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진다는 것
퇴근 시간이 되자 진은 서둘러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도착하니 문득 이모의 술이 생각났다. 집 근처에 자주 가는 마트가 있긴 하지만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더 걸어야 하고 집에서는 오히려 반대 방향이었다. 마트에 들르려면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게 분명했다. 진은 버스를 타기 전에 술을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간판을 확인했다. 그동안 한 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편의점이 길 건너편에 하나 보였다. 편의점으로 달려 들어간 진은 그대로 냉장고 앞으로 직행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소주를 여러 병 담아 계산대로 갔다. 그때 좁은 편의점 매대 사이에서 한 사람이 진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부딪힐 뻔한 진은 놀라서 한 발 뒤로 주춤 물러섰다. 잠시 세상은 그대로 멈추었다. 그는 훈이었다. 놀란 진은 소주병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재빨리 등 뒤로 숨겼다. 하지만 병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내는 댕그랑거리는 마찰음에 그의 눈은 이미 바구니를 향한 뒤였다. 훈은 멈칫하며 놀란 눈으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에 대해선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권해 주신 소설을 읽다가 저녁거리를 사러 나왔어요. 책 읽으면서 먹는 삼각 김밥과 라면은 정말 최고거든요. 참, 저는 저기 맞은편에 보이는 ‘오후 세 시의 행복’이란 책방을 운영하고 있어요. 지나가다가 보셨을 지도 모르겠네요. 언제 한 번 꼭 들러 주세요. 저도 선생님께 재미있는 책을 소개해 드릴게요.”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진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 한마디 못하다 황급히 인사만 하고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왜 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을까?’ 라는 후회가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은 뒤에야 불현듯 밀려왔다. 그때까지도 진의 심장은 훈을 만난 설렘과 부끄러움으로 계속해서 두방망이질만 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젊은 여자가 이른 시간부터 소주를 잔뜩 사 들고 가는 모습을 보고 대체 무슨 상상을 했을까?’
부끄러움으로 붉어진 얼굴이 뜨겁게 화끈거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의 풍경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후 세 시의 행복’이란 서점 이름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혹시 ‘어린 왕자’에 나온 여우의 말을 서점 이름으로 지은 것일까? 그렇다면 훈도 어린 왕자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진이 어린 시절부터 가장 좋아한 책은 ‘어린 왕자’였다. 외로움에 숨이 막힐 때마다 진은 어린 왕자를 읽고 또 읽기를 반복했다. 작은 별에서 홀로 지는 해를 보며 슬픔을 달래는 어린 왕자의 모습이 자기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린 왕자를 보고 있으면 마음은 더욱더 슬퍼졌지만 왠지 모르게 그 슬픔이 묘한 위로가 되었다.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진은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여우의 말은 늘 낯설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누군가를 기다리는 설렘과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진에게 오후 세 시의 행복을 느낄 기회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어린 왕자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던 진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닫고 깜짝 놀랐다. 언제부턴가 진은 훈이 도서관에 오기 한 시간 전부터 매일같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진은 훈에게 길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진에게 신경 쓰거나 생각해야 할 사람은 이모 하나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낯선 남자에 대한 갑작스러운 호기심은 진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든 피로감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 또다시 두통이 시작되었다. 진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거나 누군가와 가까워지기 시작하면 머리가 아팠다. 지독한 두통 때문에 대학 때부터 동아리 활동도 하지 못했고 어떤 모임에도 가입할 수가 없었다. 진의 두통은 일종의 경고였다.
‘진, 너는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어. 누구든 너에게 상처를 주게 될 거야. 그러니 미리 도망치는 게 나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고 있다 보니 어느새 버스는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모와 사는 곳은 오래되고 낡은 빌라의 3층이었다. 외벽은 시멘트가 다 벗겨져 이미 무채색으로 변해 버렸고 건물 내부의 계단은 군데군데 깨지고 파여 있었다. 내벽은 모두 시커멓게 때가 타 있고 여기저기 거미들이 다투어 집을 짓고 있었다. 밤이면 수시로 깜빡거리고 꺼져 버리는 등 때문에 손으로 벽을 더듬더듬 짚으면서 계단을 올라가야만 했다. 빌라의 내부 역시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벽지는 세월의 때로 원래의 색을 잃고 회색빛이 되었으며, 장판 여기저기에는 깊게 파인 상처와 지워지지 않는 오염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이 집은 진에겐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안전한 공간이었다. 곰팡이와 바퀴벌레가 들끓어도 이모와 진 이외엔 어떤 사람도 들어올 수 없는, 둘만의 완벽한 피신처였기 때문이다.
“이모, 나 왔어.”
진은 신발을 벗기도 전에 소리부터 질렀다. 이상하리만치 집안이 조용했다. 술에 취해 잠들어 있기 일쑤인 이모이기에 얼른 이모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모는 없었다. 거실에는 다 먹은 빈 병들이 굴러다니고 있고 이모가 한동안 앉아서 노래를 흥얼거렸을 자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거기에 이모가 투명인간이라도 되어 앉아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이모의 존재가 공기와 흔적만으로도 느껴졌다. 진의 방도 역시 텅 비어 있었다. 갑자기 두려움이 하얀 화선지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처럼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렸던 이모의 꺽꺽거리는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심하게 뛰기 시작하더니 이내 온몸이 위아래로 들썩거리며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겨우 몇 발자국 앞에 있는 욕실까지 진은 사력을 다해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걸어갔다. 그리고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시간이 갑자기 느리게 가기라도 하는 듯 진은 아주 천천히 문고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문을 열어젖혔다. 절대 보아서는 안 될 무엇이 그 안에서 진을 기다리기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순간 코끝으로 달큼한 싸구려 바디클렌저의 꽃향기가 훅하고 끼쳐 왔다.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자 방금 전 누군가가 막 씻고 나간 듯한 후끈한 열기가 진의 몸을 덮쳐 왔다. 욕실 거울에는 아직도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순간 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참 뒤 정신을 가다듬고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은 계속해서 울리지만 이모는 받지 않았다. 진은 이모의 죽음을 내내 두려워하고 있었던 자기 자신과 맞닥뜨렸다. 늘 이모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날카롭게 가슴을 찔렀다. 그 일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스스로에게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는 것은 실제로 그 사람이 죽기 전까지 수도 없이 그를 죽이는 살인과 마찬가지일 터였다. 하지만 진은 죄책감을 느끼기엔 왠지 억울했다. 이모와 진은 서로의 보호자로 지금까지 그런대로 잘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진은 그동안 견고한 성 안에 이모와 자기를 안전하게 숨겨 두는 데 성공했다고 믿어 왔다. 하지만 텅 비어 있는 집을 보자, 왠지 ‘그 성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모래성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나?’ 하는 불안이 밀려왔다.