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의 행복 5(완결)

함께 오후 세 시의 행복을 느껴 보지 않을래요?

by 소위 김하진

집으로 들어가는 빌라 계단에서부터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계단을 오르다 보니 오랫동안 불이 나가 있던 2층 계단의 센서 등이 갑자기 환하게 켜졌다. 진은 멈칫하고 놀라며 천정의 등을 쳐다보았다.

‘누가 고쳤나 보네.’

불빛 하나만으로도 집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전혀 새롭게 느껴졌다. 집으로 들어서자 복도로 새어 나오던 냄새는 몇 배로 증폭되어 진의 콧속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청국장과 고등어 냄새였다. 청국장과 고등어는 진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오랫동안 먹어 보지 못한 음식이었다. 이모가 생기 있는 얼굴로 음식을 만들고 있는 모습도 생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늘 그래왔던 것처럼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손을 씻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식탁에 앉았다. 청국장의 구수한 냄새에 갑자기 강한 허기가 밀려왔다. 진은 얼른 국물 한 숟가락을 먼저 떠먹어 봤다. 진하고 구수하지만 불쾌한 군내는 전혀 나지 않았다. 잘 익은 묵은 김치 덕분에 청국장 맛이 한결 조화로웠다. 이모가 고등어를 발라 진의 숟가락에 한 토막 놓아주었다. 적당히 고루 잘 익힌 고등어는 촉촉하고 따뜻하면서도 감칠맛이 났다. 이모는 계속해서 진의 밥그릇에 고등어 한 토막씩을 떼어 내주며 천천히 밥을 먹었다. 진은 한 자리에서 숨도 쉬지 않고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는 여느 집들처럼 평범하고도 심심한 저녁이었다. 진은 이런 풍경이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오래전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은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그려왔던 풍경인 것처럼.


“진아, 도서관 계약 만료가 얼마 남지 않았지? 이젠 어딘가에 정식으로 입사해 보는 건 어때?”

“글쎄. 근데 갑자기 왜?”

“그간 네가 이모 때문에 고생만 한 거 같아서. 이모도 취직을 해보려고. 이모가 음식을 진짜 잘하잖아. 실력을 한 번 살려 봐도 좋지 않을까?”

“이모, 정말 괜찮은 거야? 아직은 약도 먹고 있고 힘들 때가 있잖아.”

“응, 힘들지만 이번엔 진짜 노력해 볼게. 진아. 내게 넌 딸이나 마찬가지야. 너무 오래 내 할 일들을 유기하고 산 거 같아. 이제라도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해 볼까 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이모가 엄마가 되어 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이모와 진은 서로를 지켜 주었지만 서로를 불안하게 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모의 ‘엄마’라는 말은 진의 가슴에 작은 불씨를 놓은 듯 따뜻한 열기가 되어 진의 온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낯설지만 싫지는 않고 두렵지만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문득 진은 이런 감정이 사랑인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출처 Pixabay


진은 훈의 서점에 다녀온 후로 ‘오후 세 시의 행복’에 대한 생각에만 빠져 살았다. 이 사랑스러운 서점을 어떻게 바꾸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다. 훈이 꿈꾸는 공간은 책과 사람들이 친구가 되어 함께 어울려 숨 쉬는 공간이었다. 진은 좋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지역의 다른 독립 서점들을 방문해 보았다. 어떻게 책을 배치해 놓았고 어떤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는지도 알아보았다. 대형 서점도 휘청거릴 정도로 사람들이 책을 멀리하는 시대에 어느 독립 서점이나 뾰족한 수 없이 책방지기의 열정과 희생만으로 버텨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진은 ‘오후 세 시의 행복’에 작은 희망의 씨앗 하나라도 심어 주고 싶었다. 훈이 더 이상 좌절하거나 꿈을 포기해 버리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진에게 훈은 길 잃은 어린 왕자처럼 느껴졌다. 외로운 책방 안에 홀로 앉아 슬픔을 달래고 있는 훈에게 기다리면 꼭 제시간에 찾아와 줄 누군가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것은 진 자신을 포함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될 것이었다. 진은 훈과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다가 한 편의 소설을 매개로 신나게 대화를 나누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 달콤했던 공감이 진을 지금 이 자리까지 이끌고 온 것이 아니었던가. 진은 서점에 오는 손님들도 자기와 똑같은 공감과 환대를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보면 서서히 ‘오후 세 시의 행복’을 느끼며 이 책방과 책방지기에게도 길들여질 수 있지 않을까?


