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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지탱해주는 소소한 순간들

by 화햇


지난주에 따온 사과로 시작하는 한 주다.



자그마한 친구들은 잘 씻어서 통째로 학교 가지고 다니면서 베어 먹고, 알이 큰 친구들은 썰어서 녹인 땅콩버터에 찍어 먹고 있다. 엄선을 하며 따서 정도 들고, 모양이 워낙 반듯하니 어여뻐서 먹기 아까운 마음도 들었다. 결론적으로는 당도가 높아 좋은 사과였다는 엔딩이다. 개인적으로 땅콩버터 조합이 입에 잘 맞다. 땅콩버터를 살짝 녹이는 것이 킥이었다. 고소함이 진해진다.


사과의 당도에 힘입어 IRB를 써내려가 본다. 이번 주는 연구 일도 많고, 랩 미팅 발표도 있고, 수업 페이퍼 데드라인도 있고 해서 꽤나 바빴다. 뭐, 학기 중이 늘 그렇듯 말이다. 꼭 바쁜 일들은 한 번에 오더라. 그래도 이번 주는 그러려니 하고 큰 스트레스 없이 지나갔다.





가을이라 날씨가 정말 좋다. 학교 가는 길, 하늘이 아름다워서 학과 빌딩과 함께 한 컷 남겨보았다. 그리고 아주 평범한 나날의 강의실 풍경도 한 장 남아보았다. 왠지 시간 지나고 보면 이런 가장 일상적인 사진들이 그립지 않을까 싶어서다. 가만 보면 특별한 날 사진은 많이 담는데 매일 공부하고 일하는 공간 사진은 잘 안 담게 되는 것 같다. 소규모의 정다운 수업 강의실이 아닐 수 없다. 대신 사람이 없는 만큼 세미나형 수업에서 개별 발언의 지분은 더 많아질 수밖에 없는 슬픈 사실......!


그래도 미국에서 박사 공부하면서 토론형/세미나형 수업에 제법 익숙해졌고, 발언이나 질문하는 방법도 많이 늘었다. 처음에는 긴장되고 입을 못 떼겠어서 수업에서 조용하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토론에서 생각 않고 코멘트 제일 먼저 하기 자체 프로젝트(?)를 몇 학기 진행한 끝에 이제 나름 어느 수업이든 코멘트나 질문을 많이 하는 라인에 속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수업 참여 점수에서 감점 받는 일도 없어졌다. 처절한 생존의 나날들이지만 그만큼 내 안의 두려움을 마주하고 서서히 줄여나가며 성장하고 있다.





첫 슈퍼바이저 실습은 다채로웠다. 모든 슈퍼비전을 녹화해야 해서, 슈퍼바이지 오기 전에 한 컷 남겨보았다. 슈퍼바이징은 처음이라 떨리기도 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기도 하고, 동시에 어렵기도 하고, 잘 모르겠기도 하다. 맨날 받기만 받아봤지 직접 질문을 해결해 주는 입장이 되니 진땀이 났다. 또, 생산적인 피드백을 잘 소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내 경험에 국한하자면 한국 슈퍼비전은 조금 더 엄격하고 직설적이라면, 미국은 아기 다루듯이 주어야 함을 알기 때문에, 이 문화권의 방식에 맞추는 엑스트라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슈퍼바이지가 얼마나 가져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에 따라 똑같은 시간의 생산성이 매우 달라짐을 느꼈다. 역시 자기 밥그릇 자기가 챙기는 거다. 그동안 나는 어떤 슈퍼바이지였을까도 돌아보게 된 시간이었다. 동시에, 슈퍼비전 해주는 것도 꾸준히 연습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퍼비전을 본격적으로 하게 될 인턴십이 기대된다.




이번에는 다시 슈퍼비전을 받는 입장이다. 다음 주에 전체 심리 상담 세션 풀 비디오를 슈퍼바이저 선생님과 리뷰하고 스킬 평가를 받는 시간이 있다. 평가에 쓰일 심리 상담 비디오를 고르느라 이번 주에 심리 상담 비디오를 많이도 돌려봤다. 내 얼굴과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보는 것은 언제 봐도 오글거리고 불편한 경험이다. 심지어 남과 함께 풀로 봐야 하니 더더욱 쉽지 않다. 3자의 시선이 되어 영상으로 세션을 리뷰해 보면, 다르게 했어야 할 점과 개선할 부분이 적나라하게 보여서 교육적인 동시에 꽤나 고통스럽다.


