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의 행복을 위해
이모는 깊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진은 달빛이 창을 뚫고 서서히 거실 전체에 차오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꼼짝도 않고 이모를 기다렸다. 현관문이 열리고 이모의 형체가 바닥에 드리워진 달그림자를 뭉개 버리는 걸 보고서야 진은 이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모는 달빛을 받아 허옇게 부풀어 오른 얼굴을 하고 있고 평상시처럼 얼굴은 불그레했지만 술 때문은 아닌 듯했다. 이모는 조용히 식탁으로 가서 자리에 앉더니 물을 한 잔 따라 벌컥벌컥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내게 빌었어.”
“누가? 뭘?”
“이모부를 만났어.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고 고백했어. 물론 아이가 있어서 내 곁을 떠나게 되었지만 평생 나에게 사죄한다는 심정으로 살겠대.”
“이모, 지금 그 사람 말을 믿는 거야? 십 년도 넘게 이모를 속였던 사람인데 그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누가 알아?”
“진아, 그 사람이 이제 와서 날 속일 이유가 어디 있니?”
“이모 인생이 이렇게 망가져 버렸는데 죄책감을 느낄 수 있지. 또 그래야 사람이기도 하고.”
“진아, 어쩌면 그 사람의 진심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라. 내게 용서를 빌었고 우리의 사랑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고백했다는 게 중요할 뿐이지.”
진은 흥분해서 격양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이제 와서 용서를 빌었다는 이모부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걸 받아 주려는 이모가 더 답답했다. 이모는 곧 터져 버리고 말 비눗방울을 안간힘을 다해 손으로 붙잡고 있으려고 하는 어린아이처럼만 보였다.
“진아, 너는 이해 못할지 모르지만 내겐 중요해. 그의 한마디가. 이제 와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려는 것은 아니야. 그럴 수도 없고. 그는 내게 돌아오지 않을 거야 죽을 때까지. 다만 나의 삶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만이 내겐 중요할 뿐이야. 정말로 그래.”
이모는 독백이나 다짐처럼 조용히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순간 진은 이모의 심경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모는 지독했던 허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모부의 말을 낚아챈 것일지도 몰랐다. 메마른 이모의 삶에는 한줄기 빛이 절실했고 이모부의 고백은 그 순간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 빛이 되어주려 하고 있었다. 지금껏 진은 이모가 무책임하게 삶을 방기하고 있다고만 여겨 왔다. 하지만 그것은 이모의 껍데기만 보고 내린 성급한 오판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모는 지금까지 살기 위해 혼자서 치열한 싸움을 해 오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날 이후, 이모는 병원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고 알코올 의존증 환우들과의 모임에도 나갔다. 이모의 삶에 예전에 없던 생의 리듬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진은 이모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낯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변화가 설령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이전까지 이모의 삶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가고만 있었다. 완전히 화석이 되어 버리기 전에 잠시라도 이모를 녹일 뜨거운 불이 절실히 필요했다. 어쩌면 그 불이 이모를 다시 예전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흙으로 되돌려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외로움에 덥석 발목이 붙들리는 날이 오겠지. 그렇게 한 발이 붙들리면 나도 모르게 발을 절고 뒤뚱거리게 되는 거야. 그럼 외로움의 낭떠러지에서 이유도 없이 추락해 버리고 마는 날들도 있겠지. 이모처럼.’
진은 무릎과 손목의 상처를 손으로 살살 쓸어 보았다.
다음 날 진은 퇴근길에 훈의 서점으로 향했다. 건물 전체가 하얀색으로 페인트칠이 되어 있어서 그리스 산토리니의 한 마을을 떠오르게 했다. 까만색 글씨로 ‘오후 세 시의 행복’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벽에 나 있는 커다란 창으로 서점 내부가 절반쯤 들여다보였다. 포근하고 아늑한 주황색 빛이 창틈으로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성냥팔이 소녀가 마지막 성냥에 불을 붙이며 바라보았던 온기 가득한 집안의 모습처럼 간절히 소망하지만 닿을 수 없는 세계의 따스함인 것만 같았다. 진은 아무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훈이 정문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앉아 있었다. 마치 진이 오기를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커다란 함박웃음을 지으며 진에게로 다가왔다. 도서관에서도 진은 늘 훈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이번엔 진이 훈을 만나러 왔건만, 여전히 훈이 먼저 진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진은 훈이 참으로 거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낯설고 머나먼 이국의 공기 같기만 한, 이 따스한 온기가 진에게 먼저 다정히 손 내밀어 주고 있음에 놀라면서도 감격스러웠다.
