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원래 의미가 없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것이 엄청난 삶의 고통(불행) 가운데서도 살아낼 힘을 부여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관점은 바람직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삶의 의미를 쫓는 순간 우리의 삶은 고통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다. 세상은 온갖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고 어느 인간도 불행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 모든 것의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은 괴로움을 추구하는 삶이나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삶에 거창한 '의미'가 있다고 믿는 순간, 그 의미가 증발하거나 불행이 닥쳤을 때 겪게 되는 상실감과 괴리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 자체가 오히려 인간을 옥죄는 거대한 '정신적 형벌'이 될 수 있다.
1. '의미'라는 허상의 위험성
모든 생명은 생물학적 우연과 본능에 의해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만이 유독 '의미'라는 고차원적인 생각을 한다. 문제는 이 의미라는 것이 날씨처럼 변덕스럽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상황에 의해 쉽게 무너진다는 점이다. "의미가 있어야만 살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의미를 찾지 못하는 순간 곧바로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버리게 된다.
2. '그냥 산다'는 것의 숭고함
오히려 "의미 따위는 원래 없다"고 선언해 버리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얻는 지름길일 수 있다. 내가 사는 이유는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으니까'여야 한다.
"나는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거나 "이 고통에 반드시 교훈이 있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라. 거창한 미래의 목적지(의미)를 바라보는 대신, 지금 당장 내 발밑의 감각이나 숨 쉬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 산에 핀 꽃이나 길가의 고양이가 의미를 찾지 않고도 당당히 존재하듯, 인간도 그저 존재함 그 자체로 완결된 상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3. '의미' 대신 '재미'나 '감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곧 '삶이 가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거창한 철학적 의미 대신, 오늘 마시는 시원한 물 한 잔, 등산하며 느끼는 상쾌한 공기, 혹은 좋아하는 책을 읽는 순간의 몰입 같은 경험들로 삶을 채우는 것이 훨씬 건강한 생존 전략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삶은 원래 의미가 없다"는 깨달음은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실존적 해방'에 가깝다. 의미를 찾으려 헤매며 스스로를 괴롭히기보다, "그냥 태어났으니 이왕이면 덜 아프고 조금 더 편안하게 머물다 가겠다"는 태도가 훨씬 더 단단한 삶의 중심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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