 것이 독이 되려 독이 된 걸까?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쉼이 더 많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가다가는 완연한 번아웃이 올 것 같아서 여름 학기 시작 직전 금요일을 붙여서 주말 3일 만이라도 신나게 놀자고 결심하였다.








가장 먼저는 금요일에 남편과 하이킹을 다녀왔다. 날씨가 선선-하고 쾌청해서 가볍게 하이킹하기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집 근처 주립공원에 가서 2시간 바짝 하이킹 코스 하나를 돌았다. 날씨도 딱 좋고, 한적하니 사람도 없었다. 피톤치드로 폐를 꾹꾹 채우며 고사리와 아는 척도 해보고, 야생 동물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며 알차게 하이킹을 즐겼다.






또 다른 날에는 야외 러닝도 재개하였다. 계절의 여왕은 5월이라 했던가. 저녁 무렵 나가서 뛰노라면 선선히 부는 바람이 달콤하고, 분홍빛 해 질 녘의 세상이 온통 낭만적이다. 딱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장 좋은 날씨다. 시골이라 공기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아서 야외 활동에 최적의 시간이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하늘과 풍경, 온도와 습도에 감격해서 분명 호들갑 떨면서 행복해했을 것 같다. 또, 운동을 하고 나면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면서 되게 기분이 좋아지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최근에 약간의 번아웃과 버거움으로 인해 평소에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기쁨이나 긍정적인 감정이 잘 안 느껴졌다. 좋은 시그널은 아니다. 기분 전환이라도 하려고 운동도 하는데 기분이 크게 나아지지 않아 조금은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








꿀꿀함과 헛헛함을 채워보려고 끼니라도 이것저것 맛난 것들을 시도해 보았다. 냉면 무를 사다가 물냉면에 닭갈비도 해먹고, 나물을 한 아름 만들어서 비빔밥도 했다. 동네 작은 인터내셔널 마켓에서 드물게 메밀향이 진하고 좋은 냉면 면을 구할 수 있어서 제법 그럴듯한 냉면 맛이 났다. 기분이 다운되고 우울할 때는 밥만 잘 챙겨 먹어도 절반은 성공이다.


원래 요리를 되게 좋아하고 잘 해먹는 것은 내게 되게 중요한 가치인데, 요리하는데도 왜이리 힘이 들던지. 나도 모르게 깊고 큰 한숨을 푹푹 쉬었다는 남편의 증언이 있었다.





날씨가 이렇듯 좋으면 우리 집 뒤뜰 테라스 카페가 개장한다. 잔잔한 재즈음악을 들으면서 가만히 앉아 책을 보고 있으면 온갖 동물들이 다 다녀간다.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숨죽인 채 오고 가는 야생동물들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은근히 힐링이 된다. 다람쥐, 청설모, 토끼, 등등 동네 귀요미들이 다 나온다. 제일 좋아라하는 토끼들이 더 자주 출몰하면 좋겠다.




그리고,

중. 또. 토 - 중부 또 토네이도로 난리였다.


이번에는 위 사진들 중 아래 사진처럼 우리 동네에 직접 토네이도가 상륙했다고 한다. 재난 문자도 몇 번이나 울리고 사이렌도 울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토네이도 때마다 정보를 접하는 유튜브 라이브 채널이 있는데 (위의 사진 중 상단) 우리 동네 이름이 떡하니 중앙에 떠있었다. 유튜버가 상기된 목소리로 이 동네에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대피하라고 긴급하게 라이브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급히 집에 방문들을 모두 닫고 1층 창문 없는 화장실로 대피했다. 다행히 집 주변까지는 안 오고 잘 지나갔으나, 동네 일부 집과 헬스장 등에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도 인명 피해는 없었다니 천만다행이다. 일과 학업만 해도 힘겨워서 아둥바둥인데 인생 난이도 장난 없다.



오늘도 강하게 크는 중부의 유학생이다.


토네이도 경보가 끝난 뒤 집 밖을 살펴보니 엄청 교과서적인 무지개가 떠 있었다. 하늘과 구름은 여전히 조금은 궂은 상태였는데 그래서인지 무지개가 더 선명해 보였다. 이날 미국 특정 지역에서는 유례없는 5중 무지개도 뜨고, 일리노이와 시카고 쪽에서는 심각한 Dust storm도 발생했다고 한다. 날씨와 기후가 대체 어찌 되어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재난은 재난이고, 일상은 또 일상이다.

짧은 휴식의 주말 뒤에 여름 학기가 도래했다.



확실히 방학이라 학교가 텅텅 비고 사람이 없다. 그 와중에 우리 프로그램 박사생들은 다 학교에 있다. 방학 중에도 내담자를 보는 선생님들도 있고, 대부분 다들 여름 학기 수업도 듣고 연구 업무나 논문도 써야 하기 때문이다. 불쌍한 사람들……. 그렇지만 혼자가 아니어서 오며 가며 마주치니 위로가 되고 힘이 난다.


오피스 자리에서 쌓이고 쌓인 연구 일로 처리하다가, 고년 차 박사 선생님들 Dissertation Writing Group 하는 데에 껴서 2년 차 논문 마무리도 하고 있다. 박사논문 쓰는 것도 아닌데 대충 끼어 있어도 누구 하나 모난 사람 없이 다들 모임에 잘 왔다고 해주고, 팁도 이것저것 많이 알려줘서 되게 감사했다. 프로그램은 너무 고되고 힘들지만 포용력 좋은 사람들 덕에 위로받는 방학 첫 주였다.





조금은 지쳐있고 버겁고 그런 와중에 궂은 날들도 많아 쉽지 않은 여름 학기의 시작이다. 그래도 어찌저찌 매일에 충실하다 보면 어떻게 지나가있겠지 싶은 마음으로 또 나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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