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현 Dec 02. 2020

세상을 보는 방법

정창섭의 미술 읽기

백자, 캔버스에 유채, 72x61cm, 1956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창문 단상

   오늘날 컴퓨터 앞에서 시작 버튼을 누르면 마이크로 소프트의 컴퓨터 운영체제인 ‘윈도우’를 만날 수 있다. 마이크로 소프트는 창문의 개념을 가지고 와 새로운 창이 열리면 다른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는 직관적이고 편리한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창문의 개념은 이전부터 공간의 연속성을 차단하고, 분리시키지만, 완벽하게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각과 현존하고 있는 공간을 나누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창문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건물이 있어야 하는데 건물 안은 외부 환경과 상관없는 실내의 공간이다. 실내의 공간에서 창밖을 바라본다면 같은 시간이지만 체험하는 것은 다른, 현존의 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는 자연의 빛과 바람, 공기와 같은 움직임은 원시인들의 동굴 벽화부터 인간에게 창조의 원천이 되어왔다. 한국은 1970년대 새마을 운동 이전까지 창문에 한지를 덧대어 썼다. 이러한 창문의 기술은 투명한 유리 창문과는 다른 경험을 가능하게 하였다. 한지는 완벽한 차폐가 불가능하기에 내외부의 공기를 공유하게 해 주었고, 완벽하게 바깥을 볼 수 없었으며 그림자로 창밖의 형상을 짐작하게 하였다. 오늘날에는 영화나 소설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창호지’의 경험은 구멍을 뚫어 몰래 관찰하는 관음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밤에는 안팎이 바뀌어 실내의 불빛으로 창호지에 생기는 그림자로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을 유발하기도 하였으며, 크게 구멍 난 종이는 가난의 상징처럼 표출되는 등 다양한 은유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하였다. 


원중원, 캔버스에 유채, 140x140cm, 197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정창섭의 창문

   1927년 태어난 정창섭은 한지로 된 창문을 온전히 경험한 마지막 세대이다. 정창섭이 경험한 창문의 변화에 대한 문화적 흔적은 그림의 소재로 활용되어 그가 바라보는 세상을 표현하였으며, 재료적 도구로서 한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정창섭은 대학교 4학년에 한국전쟁을 경험하며 인간에 대한 끔찍한 만상을 목격하였다. 이러한 전쟁의 경험은 자연스럽게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로 이어지고 정창섭 역시 당시 젊은 세대가 주도하던 추상 미술로 자신의 화업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유행하던 어떠한 단체에 소속되어 미술 활동을 이어간 것이 아닌, 자신의 기법을 연구하는데 치중하였다. 이러한 흔적은 그의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유화 물감의 질감과 붓자국과 같은 흔적에 집중하여 표현하는 것이 아닌, 물감에 테라핀유를 많이 섞어 묽게 활용하였다. 한국화의 발묵 효과도 마찬가지 기법인 물의 농담을 달리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창섭의 그림에서 점차 구체적인 형상은 사라지고 아예 추상적인 도형들이 등장하였다. 


백의 집결, 130.5x162.5cm, 1961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지와의 만남

   한지는 99번의 담금질을 거쳐 마지막 주인의 손에서 완성된다는 의미로 백지라고 불리기도 하는 종이로 다양하게 가공이 가능한 유연한 종이이다. 한지는 창호 뿐 만 아니라 장판, 벽지를 비롯하여 부채, 가구 등 생활 속 곳곳에서 활용되던 소재이다. 정창섭이 생활 곳곳에서 피부로 경험하던 한지는 현대식 가옥이 등장하며 주변 생활에서 잊혀 지자 점차 그의 그림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까지도 종이는 쓰임새에 따라 명칭을 다르게 불렀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면 화선지, 창호에 붙이면 창호지와 같이 한지의 용도만큼이나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 이후에 자취가 사라지자 한지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갖게 되었다.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한지는 정창섭이 표현하고자 하는 회화의 근원적인 측면에 적합한 재료이다. 정창섭은 한지에 대한 연구는 나아가 원재료인 닥으로 나아가 스스로 만든  종이 자체를 작품화하는데 이르렀다. 캔버스 위에 닥을 얹고 편편하게 펼쳐가며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더해진 작가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작품으로 완성된 물아일체의 세계를 이룬 것이다. <닥> 연작으로 정창섭은 창작 활동을 시작한지 33년만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하였다. 정창섭 이후 여러 미술가들이 한지를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 중 정창섭은 두 번째로 꼽힌다. 첫 번째 시도한 권영우는 종이에 구멍을 내고 이를 통하여 발묵의 효과를 극대화 시키는 방법을 활용하였다. 그러나 정창섭은 종이의 유연한 물성에 기인하여 작품을 창작하였고, 이러한 그의 창작 방법은 어린 시절을 함께한 한지의 기억을 소환하여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닥 No.85099, 면천에 닥지, 140x240cm, 198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나의 마음을 수련하는 시간, 묵고 

   정창섭은 종이의 원재료인 닥을 손으로 주무르고 반죽하여 유연하게 만들고 손으로 펼치고 또 말리는 제작과정에서 신체성이 적극 개입된 작품을 창작하였다. 이러한 창작 과정은 마치 수행하는 듯한 구도자의 자세로 지속되었다. 이러한 작품 제작 과정이 있었기에 1990년대 이후 <묵고> 연작이 등장할 수 있었다. <묵고>는 조금 더 촘촘해진 닥의 밀도에 색감을 더한 작품이다. 작품 내의 색감이 화려하거나 다채롭지 않지만 단정하고 정감있는 분위기의 톤으로 염색으로 닥종이에 색을 입혀 발색한 것이기에 그 느낌이 더욱 편안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조용히 명상하듯 다가오는 그의 <묵고>연작은 정창섭이 처음 창호지를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았던 창문의 형상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어린 시절부터 그가 바라보았던 창호지를 두고 안팎의 모든 사물들이 소통하던 그 시절의 추억을 비롯하여 조용히, 하지만 묵직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작품 활동을 지속해 온 작가 본인의 사상까지의 모든 기억을 이 작품에 함축시키고 있다. 요즈음 코로나19로 자유로운 본래의 일상이 불가능해지고, 사람들을 마음 편히 만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정창섭의 조용히 수행하는 듯 한 자세로 명상을 위해 펼쳐 둔 내 마음의 창문이 아닐까 싶다. 환란의 와중에도 묵묵하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나와 또 모두를 응원하는 마음을 전한다.      


묵고, 캔버스에 닥지, 염료, 260x160.5x(2), 1996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이 글은 월간 비자트와 중기이코노미에 기고된 글 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핵이 예술이 된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