진은 훈이 내온 따뜻한 국화차를 마시며 처음으로 훈의 긴 이야기를 들었다. 훈은 사 년여를 다니던 직장에서 받은 퇴직금과 모아놓은 돈 전부에 대출까지 받아서 독립 서점을 열었다. 훈은 책을 무척 사랑했고 누구든 찾아와 책과 인생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공간을 꿈꿨다. 하지만 훈의 꿈은 냉혹한 현실 앞에서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훈의 서점은 책과 음악에 취하는 시적인 공간이라기보다 월세, 관리비에 시달리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훈이 이야기하는 동안 찻잔 속의 국화는 한순간 환하게 피어나더니 꽃잎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며 차츰 시들어 가고 있었다.
“사람 한 명 방문하지 않는 텅 빈 공간에 하루 종일 머물다 보면 쓸모없는 공간에 앉아 있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가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그렇군요. 하지만 이 서점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좋아할 수밖에 없는 공간인걸요. 책배치도 단정하고 책마다 달아 놓은 책방지기님의 코멘트도 무척 따뜻하고 진솔해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책방을 두고 왜 매일 도서관에 오신 거예요?”
“실은 서점 주인이 되고 나니 좋아하던 책들을 읽는 게 부담스러워졌어요. 인쇄소에서 나온 그대로의 새 책을 손님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거든요. 그러다보니 책을 읽기보다는 바라보기만 했고 책을 사랑하기보다는 아까워하기 시작했죠. 어느 날 책장을 정리하다 오랫동안 읽고 싶었지만 소중하게 아껴 두었던 책을 발견했어요. 여전히 팔리지 않은 채로 먼지만 하얗게 쌓여 있더라고요. 그날부터 서점 문을 일찍 닫고 도서관으로 갔어요. 다시 예전처럼 책을 읽고 사랑하고 싶어서요.”
훈에게 필요했던 건 도서관에서만 마실 수 있는 공기와 맡을 수 있는 냄새,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훈은 책과 사람이 함께 어울려 숨 쉬고 있는 도서관이 좋았다. 도서관에 있으면 스스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파는 삶에서 책을 읽는 삶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자 막혀 있던 숨통도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진 역시 왠지 모르게 가슴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자신의 꿈이 불쑥 떠올랐다. 진 역시 어린 시절부터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사람이 낯설고 힘들었던 진은 조용히 혼자만의 공간에서 책을 읽을 때 지극한 평화와 안정을 느꼈다. 그러면서 책과 함께하는 삶을 꿈꾼 적이 있었다. 도서관 계약직을 하고 있는 이유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책에 대한 열망과 사랑을 여전히 잠재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박 훈 씨는 책을 사랑하지만 책을 읽는 사람들도 사랑하는 거 같네요. 이 책방엔 그런 러브레터들이 가득해요. 그리고 서점 이름이 ‘오후 세 시의 행복’인데 혹시 어린 왕자에서 따온 것일까요?”
“그걸 아셨어요? 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 바로 ‘어린 왕자’예요. 책이 나를 길들였던 것처럼 이 서점에 오는 사람들도 그렇게 이 공간에 길들여지길 바랐죠. 또 저도 책을 읽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길들여지고 싶었고요. 제가 책 못지않게 사람도 많이 좋아하거든요. 지난번에도 느낀 거지만 우린 독서 취향이 참 비슷한 거 같네요. 혹시 책방 운영에 대한 아이디어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왠지 선생님에게서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아직 성함도 모르네요.”
“저는 이 진이라고 해요. 실은 저도 오래 전에 책방지기에 대한 꿈이 있었어요. ‘오후 세 시의 행복’을 살릴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를 한 번 생각해 볼게요. 제게도 어린 왕자는 아주 특별하고 소중하거든요. 이곳에 오는 모든 사람들을 확실하게 길들일 수 있는 방법을 꼭 찾아보겠습니다.”
진의 적극적인 반응에 훈은 큰 소리로 웃어 주었다. 진은 훈이 선물해 준 소설 한 권을 들고 서점을 나섰다. 여러 번 망설였던 걸음이었다. 하지만 용기 내어 찾아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점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진은 평소와 달리 두통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때보다 머릿속은 맑았고 가슴 안에서는 작은 반딧불이 여러 마리가 반짝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진은 가슴 속이 왠지 간지럽고 따뜻해서 가만히 손을 얹어 그 온기를 느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