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벗, 번아웃 달래고 지나가기

by 화햇


화창한 주말이었다.



퀄 시험 데드라인 전 마지막 주말이기도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사실 마지막 전력을 다해 페이퍼를 수정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이번 주말 천천히 쉬면서 생각을 해보다가 알게 된 것인데, 임상현장실습을 하고 있는 심리 상담 센터 발 소진이 온 것 같다. 때는 바야흐로 바로 지난 금요일이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 30분 퇴근할 때까지 10시간 30분 근무를 하면서 정말이지 한 톨의 쉬는 시간 없이 모든 타임 슬랏이 다 차 있었다. 점심시간에도 계속 차팅을 하느라 싸온 점심을 먹으면서 일했다. 그냥 하루 종일 내내 일해야 했다. 그러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 덮어오던 번아웃이 나를 완전히 덮은 것 같다.


최근에 트레이닝 디렉터들과 상의해서 조금 더 위험도 있는 내담자들을 받아보는 것으로 트레이닝 카테고리를 상향 조정했다. 미국은 고소의 나라인지라, 고위험군과 일을 하노라면 문서 작업이 유의미하게 많아진다. 일단 모든 상호작용을 다 기록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서라도 특정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를 다 했다는 것을 빠짐없이 꼼꼼히 기록해야 방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과 닥터나 스페셜리스트 스태프들과 컨설팅을 할 일도 많아지기 때문에 추가 회의부터 문서화까지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다.


뿐만 아니라, 만물이 생동감을 되찾고 꽃을 피우는 봄이 도래하면서, 초기 성인기인 대학생들에게 위험한 꽃도 함께 피어나는 문제가 있었다. 심각한 증상들로 분류되는 증상을 보고하는 케이스도 부쩍 늘고, 최근 몇 주간 센터 전체의 로딩도 확연히 늘어났다. 센터에 경찰이 다녀가는 일도 늘고, 보통 대기실 의자가 넉넉한 편인데, 최근에는 의자가 부족해서 서서 기다리는 날도 발생했다고 하니 말이다.


모쪼록 케이스도 늘어나고, 케이스 하나하나의 심각도도 올라가다 보니 일이 너무 늘어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와 피로가 많이 누적되었던 것 같다. 센터에 출근하면 기본적으로 퇴근 때까지 단 한 시도 쉴 시간도 여유롭게 밥만 먹을 시간도 없었다.



지난 금요일, 근무를 마치고 집에 오니 우울감이 심하고, 주말 양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월요일 출근만 생각하면 너무 울적하고 불행한 감정이 들었다. 그나마도 토요일은 또 과제 제출이 있는 날이라 부랴부랴 수업 과제를 해야 했다. 그러고 정신을 차리니 일요일이었다. 퀄 시험 페이퍼를 써야 함을 알았으나 그냥 때려치우고 놀기로 했다. 일단 기분이 너무 울적했고, 이대로 일만 하다가 또 월요일 출근을 맞이하면 내가 먼저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우울한데 누구를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 '나는 오늘 이 일요일에 어떤 보상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하여, 퀄시험 전 마지막 주말이었지만 이 시간을 휴식하고 번아웃을 다스리는데 쓰기로 '선택'했다. 때마침 일요일 아침부터 화창-하고 포근하니 날씨도 최적이었다. 데드라인이고 페이퍼고 다 모르겠고, 일단 내가 건강히 잘 살아야지 않겠나, 배 째라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하여, 남편과 함께 볕 쬐고 그냥 나가 놀기로 했다.




특별날 것은 없지만 미국스러워서 좋아하는 브렉퍼스트 다이닝에 갔다. 그간 먹고 싶었던 크림치즈 베이글을 맛나게 먹어치웠다. 부업 주부(?)라 그런지, 남이 해주는 음식은 아무리 간단한 것이어도 다 꿀맛이다. 별것 아니지만 그냥 오랜만에 가지는 이 시간이 너무 좋았다. 역시나 다운타운에 나가면 우리 부부만 빼고 다 백인 미국인들뿐인 이 타운의 바이브도 한껏 느끼고 눈에, 귀에 담아본다.





볕이 좋아 얼마나 다행이던지 모른다. 한 주 내내 비가 왔던 것 같은데, 돌이켜보니 지속된 꿀꿀한 회색 날씨도 우울감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얼마 만에 쬐어보는 날 것의 볕인지 모르겠다. 날씨가 도와준 것도 신의 한 수였다. 세 스쿱 짜리 파인트 아이스크림을 사서 신나게 퍼먹으면서 남편과 돌아다녔다. 배도 부르겠다, 혈당도 최고조로 끌어올렸겠다, 광합성도 이토록 원활하겠다, 날도 포근하겠다 내 마음을 꽝꽝 얼리던 우울감이 절로 녹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따스한 봄날의 캠퍼스는 아리따웠다. 특히 내가 맨날 다니고 보는 단과대 건물이 아닌 쪽을 오랜만에 거닐어보니 특히 더 새롭고 예뻐 보였다. 선크림 꼼꼼히 바르고 얼굴을 그냥 다 내놓은 채로 한 시간 남짓 볕 아래서 남편과 조잘거리며 산책을 했더니 기분이 정말 많이 나아졌다. 전체적으로 몸에 활력도 돌고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나오길 참 잘했다.



남편이 공부하는 건물도 괜히 한 바퀴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인테리어가 예뻐서 한 컷 남겨보았다. 남의 떡은 왜 항상 더 커 보일까?




한참 산책으로 하고 돌아오니 뺨이 한껏 상기되어 있고, 몸은 개운하면서도 기분 좋게 노곤노곤했다. 그대로 침대로 다이빙해서 진-하고 굵게 낮잠을 한 잠 세상모르고 자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립아이 소고기를 두 큰 팬 가득 구워 먹고, 블로그를 쓰며 일요일의 끝자락에 앉아있다.


내일 또 다른 8시 출근과, 무겁고 많을 일들과,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퀄 시험 데드라인이 내일의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오늘 하루 가성비 좋게 충전을 하고 나니 이 어찌할 수 없는 과업들을 어제보다는 한 뼘 덜 우울하게, 덜 불행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면 된 것 아닐까?



오늘 하루 참 자알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