진은 도서관에서 퇴근하자마자 서둘러 훈의 서점으로 향했다. 진은 서점에 도착하자마자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로 보이는 자리에 훈이 앉아 있었다. 훈은 눈과 입이 한꺼번에 초승달처럼 동그래지면서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책방의 온기와 훈의 미소가 이제는 낯설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진은 훈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그보다 먼저 성큼성큼 훈에게로 다가갔다. 진은 ‘오후 세 시의 행복’을 소설 전문 서점으로 특화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어린 왕자를 모티브로 하여 서점 안팎을 바꾸어 보자고 했다. 좋아하는 소설을 매개로 취향이 같은 손님들을 연결시켜 주고 감상을 공유하거나 서로에게 소설을 추천해 주는 프로그램도 만들자고 했다. 서점을 단지 책을 구경하고 사러 오는 곳이 아니라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사랑방처럼 만들자는 의도였다. 진이 조금은 흥분한 상태로 책방의 새로운 변신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어 대자 훈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경청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가끔씩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기도 하면서 끝까지 진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훈은 진의 제안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게다가 지금의 침체기를 벗어나려면 뭐라도 시도해 봐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출처 Pixabay


이제 훈은 다섯 시가 되어도 도서관에 오지 않았다. 매일같이 진이 퇴근 후 서점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둘이 함께 서점의 책배치를 바꾸고 진이 제안한 소설 코너도 새롭게 만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단골손님에게 부탁하여 하얀 외벽에 어린 왕자와 여우, 장미 한 송이를 그려 넣었다. 어린 왕자 벽화가 완성되자 서점 전체가 마치 어린 왕자가 살던 작은 별처럼 보였다. 그 별 안에 마주 앉은 진과 훈 사이로 수많은 소설 속 이야기들이 강물처럼 쉬지 않고 흘렀다. 어린 시절부터 읽어 온 소설 전체가 두 사람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둘의 대화는 밤늦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그럴 때면 밤하늘의 별빛이 책방 안으로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곤 했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면 마치 어린 왕자가 진과 훈의 모습을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 형상이 되었다.


진과 훈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들을 함께 골라 ‘유년의 책’ 코너도 신설했다. 거기에는 진과 훈의 추억들이 가득 담겼다.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손님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책 속 엽서에 몰래 남겨 놓기도 했다. 그리고 ‘어린 왕자’와 생텍쥐페리 코너도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책방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살리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오후 세 시에서 네 시에 오는 손님에게는 장미꽃이나 책, 예쁜 엽서 등 특별한 선물을 전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서점은 차츰 둘이 계획했던 모습으로 조금씩 변해 갔다. 진의 삶에는 이제 전에 없던 리듬과 활기가 생겨났다. 낮에는 도서관 직원으로 저녁에는 독립 서점 도우미로 생활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모 역시 동네 해장국집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잦아진 진에게 이모는 예전처럼 전화를 걸어 술을 사 오라고 하거나 빨리 들어오라고 다그치지 않았다. 둘은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조용히 일상을 꾸려 나갔다. 이따금 마주 앉아 이모가 차린 저녁을 먹거나 차를 마시며 하루의 일과에 대해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여느 평범한 모녀들처럼 둘 사이에는 약간의 지루함과 함께 믿음이 스며들었고 무채색의 안정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오늘은 도서관 계약이 만료되는 날이다. 직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도서관을 나선 후, 여느 날처럼 훈의 서점으로 향한다. 공기는 가볍고 머리는 두통 하나 없이 맑고 개운하다. 늦가을을 품은 바람이 진의 몸을 휘감는다. 약간은 차갑지만 부드러운 냉기가 콧속으로 조금씩 흘러 들어온다. 이제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추위를 심하게 타는 진은 겨울이 무척 싫었다. 안 그래도 작은 몸이 잔뜩 움츠러들어서 더욱 작고 보잘것없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늦가을의 찬바람에 숨어 있는 겨울의 냄새가 그다지 싫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진은 매일 걷던 이 길에 어느새 완전히 길들여져 버렸다. 아무런 생각 없이도 관성처럼 어느새 서점 근처에 도착해 있다. 서점에 가기 전 편의점으로 먼저 방향을 돌린다. 이 편의점 역시 훈과 함께 늦은 밤 컵라면을 사 먹기도 하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시기도 하면서 친숙한 공간이 된 곳이다. ‘딸랑딸랑’ 소리가 나는 문을 밀고 들어가 아메리카노 두 팩과 얼음 컵 두 개를 산다.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될지도 모른다. 아메리카노와 얼음 컵이 담긴 봉지를 들고 훈의 서점으로 들어간다. 여느 때처럼 훈은 해사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진을 바라본다.

“아메리카노 배달이요.”


출처 무아

진도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로 화답한다. 훈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진이 먼저 서둘러 걸어 들어간다. 서점 안쪽 테이블에는 손님 두 명이 마주 앉아 무언가에 홀린 듯 둘만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있다. 진은 조용히 훈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넨다.

“저 내일부터 백수예요.”

“아, 그래요? 그럼 이제부터 나와 함께 ‘오후 세 시의 행복’을 느껴 보지 않을래요?”

“그럴까요?”

둘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크게 웃자 서점 구석에 있던 손님들이 흠칫 놀라 이쪽을 쳐다본다. 사위가 한층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시간, 서점 밖 가로등에 반짝하고 불이 들어온다. 순간 ‘오후 세 시의 행복’ 내부가 한층 환하게 밝아 온다. 어린 왕자의 다정한 미소도 가로등 불빛을 받으면서 따스하게 책방 전체로 번져 나간다. 진은 얼음이 가득 담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더 마셔 본다. 이상하게 하나도 차갑지가 않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