그래도 이렇게 다 비디오 녹화가 되는 환경에서 실습 수련하고, 마이크로 매니징 슈퍼비전을 받는 경험을 갖는 것 자체가 운이 좋고 드문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미국의 꼼꼼하고 체계적인 수련 환경에서 최대한 많이 배워가고 싶다.





심리 상담 센터가 위치한 학내 병원은 해마다 10월이면 할로윈 오피스 데코레이션 대회를 연다. 오피스를 꾸미는 열정들이 어마어마하다. 2층 영상 의학팀에서 해리포터 컨셉으로 강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9와 4분의 3 승강장과 호그와트 컨셉을 살벌하게도 소화해냈다. 자세히 보면 천장에 촛불 조명까지 달려있고, 환자를 부를 때 망토를 입고 지팡이를 들고나와서는 들어갈 기숙사 이름을 알려준다. 컨셉에 잡아먹힌 사람들 같으니라고...! 웃겨 죽는 줄 알았다. 틈틈이 오피스들 구경 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바빠서 아직 미쳐 못 꾸민 사람들도 많다고 하니, 남은 10월 동안 또 재미있는 데코가 있으면 가져와 보겠다.







나는 게을러서 할로윈 데코는 모르겠고, 요즘 오피스에 새로 데려온 식물 키우는 것에 푹 빠져 있다. 센터에 Multilingual Psychologist로 와 계신 멋들어진 한국인 선생님이 계신데, 식물을 잘 키울 줄 모른다고 했더니 뿌리가 날 때까지 키우다가 넘겨주셨다. 화분에 옮겨 심기만 하고 물을 주며 들여다보고 있는데, 생각보다 생명체 하나 오피스에 있는 것이 되게 행복감을 준다. 가습기 밑에 촉촉한 환경에 놓아주며 계속 들여다보고 있다. 요즘 학기 한복판이라 내담자 케이스도 많고, 또 그만큼 차트 작성도 많아서 너무 바쁜데 소소한 행복이다.


초록색은 언제나 옳다.








오랜만에 돌아온 What's in my Dosirak bag 시간이다. 이전 여러 도시락통을 부셔먹고(?) 새로운 도시락 통을 데려왔다. 부디 이번 도시락통은 좀 오래가길 바랄 뿐이다. 밥에 양념된 낫또와 계란 후라이를 얹고, 김치, 마늘종 무침, 멸치, 미역줄기 밑반찬을 싸간다. 뼛속까지 한국인의 밥상이다. 간식으로는 시즈닝 된 피스타치오, 청포도, 감자칩까지 알차게 챙긴 뒤, 라떼까지 챙기면 완성이다. 묵직-하던 도시락 가방이 퇴근길에는 빈 가방처럼 가벼워진다.


바쁠수록 연료 주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지도 교수님의 생일이었다. 같은 랩 박사 선후배 선생님들과 함께 카드도 나눠쓰고, 무엇보다 후배가 자원해서 직접 구워온 브라우니 라즈베리 케이크로 서프라이즈 파티도 했다. 교수님이 되게 신나하시며, 케이크를 가족들에게 자랑하고 싶다고 알뜰살뜰하게 챙겨가시는 모습에 뿌듯했다. 지도교수님과 랩 선후배 선생님들이 다들 선하고 화목해서 또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 윗물도 아랫물도 다들 맑고 청아하다. 지도 교수님이 그래도 나름 심리학자라(?) 사람 하나는 잘 뽑아주신 덕에 학교생활이 퍽 평안하고 즐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길고도 지난한 박사 생활은 그저 소소한 즐거움들로 버텨진다.



















날씨가 더없이 좋은 요즘, 남편과 동네 산책을 자주 하고 있다. 천천히 이 동네, 저 동네를 거닐며 예쁜 가을 풍경들을 눈에, 사진에 담으며 모아보았다. 전원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근래 너무 바빠서 예전처럼 러닝을 못 가서 다소 아쉽지만, 저녁 산책도 꽤나 낭만적이고 힐링이 된다. 시골이라 공기도 좋고, 선선한 가을 저녁의 시원한 내음을 한 아름 들이마셔 본다.



학기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있다.


아직 휴일은 멀었고, 체크리스트를 지우는 속도보다 늘어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부담감도 크고, 스트레스도 많지만 이 시간과 과정을 기회라고 여기면서 묵묵히 잘 해치워 나아가기를 되새겨 본다. 또, 큰 자갈들 사이를 빼곡히 채우는 고운 모래들처럼, 삶의 항아리를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으로 그득그득 채워가기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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