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포스팅은 그리 좋지 않은 소식으로 열게 되었다.
그렇다. 오피스 테러를 당했다. 어느 날 아침에 출근을 해보니 누군가 내 책상 오피스에서 쓰는 노트 패드에 저렇게 역한 액체로 테러를 해 두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둔 소지품도 훔쳐 갔다. 나 말고도 이런 봉변을 당한 이가 한 명 더 있었는데 바로 하필 우리 랩 후배 터키인 유학생 친구였다. 그 친구의 책상에 걸려있는 토토로 포스터 역시 액체 테러를 당했고, 다른 포스터는 아예 임의로 떼어 간 상황이었으며 책상에 둔 향수도 훔쳐 갔다.
사실 오피스 책상에 값나가는 것은 두지 않아서 훔쳐 간 물건들은 다 합해도 만 원어치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물건만 곱게 훔쳐 갔으면 웬 그지 새끼가 그랬나 생각하고 말아서 화도 안 났을 것이다. 그런데 역한 물질을 묻혀두고 가는 행위에 너무 화가 났다. 이건 그냥 순도 높게 의도적으로 피해만 끼치는 행위이니 말이다.
스무 개가량 되는 대학원생 오피스 데스크 중 딱 한국인/터키인 외국인 유학생 테스크만 공교롭게도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나란히 있는 데스크도 아니었는데? 참고로, 대학원생 데스크는 자리마다 네임택이 달려 있어, 외국인 이름은 너무나 쉽게 식별할 수가 있다. 내 이름은 누가 봐도 아시안이고, 터키 후배는 알파벳부터 특이한 알파벳이 이름에 그득그득하니 말이다. 너무 열이 받아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과 시뻘게진 얼굴을 겨우 진정시켜가며 지도 교수님과 학과장님께 모든 증거를 담아 이메일로 사건 리포팅을 했다.
다행히도 우리 학과는 Multiculturalism & Social Justice 지향이라, 유학생 둘만 당한 이 상황에 대해 상당히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었고, Dean에 보고가 올라가고 학과장님이 학내 경찰에 신고도 해주었다. 다만, 업무 공간에 보안 카메라도 하나도 없고, 밤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어 목격자도 없어서 범인을 잡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솔직히 기대도 안 한다. 아무도 없을 때 와서 저지르고 간 것을 카메라 하나 없이 전통적 방식으로 뭐 어떻게 잡는다는 말인가.
답답한 마음에 오피스 구역에 보안 카메라를 달았으면 좋겠다고 건의를 했는데, 우리 자유를 중시하는 일부 미국인들께서 보안 카메라의 존재가 불편하시다 하여, 이 건의가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라고 한다. 어이가 없다. 당하는 건 유학생인데 자기들 불편이 여기서 제일 중요하다는 건가? 화가 났지만 나름 이성적으로 그렇게 불편하면 퇴근 시간 후에만 녹화하는 방식으로라도 설치해달라고 다시 건의했다.
언제 적 신뢰 사회를 사는지 모르겠다. 갑갑하다 이 촌사람들. 서울은 블록마다, 가는 곳마다 각도별로 CCTV 천국이라 애저녁에 범인 색출하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다. 피해자 진술, 주변인 진술로 뭘 어떻게 찾겠다는 건지, 에효.
사건은 금요일이었는데, 주말부터 그다음 주 내내 학과 교수님들께 위로와 지지의 이메일도 많이 받고 친구들에게 메시지도 차고 넘치게 받았다. 티타임도 제안해 주는 교수님들도 계셨고, 얘기할 사람 필요하면 언제든 오라고 해주었다. 학과 전체에 사건 고지 이메일이 돌았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발생했고 피해 학생들에게 각별한 지지를 부탁한다고 쓰여있었다.
한 행정 직원은 내 책상에 새로운 노트패드 하나를 대체하고 쪽지를 남겨 주었다. 테러 당한 노트는 경찰 조사까지 증거 제출용으로 일단 보관하고 있었는데, 네임택을 떼러 와서 이 증거물을 보고는 마음이 안 좋았던 모양이다. 별것 아니지만 고마웠다. 또 다른 교수님 한 분은 뭐든 위로를 표현해 주고 싶은데 도난당한 물건을 자기가 사줘도 되겠냐고 엄청 조심스럽게 물어봐 주셨다. 여러모로 너무너무 화가 났었는데, 이런 대처 덕분에 그래도 한결 마음이 누그러졌다.
사건이 있고 난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을 하니, 대학원생 오피스 데스크 공간에 전체 네임택들이 다 떼어져 있었다. 이제부터 데스크 공간에 De-identification을 한다고 했다. 기분이 오묘했다. 이름을 노출하는 게 위협이 되는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고, 현실이 자각되는 순간이었다. 어찌 보면 업무 공간에 네임택은 당연한 것인데 말이다. 회사에도 자리마다 직함과 이름은 다들 버젓이 달고 지내거늘......!
조만간 Town Hall Meeting을 개최해서 대학원생의 업무 공간에 안전을 어떻게 확보할지 논의할 예정이라고 한다. 다른 대학원생들도 두려움과 불안감을 많이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이번 사건이 심각하게 논의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와 후배뿐만 아니라 단과대 건물 전체에 같은 날 비슷한 일들이 산발적으로 여러 건 있었다고 한다. 하여, 학과 공간뿐만 아니라 단과대 전체적으로 보안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둘 만 타깃 당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이 되기도 하는 한 편, 어쨌든 이 공간, 이 층에서는 우리 둘이었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기도 했다. 어쨌든 누가? 왜?라는 질문은 전혀 해결이 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어려울 전망이다. 확실한 것은 이 불확실한 정체불명의 공격에 내가 당했다는 것뿐이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타지에 와서 안 겪어도 될 일을 겪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미국에서의 배움이나 경험은 너무나 값지지만,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위계를 보면 자아실현의 욕구는 안전에 대한 욕구가 채워진 그 한-참 위다. 안전에 대한 욕구는 상당히 근본적인 욕구다. 안전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니,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많이 든다.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은 분명 이런 명암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따뜻한 공동체의 위로와 지지를 받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나, 그걸 받을 일이 나한테 생긴다는 것이 유감스러운 것은 분명하다. 사실 지난 학기부터 미국 내 외국인을 향한 각종 이슈들이 붉어질 때마다 위로 받을 일이 많았다. 이런 일이 잦아지니 사회에서 나의 위치와 현실을 더더욱 피부로 실감하게 되는 것 같다.
이방인으로서의 삶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요즘이다. 주변에 외국인이 있다면 각자 할 수 있는 선에서 조금만 더 다정하고 따뜻해주길 부탁하며 포스팅을 접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